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구리 Feb 26. 2016

청년이 되고자 하는 아이, 숲 속에 놓고 오기 1

아들 녀석 지방 학교에  데려다주는 날

아이는 언제 청년이 되고 언제 어른이 되는 걸까. 당연히 어느 한 시점을 말할 수 없을 것이고 그 구분조차 불분명하지만 어느새 돌아보면 변해있는 것을 느낀다.     


오케스트라 공연을 마치고 아이는 송년회를 해준다는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갔다. 벌써 9년을 함께한 아이들을 비롯해 몇몇과도 최소 3년은 함께 보냈으니 꽤 정이 들만도 하다. 저녁식사를 마련한 친구들이 기특하면서도 함께 아들과 저녁을 못해 서운한 기분이 동시에 다가온다.      

한달전 제주를 방문해 따라비 오름에 올랐던 모습.

내가 어디 가냐고? 내 아들이 어딘가에 간다.      


저녁 식사 후 오케스트라 뒤풀이 장소에 녀석들이 나타났다. 2년여간 자신에게 트럼펫을 가르쳐준 선생과 다른 파트, 트롬본이나 베이스를 비롯, 기타 현악기 선생들에게 인사를 하러 들렀다. 그래도 지들끼리 저녁 먹고 헤어질 줄 알았는데 인사를 하러 왔다. ‘의리는 있네’싶다.     


아들은 아는 형네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오는 스케줄을 제시했다. 이래저래 많은 일정을 소화한다. 청소년기의 학생을 내 뜻에 맞게 일정을 맞춘다는 게  애시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내일 낮 12시까지는 집에 돌아오라고 당부를 하고 아이를 보냈다.      


아이는 언제 청년이 되고 언제 어른이 되는 걸까


내일은 아내가 지신밟기 풍물패의 주요 멤버로 참여하느라 하루 종일 바쁘다. 아이 짐 싸고 준비하는 과정이 내 몫이다. 오랜만에 아이의 짐을 싸준다. 몇 년 만인지 모른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저 학년 때까지 늘 내 몫이었던 것이  어느덧 엄마에게 넘어가고 난 후 잊고 살았다.     


저녁 무렵 아이를 데리고 마트에 가서 부족한 물건들을 샀다. 서랍장을 비롯해 더 무엇이 필요한 거지. 녀석은 아무런 생각이 없다. 아님 없는  척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떠나는 건 녀석인데 괜히 긴장되는 건 내가 더한 느낌이다.     


아침시간, 일부러 깨우지 않고 시간을 보낸다. 평소 같으면 일찍부터 재촉할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우선 아내가  어제저녁 새벽 2시가 넘어 들어왔다. 이미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는 나와 아이에게  이런저런 잔소리와 함께 서운함을 표시했다. 상태를 볼 때 아침에 제 시간에 일어나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아이도 마지막 날 임에도 불구하고  게임 중계를 보더니 한 시대를 풍미한 ‘LOL’을 한다. 새벽 2시가 다되어간다.     


“진짜 오랜만에 야스오 캐릭터로 해보자. 이거 너무 오랜만이야”     


헤드셋 상태로 다른 팀원과 함께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저걸 버럭 하며 끊어버리기에는 나도 마음이 짠하다.     


“이제 많이 늦었으니 그만 자자”

“응”


원래 계획대로 하면 최소 아침 8시에는 나가야 여유롭게 도착할 수 있다. 넉넉잡고 5시간을 잡아야 중간에 밥 먹고 차 한잔 마시면서 여유롭게 갈 수 있다. 아들이 가는 학교는 그렇게 멀다. 가는 데만 5시간 걸린다.      


버스를 갈아타고 기다리고 하는 시간이 아니라 온전히 차를 운전해서 갈 경우 걸리는 시간이다. 경북 봉화에서 차를 몰고 1시간 반 이상을 더 들어간다. 참 깊고 깊은 곳이다. 아직도 이토록 깊은 산골이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그곳에 학교를 세워놓고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학교 설립자의 의지나 목표도 남다르다 싶다. 또 함께 생활하는 선생님들의 결심은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사실 의아한 부분이기도 하다.     


