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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룡 Aug 08. 2020

커피, 너처럼 되고 싶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매일 아침 출근길에 내가 꼭 하는 일은,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에 들러 커피를 사는 것이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고, 회사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나면 자연스럽게 또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오후 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간혹 고객을 만나거나 회의를 하면서 오후에 한 잔 더 커피를 마시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하루에 기본 2잔, 때로는 3잔의 커피를 마시고 있다. 어차피 점심식사 이후에 커피를 먹게 되기 때문에 오전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으려고 해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커피가 없으니 도무지 일이 잡히지 않아 결국 커피를 사 와야 했다.


물론 커피는 맛있다. 하지만 맛으로 본다면 파스타나 스시나 스테이크나, 훨씬 더 맛있는 음식도 많지 않은가.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커피 없이는 하루도 견디기 어려워졌을까?


나에게 커피는 무엇인지, 커피를 마시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도 사치가 필요했다.


사실 커피도 사치품이다. 믹스커피나 집에서 내려먹는 드립 커피는 아닐지 몰라도, 5천 원가량 하는 카페 커피에는 분명 많은 프리미엄이 붙어 있다. 한 번은 친구와 둘이서 밥을 먹으면서 한 사람은 밥을, 한 사람은 커피를 사기로 했는데, 밥값보다 커피값이 더 많이 나온 적도 있었다. 그래도 음식점에서는 밥과 국, 김치와 반찬을 비롯해 푸짐한 백반 한 상을 차려 먹었는데, 컵 하나에 담긴 음료가 그 식사보다 비싸고, 또 그토록 비싼 음료가 이렇게 대중화되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내가 직장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아직 취업을 하지 않은 친구들이 '직장생활을 하면 무엇이 가장 좋냐'라고 물어보면, 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맘껏 사 마실 수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커피정도는 사 마실 수 있는 경제력이 생겼다는 의미였지만, 사실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기도 했다. 이전부터 커피를 좋아했던 나는 대학생 시절에는 돈이 없어서 커피를 마시고 싶어도 자판기에서 조지아 캔커피를 사 마시곤 했다. 그래서 지금은 카페에서 5천 원짜리 커피를 큰 고민 없이 사 마실 수 있을 때 직장 생활의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주변에도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골프나 피규어 수집 등 많은 돈이 드는 취미를 가지거나, 명품 차나 가방, 시계 등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행동은 어쩌면 과시라기보다는, '힘들게 직장생활을 하며 돈을 번 덕에 이런 것도 살 수 있다.'라는 자기 위안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커피는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명품은 아니지만, 작은 사치이자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기도 하다.




커피 한 잔의 여유가 필요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주말에 스타벅스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다. 처음에는 약속이 없는 한가한 주말에 종종 이렇게 혼자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넷플릭스를 보고 글을 쓰곤 했다. 이렇게 커피와 함께하는 여유로운 시간은 지친 한주를 보낸 나에게 잠깐의 휴식이자, 다음 한 주를 위한 활력소가 되었다. 이제는 약속이 없고 한가해서 카페에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약속을 줄이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지난해 베스트셀러였던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보면 그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여행에 가서 호텔에 투숙하면 집에 있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집안일과 각종 의무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호텔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집이 아니다. 어떻게 다른가? 집은 의무의 공간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즉각 처리 가능한 일도 있고, 큰맘 먹고 언젠가 해치워야 할 해묵은 숙제들도 있다. 집은 일터이기도 하다. 나는 컴퓨터 모니터만 봐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니,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만 봐도 그렇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中


단순히 커피가 좋은 것이라면 나도 커피를 사다가 집에서 마시며 다른 일을 해도 된다. 하지만 집에서는 그런 여유가 느껴지지 않는다. 의자가 카페보다 더 푹신하고 책상이 더 넓을지 몰라도, 책상에는 항상 공부해야 할 다른 책이 보이고, 집에 있으면 있을수록 설거지나 청소를 비롯해 나의 여유를 방해하는 다른 의무들이 생긴다.


김영하 작가처럼 나도 여행을 가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직장인이 일 년에 몇 번이나 여행을 갈 수 있을까. 단 몇 시간이나마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면 집에 있는 것보다도 더 온전한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어쩌면 나에게도 커피를 마시는 것은 핑계일 뿐,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커피, 나도 너처럼 되고 싶다.


집에서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면 한 잔에 2백 원도 되지 않는 가격으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하지만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한 잔에 5천 원이 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5천 원짜리 아메리카노'의 원가는 얼마일까? 물론 넓은 의미에서 인건비나 매장 임차료도 원가에 포함되지만, 단순히 커피의 원재료인 원두 가격만 본다면 5백 원을 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집에서 마시는 인스턴트커피도, 카페에서 파는 아메리카노도 그 안에 들어가는 커피는 모두 커피나무의 열매로 만든 원두였다. 원두에도 등급 차이는 있지만, 같은 등급의 원두라고 해도 그것이 나중에 인스턴트커피가 되느냐 아메리카노가 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많게는 수십 배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커피에 비유해본다면 나 자신은 어떨까? 그리 풍족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자란 나는 그다지 등급이 높지 않은 원두였을 것이다. 그래도 남들보다 조금은 공부를 더 열심히 한 덕에, 지금은 서울에서 직장을 얻고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가진 것은 많지 않기에, 지금의 나는 2천 원대 테이크아웃 커피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근에 계속되는 집값 상승과 전세난으로 나도 작게나마 내 집을 갖고 싶은 마음에 여기저기 집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비싼 집값에 또 한 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서울 그 좋은 집들에 살고 있는 '5천 원짜리 아메리카노'같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좋은 집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나와는 다른 '고급 원두'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


원두는 처음에 낮은 등급의 원두이더라도,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로 다시 태어나면 고급 원두의 가치를 따라잡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에는 몇 백 원에 불과한 원두가 수십 배의 가치를 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로스팅 과정을 거쳐 바리스타에 의해 에스프레소로 추출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가진 매장에서 예쁜 컵에 담겨야만, 비로소 사람들이 사치품임을 알면서도 지갑을 여는 '5천 원짜리 아메리카노'가 된다.


그래서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 사치를 즐기고 여유를 누리는 동시에 커피를 보고 각성하게 된다. 지금보다 더 노력하고 열심히 살면, 언젠가 나도 처음보다 수십 배의 가치를 내는 '5천 원짜리 아메리카노'같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너처럼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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