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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Jun 15. 2017

붉은오름 앞의 낯선 두 오름_구두리와 가문이오름

사람들의 발길을 멀리하도록 만드는 숲의 힘

일 년에 일주일간만 열리는 사려니오름길로 인해  붉은오름 입구는 바야흐로 인산인해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으나 자동차는 주차장에 끊임이 없다. 원래의 사려니숲길 앞의 주차금지로 인해 비교적 주차공간이 넓은 붉은오름 입구가 새롭게 각광을 받게 됐다.


붉은오름은 휴양림으로 나있는 별도의 탐방로가 있는지라 사려니숲길의 탐방객들은 붉은오름 대신 안쪽의 물찻오름이나 일주일만 열리는 사려니오름을 찾게 될 것이다. 

저런 오름 안내판이 있다는 것은 자동차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천천히 입구를 찾아 들어간다

지난해 안개에 싸였던 사려니오름의 추억이 떠오른다. 공교롭게도 제주를 찾은 아들 녀석이 학교의 팀원들과 사려니숲길에서 자기성찰을 하고 있단다. 멀지 않은 머체왓숲길을 걷고 나서 시간이 남아 이 근처의 오름을 다시 찾기로 했다. 오는 도중에 물영아리 뒤편의 영아리오름이나 쳇망오름을 가려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목장이 있는 때문인지 입구로 예상되는 길이 차로는 들어갈 수 없도록 철문으로 잠겨있다. 아마도 사유지라 담 넘고 걸어 들어가야 할 모양이다.  더구나 거침없이 달리는 차들과 함께 갓길에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은지라 이 오름들은 포기하기로 한다. 다음에 찬찬히 아침이나 사람이 없는 시간에 찾아올 일이다. 


붉은오름 맞은편을 지나다가 발견한 오름 입구에 대한 표지판을 봐 둔 곳이 있다. 저런 오름 안내판이 있다는 것은 자동차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천천히 입구를 찾아 들어간다.


눈여겨보지 않았으면 결코 찾아가기 쉽지 않을 구두리오름과 가문이오름이 나란히 병기되어 있다. 길 거너편의 붉은오름 입구는 수없이 많은 승용차와 관광버스가 많은 사람을 싣거나 부리는 중이다. 이곳을 걸어 들어가는 인간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입구로 차를 천천히 몰고 들어간다. 혹시라도 다른 차들이 나오면 어찌하나 싶게 들어가는데 공교롭게 포장이 되어 있는 도로다. 교행 할만한 넓이는 아니지만 포장이 되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래도 다닌다는 것인데 이쪽 오름을 오기 위해 사람들이 다니는 것 같지는 않다. 초입에 버섯농장이 보이고 아래까지 들어가 보니 길이 쇠문으로 막혀있다. 공유지이거나 사유지이거나 관계자들만이 출입할 지역이다.


오른편에 갑자기 가문이오름에 대한 안내문이 나온다. 차를 세울 곳도 없는데 안내판이 서있는 것을 보면 여기가 오름 입구라는 말이다. 차를 세우기 위해 계속 몰고 간다. 왼편에 주차할 공간이 있다. 그 앞에 구두리오름에 대한 표지판이 서있다.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으니 구두리오름부터 오르기로 했다.


위쪽이 구두리오름 아래가 거문이오름. 맞은편 붉은오름 밑의 초록색이 사려니숲길이다.


구두리오름

표고 517m 비고 117m
가시리와 교래리의 경계에 있는 오름으로, 한자어로 '구두리(九斗里)'로 쓰이며 구돌악(拘乭岳)으로도 표기하는데 모양새가 개의 머리와 비슷하여 '구두악(拘頭岳)'이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구두리오름 가는 길은 붉은오름 자연휴양림 입구 맞은편으로 들어가고 산세는 꽤 높은 데다 좋고 가파를 사면을 이루고 있다. 현재 굼부리는 말굽형으로 되어 있지만 처음에는 원형이었던 것이 한쪽이 침식되면서 말굽모양으로 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전사면은 자연림과 조림된 삼나무, 측백나무, 소나무 등이 울창하게 자라나고 있으며 봄철에는 정상에 피어 있는 복수초와 노루귀 같은 야생화를 만날 수 있다.


별거 아닌 오름이라 생각했는데 몇 가지 난관에 부딪힌다. 일단 길이 만만치 않게 우거져 있을뿐더러 생각보다 산세가 높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오름이라 괜히 겁이 난다. 물론 조난당할 염려는 없지만 바로 맞은편의 도떼기시장 같은 분위기와는 너무나 다른 때문인지 괜한 스산함이 감돈다. 실제로 나무나 풀의 분포가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 강해 음산한 느낌마저 강해진다. 


