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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Mar 04. 2016

물영아리오름_추운 날씨 샘내기와 나들이

수망리의 낯선 물영아리 오름을 가다

오랫 맛에 창으로 빛이 스며든다. 아침 시간이 수상하다. 이런 날이 거의 없는데다 해도 잘 비치지 않는 방구석에 슬며시 빛이 드니 낯설수 밖에 없다.


한 겨울의 제주날씨, 특히 올해처럼 유난스러운 겨울날씨를 접해보면 어릴적 농담처럼 씨부리던 단어나 문구들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겨울을 나면서 '광합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뇌였다.


어디 해가 보이는 날이 일주일에 하루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부터 언제부터 태양이 없는 날씨가 겨울이었나 싶은 생각까지 sunny weather에 대한 그리움은 계속해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물론 주말이 되어 서울을 다녀오던 날이면 어김없이 '어제 제주 날씨 오랫만에 너무 좋았어'라는 날씨평들이 주변에서 들려온다. 날씨가 나를 피해가던가 내가 구름을 몰고오던가 둘중의 하나가 분명하다.

초입에 쓰여진 물영아리 오름에 대한 설명. 자세히 읽어보려 했으나 잘 보이질 않았다.

큰 어려움 없이 물영아리라는 오름을 찾았고 정상의 분화구에 물이 고여있다는 드문 경우를 소개하는 블로그 몇편을 찾았다. 그런 점을 떠나 적절한 시간의 등반을 하고 다시 남쪽으로 휫 달아나기 좋은 장소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차를 타고 가다보니 주소는 수망리다. 제주시 경계를 넘은지 얼마 되지 않은 지역의 초입 길가에 생뚱맞은 오름 주차장과 표지석이 서있다. 재빨리 차를 옆으로 세우고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주변을 살피기를 잘했다. 오름과 상관없이 멀리 보이는 한라산 정상이 눈덮인 모습으로 하루를 반겨주고 있다. 


하늘이 파랗다는 것은 제주의 풍경을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우중충한 날씨의 그 순간으로 저주를 퍼부었던 심정도 언제 그랬냐 싶게 다시 하늘을 우러르고 삶을 찬양하게 된다. 아름다운 날들이여!


기차역 받침목처럼 나란히 줄지어 길을 안내하고 있는 받침목.

입구를 지나면서 차분한 걸음걸이에 힘이 실린다. 밑바닥에 깔아놓은 받침목과 내 보폭이 도무지 맞지 않는다. 어느 인간이 걷는 사람의 보폭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런 넓이로 폭을 좁게 해 놓았을까. 개념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멀리 물영아리 오름의 산세와 주변을 둘러싼 삼나무가 묘한 그림을 내놓는다. 


내가 화가였으면 좋겠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을 뿐이다. 그림실력이 형편없어 스스로 좌절하지만 그래도 흰 여백의 백지위에 까만색 연필을 휘둘러가며 그림을 그리고 싶다. 물영아리를 보며 그 욕구가 다시 떠오른다.


길을 따라 이어지는 데크는 안전하게 나를 길로 인도하고 있어 처음에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일정 걸음걸이를 옮기고 보면 내가 밑에 깔리 데크이외에는 아무런 일탈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더불어 알게 모르게 이들에게 유도되고 있는 자신과 그 안에서 만족하고 있는 이상한 자아를 실현하는 중년을 만난다. 


이러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신부와 목사 혹은 신도들에 의해 둘러 쌓여진 내 목숨을 내놓기 위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무언지 모를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정해진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람사르습지는 점차 사라져가는 습지와 습지에 살고 있는 새물들을 보전하기 위해 체결된 람사르 협약에 의해 지정된 습지입니다. 물영아리오름 일대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으며 람사를습지로 등록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2006년 10월 람사르습지로 지정됐습니다.>

오르다 힘에 지쳐 뒤돌아 보고 찰칵

다행이다. 이곳이 람사르습지로 지정되어 보전되는 곳이다. 습지라는 이름의 자연스러움을 간직한 곳이라는 점이 내가 이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낯설지 않고 올바른 선택이라는 위안을 준다.


길은 이윽고 갑자기 방향을 바꿔 예상못한 비웃음으로 나의 길을 막아선다. 일직선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이 계단의 얼만큼을 올라야 분화구의 언저리에 자리한 정상에 오를 수 있을까. 앞을 안보고 발만 보며 위로 걷고 있다. 숨이찬다. 등뒤가 서서히 더워지기 시작한다. 땀이 나고 있다. 이 땀이 식으면 다시 감기에 걸리기 쉬운 조건이 된다. 천천히 걸어야 한다.

지쳐쓰러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떡하니 눈앞에 의자가 만들어진 쉼터가 나타난다. 아!  지독한 인간들이여. 나에게 잠깐의 쉼으로 정상을 유혹하는 자들이여!


다시 아주 잠시잠깐의 쉼을 멀리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앞부분의 나무계단이 내 앞에 길을 내며 오르고 있다. 이들은 이 산이 공부방이라도 되나. 고지가 보인다. 더이상 계단이 올라가지 않는다. 이 많은 계단은 이 구비가 꺽인 고개에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능선에 올랐다. 마지막 순간까지 물영아리는 이 호사를 나에게 배려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주변이 아득하다. 경관을 볼 수 있는 무엇하나 주변에 없다. 여기 산정에서 바깥을 제대로 볼 수 있으면 이미 이자리에 있지도 않았으리라.


능선에 다다른 발걸음은 쉴틈도 없이 바로 분화구 아래로 발길을 이끈다. 정처없이 내려가는 계단에는 스산한 계절이 있다. 아직 겨울이다. 그 겨울의 정처없음을 나무가 전해준다.

능선에서 분화구로 내려가는 계단


잠깐을 내려가니 분화구에 섰다. 물이 담겨있는 정상을 본지가 드물어선지 대단한 풍경도 아닌데 이곳은 낯설다. 오름에 오르면 대체로 능선을 한바퀴돌고 제자리에서 다시 내려간다. 분화구에 담긴 물을 보기위해 내려오는 경우는 드물다.


습지는 습지다. 물이 조금 더 담겨 있으면 좋겠지만 어는 육지의 자그마한 호수를 보듯 잔잔한 호수에 잡목과 나무가 자라고 색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다. 가을이면 더 느낌이 깊게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겨울인가. 겨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봄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마치 철새라도 물가에 앉았다가 푸드득 날아갈 듯 한데 철새 대신에 뒷편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침잠의 시간을 주지는 않을 모양이다. 그들이 오기까지 잠깐의 시간, 이곳은 나의 쉼터이다. 점점 더 사람들이 다가오고 나는 그들에게 눈인사를 하는 사이 아이들 2명이 나에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나는 그들에게 인사할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어렵게 응답하며 눈길을 마주한다. 이들은 나에게 적의가 없다. 뭐 지나는 사람에 대한 인사는 스쳐지나는 인생의 찰나에 불과한 것을...

그것조차 나에게는 낯선 지방이다. 

원위치에 돌아서니 올라올때 보폭이 좁았던 나무 받침들의 간격이 좁지 않다. 보폭에 맞는다. 내가 보폭을 이 나무받침에 맞춘 것인지 아님 내려올때를 예상하고 나무간의 간격을 좁게 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느덧 적응이 됐다.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잠깐 사이에 나 자신이 간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뒷편에 돌아 한라산에 내린 눈꽃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음을 감사한다. 여기는 여전히 제주의 오름이다. 다시 내가 오름에 오르기로 했음을 깨달았다.  여기는 여전히 제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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