아침에는 나 역시 피곤하긴 마찬가지. 8시 30분에 일어났다. 많이 늦은 시간이다. 여전히 다른 식구들은 기척이 없다. 코 고는 소리마저 들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잠을 깨우고는 하나씩 준비를 시작한다. 지난밤 쌓아두었던 짐들을 차로 나르기 시작했다. 서랍장으로 사용할 박스에 세면도구와 세제, 옷가지와 기타의 것들을 주섬주섬 차에 싣다 보니 한 가득이다. 차가 경차라 한가득처럼 느껴지지만 생각보다 짐이 많지는 않다.     


출발을 하기 위해 차를 빼는데 낯선 할아버지가 뒤꽁무니로 주차장을 나서는 차를 보며 손짓해준다. 고맙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굳이 그리 안 해도 다 보이는데...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나에게 말을 건다.    

  

“차 뒷바퀴가 바람이 많이 빠졌으니 꼭 확인해 보세요.”     


처음에는 뭔 소린가 싶었지만 고마운 분이다. 바퀴의 상태를 보고 걱정이 되어 알려주는 배려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귀찮고 배척하려는 마음이 먼저 들었던 나의 심사가 얼마가 삐뚤어졌는지를 다시 한번 실감한다. 난 언제부터 이토록 타인에 대해 배타적인 된 것일까. 귀차니즘이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로 변해도 나의 변질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한 꼴이 되어 버렸다. 내 자신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     


카센터에 가보니 바퀴에 못이 박혔다. 이대로 고속도로를 달려갔으면 큰일 날  뻔했다.  다시 한번 나이 지긋하신 그분이 고맙다. 시간은 늦었는데 아내는 여유롭다. 아이를 학교에 내려보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큰일이 없으니 굳이 서두를 이유도 없는 셈이다. 그래도 나는 2시까지 약속한 것이 있어 시간을 맞추려는 마음이 큰데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약속은 내가 한 것이지 그 사람이 한 것은 아니다. 내가 아내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차하고 가자”

“늦었는데”

“그래도 저 상태로는 못 봐주겠어”     


세차를 하고 출발하니 10시다. 양화대교 북쪽에서 올라탄 강변북로는 월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여전히 자동차로 가득하다. 서울에서야 시간대가 의미가 없겠지만 오랜만에 꽉 막히는 서울의 도로를 운전하는데 이제 이것도 낯설다. 두 사람은 시간의 흐름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잠에 취해 차창 밖의 풍경을 시간과 함께 날려 보낸다.   

  

어제저녁부터 아파온 고질병인 허리가 여전히 괴롭다. 오늘 하루 종일 운전을 하고 나면 이 허리 상태는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 뻔하다. 그래도 운전을 할  수밖에 없다. 한남대교를 지나자 차가 속도를 낸다. 이곳까지가 늘 막힌다. 시간의 구애를 받지않고 막힌다.       


강북강변도로가 속도를 받쳐주고 연이어 중부고속도로도 막힘이 없다. 이대로 가면 호법까지 쉽게 갈 수 있겠다. 한참을  오른발에 힘을 주어 속도를 내고 있으니 한마디가 나온다.     


“배고프다. 밥 먹고 가자”     


아침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배고픈 게 당연하다. 그래도 아들 녀석은 잠에 취해 있다. 가는 내내 녀석은 잠에 취해 깨어나질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을 판단하기 싫어 잠에 취하는 선택을 했는지도 모른다. 귀차니즘이기도 하지만 상황의 변화에 스스로 판단하고 무언가를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거나 방어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중부를 지난 고속도로는 영동고속도로에 다시 중부내륙을 거쳐 또 중앙고속도로까지 내려가다 옆으로 다시 내려가는 계단형 길을 반복한다. 중부내륙과 중부를 연결시켜주는 새로 난 길은 차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기분이 좋다. 이곳이 좋은 이유는 산세가 낯설고 험한 곳에 아주 새로운 기분을 덩달아 주기 때문이다.     


늘 이곳을 지나다 보면 깊은 산속에 안개가 잔뜩 끼어있는 첩첩산중과 그곳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과거의 영혼을 생각나게 한다. 뜬금없는 생각을 나게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난 이 길이 좋다. 한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풍광이 펼쳐진다는 것은 운전하면서 누릴 수 있는 사치 중 하나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지만 사실 정해진 시간도 아니고 도착 후 딱히 다른 일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난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운전 중인지 갑자기  낯설어진다. 2시까지 간다고 한 약속만이 유효할 뿐이다. 결국 아들을 떨어뜨려 놓기 위해 깊은 산속을 향해 가는 셈이다.     