그래도 길이 제대로 나아있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역시 설명대로 산세가 험하다. 지도를 바라봐도 비탈이 아주 가파른 곳으로 길이 이어져 있다. 헐래 벌떡 오르는데 여간 힘들지 않다.


가는 도중 건천과 삼나무 숲도 만난다. 무엇보다 삼나무 숲과 밑에서 자라는 식물의 조화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경치를 만들어 낸다. 넓적한 잎으로 가득한 풀이 삼나무 숲 밑을 장악하고 있었다. 


중턱에 이르러서부터 하늘에서 까마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으레 깊은 산속에 있는 까마귀라고 생각하는데 이 녀석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내가 오르는 내내 계속해서 울어댄다. 까르르... 위쪽의 다른 까마귀가 반응하는 소리를 낸다. 아래쪽에서도 똑같은 반응이다. 자세히 들어보니 이 녀석이 나를 경계하는 소리는 내고 있다. 내가 걸어 올라가는 위쪽 나무 위를 나를 따라 옮겨가며 계속해서 경계의 울음소리를 낸다.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아래쪽부터 나를 따라오는 까마귀의 모습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녀석에게는 커다란 비상상황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라고는 콧방귀도 찾아보기 힘든 곳에 오후 느지막이 이상한 녀석이 불쑥 나타나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며 성큼성큼 지나가고 있으니 경계를 할 밖에... 다른 동료들에게도 조심하라며 경계의 소리를 보내고 다른 까마귀들도 이에 화답한다. 

사람이라고는 콧방귀도 찾아보기 힘든 곳에 오후 느지막이 이상한 녀석이 불쑥 나타나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며 성큼성큼 지나가고 있으니 경계를 할 밖에...

중턱을 넘어서는 사이. 나무 한 그루가 부러져 탐방로를 가로지르며 출입을 막아선다. 이곳 이상을 오르지 말라는 신호로 여겨진다. 까마귀의 소리도 그렇거니와 이 나무까지. 오늘 이곳을 오르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괜한 걱정이 앞선다. 그래도 가던 길을 멈추기에는 내 두려움보다 호기심과 낯 모를 오름 하나를 더 다녀왔다는 성취감이 크다.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지역. 어디가 정상인지 저녁 가늠이 되지 않는다.

정상인 듯 싶은데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주변과의 차이가 거의 없을뿐더러 정상에 있기 마련인 약간의 공간도 없다. 여기가 아닌가 하고 계속 걷다 보니 탐방로가 정상 뒤편으로 이어진다. 아직 정상에 못 왔는가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 발걸음이 계속 하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상당히 많은 부분 하산 중이다. 오름 반대편으로 하산하면 다시 돌아오기에 곤란한 상황이 될 것이 뻔하다. 더구나 아직 가지 못한 가문이오름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산에 와서 까마귀한테 겁먹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진짜 배포가 줄어들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가던 중 경계심 많은 까마귀가 자기 구역에 도달하자 다시 울어대기 시작한다. 저러다 나를 공격하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히치콕 감독의 까마귀라는 공포영화의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저런 까마귀들이 서너 마리 넘게 한꺼번에 공격하면 이것이 곧 공포영화 아니 겠는가. 산에 와서 까마귀한테 겁먹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진짜 배포가 줄어들었다.


출발했던 장소로 되돌아오니 마음이 약간 편해진다. 이제는 먼저 지나친 가문이오름이다. 이 오름은 구두리 오름보다 조금 더 낮을 듯하고 거리도 가까워 보이니 비교적 쉽지 않을까. 


오름에 대한 표지판을 자세히 읽어본다.

가문이오름
표고 496.2m 비고 106m
가문이오름은 분화구 내 울창한 살림 지대가 검고 음산한 기운을 띠는데서 유래되었으며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정상에는 깊이 팬 화구 안에 솟은 작은 봉우리와 용암이 흘러나가며 만든 말굽형 분화구의 형태를 보인다. 오름 중턱까지 삼나무와 해송이 숲을 이루고 있고 그 위로는 빽빽한 낙엽수림이 자리 잡고 있으며 봄 산행 시에는 흰노루귀, 분홍노루귀, 남산제비꽃 등 다양한 야생화를 볼 수 있다. 붉은오름과 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구두리오름, 쳇망오름과 이웃하면서 자연스럽게 오름군을 형성하고 있어 가시리 오름 트래킹이 가능한 곳이다.