언뜻 헨젤과 그레텔 생각이 났다. 그들 남매의 부모들은 물론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그 같은 결정을 내렸겠지만 자식을 낯선 곳에 떨구어 놓고 오는 심정이 어땠을까. 아마 아들이 그냥 버스를 타고 휙 가버렸으면 기분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은 헨젤과 그레텔의 부모는 자식과의 인연을 끊기 위한 선택이었고 나는 자식이 성장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차이로 스스로를 위안 삼는다.      

본태박물관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 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방국도를 타고 굽이굽이를 넘으니 이제는 다소 익숙한 장소에 까지 도달했다. 학교 교정이 저 멀리 보인다. 앞에 놓인 커다랗고 높은 산세가 가로막고 있다. 저 첩첩산중을 넘으면 울진이지 싶다. 그런데 공교롭게 학교 앞을 지나는 도로는 저 너머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도로가 산속으로 이어지다 끊긴 것이다. 그런 덕인지 이곳을 왕래하는 차량이 현저히 적다. 다행이다.     


몇 번이고 만나고 이야기를 나눴던 교사가 마중을 나왔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아들을 반겨준다. 나에게도 인사하는 아이들. 저들과 같은 무리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     


아이가 지낼 방은 4인실이다. 침대를 배정받고 아이들이 주섬주섬 짐을 받아 자리를 깔아준다. 아이가 이미 체험캠프를 거쳤기 때문에 낯선 얼굴들은 아니다.  멋쩍어하는 남자아이들은 그들만의 시간이 되면 다시 그들의 방식으로 친해지기 마련이다.     


헨젤과 그레텔의 부모는 자식과의 인연을 끊기 위한 선택이었고 나는 자식이 성장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차이로 스스로를 위안 삼는다


낯설어하는 것은  나일뿐이다. 이곳은 내가 이방인이고 그들의 보금자리에 내가 어설프게 들어온 셈이다.  

     

학교 한복판에 버티고 서 있는 나무를 보며 모진 비바람에도 끄덕 없이 지키고 서있었을 든든함을 느낀다. 나무에 잎이 달리고 여름이 되면 더 좋은 쉼터를 줄 것이다. 아이가 짐을 풀고 선생과 함께 간단한 상담을 한다. 우리 부부 역시 서로 간의 주의점이나 기타 이야기를 듣는다. 여전히 웃고 있지만 이 상황은 낯설다. 아이가 부모에게서 떨어진다는 사실이 애써 외면해도 편치는 않은 상황이다. 그래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아이 스스로 이곳을 택했다.      


이제는 자동차 키를 넘기듯 아이의 모든 생활을 이곳에 넘기려 한다. 다만 그들이 운전하지 않고 아이가 자신의 자동차를 운전하기를 바랄 뿐이다. 더 이상  세발자전거를 타거나 보드를 타는 것처럼 놀이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운전할 운전능력을 익히기를 바랄 뿐이다.      


새롭게 만날 때 청소년이 되어있고 다시 어른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녀석을 보고 있으니 어느덧 녀석은 나보다 몸뚱이는 커다란 청년이 되어 있다. 몸만큼이나 마음도 크고 세상에 대한 각오가 섰으면 좋겠다.     

“너에게는 여기가 집이고 가족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생활해라”   

  

녀석에게 각오를 다지도록 독한 말을 하고 돌아선다. 아마도 올해 내내 힘든 생활을 할 것이다. 자신을 찾는 지난 한 작업의 첫발을 내딛는 출발점에 와있으니.     


아무 일 없듯 차에 올랐다. 헨젤과 그레텔의 부모는 자식을 숲 속에 버려두면서 수차례 후회를 했을게다. 난 그 후회보다는 잘한 결정이었기를 수도 없이 되뇐다.      


아이가 새롭게 만난 집이 마녀의 집이 아니라 마술사의 집이기를 기대하면서 시동을 걸었다. 


2016.02.26.

<2편으로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집중과 집착의 줄타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