안내판을 읽어본 순간, 내가 생각한 것만큼 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감돈다. 그래도 입구는 평범해 보일뿐더러 높이도 구두리보다 조금 낮으니 정상까지만 재빠르게 오르고 난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로 하고는 발길을 재촉한다. 해는 아직도 중천이라 시간은 여유로울 뿐이다.

오르는 길 내내 숲이 점점 깊어짐을 느낀다. 오른쪽 바깥으로는 붉은오름이고 그 사이의 도로로는 차들이 거세게 달릴 텐데 소리만 쌩하게 들릴뿐 여기가 어디쯤인가를 가늠할 그 어떤 이정표나 특징을 찾을 수가 없다. 탐방로는 오르는 내내 점점 거칠어지고 멀쩡히 걸을 수 없는 순간들이 계속된다. 곧이어 길을 그대로 오르기 쉽지 않은 탓에 흰색 동아줄이 묶여 있다. 사람들이 길 잃기 쉽다는 것을 알고는 표지 겸 도움을 주기 위해 설치해 놓은 듯하다. 


표지판에 읽은 내용 그대로다. 길이 점점 깊어지고숲의 우거짐이 더욱 심해지면서 산에 번져있는 음산함은 구두리오름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깊다.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아까의 까마귀에게 느꼈던 공포는 껌 수준이다. 짚은 어둠과 미지의 숲 속과 산이 주는 검은 기운에서 뿜어내는 공포가 온몸을 감싼다. 길을 찾기도 쉽지 않을 만큼 나뭇가지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아래쪽을 잘 살펴봐야 길인 줄 알게 된다.



길은 결코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일체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다. 지칠만한 순간 갑자기 시야가 트인다. 산담이다. 이 높고 경사진 곳에 묘를 쓰다니 대단한 자손이다.


그것도 잠시뿐 길은 구불구불 삼나무와 낙엽수가 뒤엉켜있는 곳을 지나게 된다. 사실상 정상 부근일 듯싶은데 이 오름 역시 어디가 정상인지 알 도리가 없다. 사진을 찍고 싶은데 핸드폰의 배터리도 10%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몇 장 찍지 못할 것이다. 아껴서 찍기로 한다.

발걸음은 삼나무 숲을 지나면서 아래쪽이 분화구에 해당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역시 어둡고 컴컴하다. 어두울 무렵에 이 오름에 오르면 등골이 오싹해서 제대로 걸음을 옮기지 못할 것이다.


삼나무 숲을 피하느라 발걸음은 상황 파악도 못한 채 길인 듯싶은 곳만을 찾아 나선다. 분명 이 삼나무 숲만 지나면 정상일 것이다.


웬걸 아까와 같은 상황이다. 길이 조금 씩 내리막으로 인도한다. 숲의 야생성과 원시성을 보여주려는 듯 살아있는 나무에 낀 이끼가 진초록의 짙음을 선보인다. 그 사이에 다양한 풀들이 뒤엉켜 자라고 있으니 멋있다는 말과 함께 고립되었다는 두려움을 동시에 제공한다. 


이제는 정상이 지났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뒤돌아서 원래대로 가면 된다. 마음은 그러한데 몸은 계속 앞으로 간다. 아까 지나왔던 숲을 다시 되짚어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지나온 숲이 꽤나 두렵고 무서웠다는 감각을 몸에 전달한 모양이다. 내 이성과 달리 발걸음은 올라온 방향과 90도 이상 아주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핸드폰을 열고 지도를 잠시 본다. 이대로 하산하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길이 꽤나 멀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늦었다. 하산길을 택하기로 했다. 삼나무 숲과 낙엽수들이 뒤엉킨 비탈길이 내 앞을 계속 가로막으면서 탐방로가 그 사이를 인도한다. 


얼만큼을 내려왔는지 나비가 허물을 벗듯 숲 사이를 쑥 하고 빠져나오니 넓은 목초지를 옆에 둔 호젓한 길에 휑덩그레하게 던져졌다. 방향을 가늠하며 원래 시작됐을 탐방 지점을 향해 걷는다. 보아하니 표지판대로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쳇망오름이 나올터인데 그럴만한 힘이 남아있지 않다. 물도 다 떨어졌고 기록을 남길만한 핸드폰 배터리도 없어 죽은 지 꽤나 됐다.


원래대로 돌아오고 자동차를 세워놓은 곳으로 왔다. 차들은 여전히 쌩쌩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늘의 태양은 초여름의 날씨인 듯 온몸에 땀을 쏟아내게 할 만큼 더위를 뿜어댄다. 마치 한여름의 공포체험이라도 한 듯, 아무 일 없는 숲 속에서 알지 못한 누군가가 씩 웃는 듯 숲은 아무런 대응도 없이 그대로다. 내 마음만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 아들을 만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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