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채광섬 이에시마(家島)_섬나라의 또 다른 섬을 가다
일본 출장의 첫날을 보내고 나니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아침 일찍부터 히로시마를 거쳐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도착한 히메지(姬路)는 언제 어떤 기억을 내게 남겨줄지 기대가 크다.
택시를 불렀는데 5명이 탈 수 있는 택시가 왔다. 놀라운 일이다. 운전사를 제외하고 5명이 공식적으로 탈 수 있는 택시라니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택시 2대로 목적지에 가는 것이 비하면 훨씬 싸기 때문이다.
오늘은 일본에 와서도 또다시 섬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섬 속의 섬. 마치 우도를 가는 기분으로 히메지 항구를 찾았다. 한적하고 소담스러운 항구와 대합실은 낡고 오래된 항구라는 느낌을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역시 일본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다. 오래된 대합실에서조차 항구의 낡고 쇠락한 냄새를 맡기가 쉽지 않다. 언제나처럼 일본은 예외 없이 깔끔하다. 기껏해야 대여섯 곳의 부속도서로의 출항지지만 항구는 너무하다 싶게 정리가 잘 되어있다.
9시 넘어 도착해보니 목적지인 이에시마(家島) 가는 뱃시간이 20여분 남았다. 항구의 느낌을 파악하고자 주변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항구를 나가보니 안쪽으로 구력이 느껴지는 커다란 건물이 서있다. 시멘트 회사의 건물인가 혹은 곡물회사의 창고와 같은 느낌이지만 그 위용을 보니 불현듯 일본의 산업화를 연상시킨다. 곳곳의 저런 공장들은 일본 항구 지역 어느 곳을 가나 쉽게 볼 수 있다. 산업화된 일본의 면면을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이다.
기껏해야 대여섯 곳의 부속도서로의 출항지지만 항구는 너무하다 싶게 정리가 잘 되어있다
그러나 이 공장을 보는 순간 무엇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노노케 히메'라는 애니메이션이 저절로 생각이 났다. 그 애니에서 에보시라는 여성인물이 기를 쓰고 지키는 철강공장의 모습이 꼭 이곳 항구의 공장과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철강산업 초기의 모습이 저러했으리라. 그러나 저 공장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도 돌아가고 있는 산업의 한 축일 테니 경외감과 경계심이 동시에 들었다. 저 같은 공장 건물은 우리나라의 항구도시에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자란 고장인 인천의 항구에서도 어릴 적부터 많이 봤던 모습이기도 하다.
배를 탔다. 배 승무원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일행은 참으로 낯선 일행일 게다. 일본에서도 관광객이 올 시기는 아직 아닌데 낯선 이방인인 것이 분명한 일단의 무리들 댓 명이 배를 타고 있으니 신기한 듯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저 공장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도 돌아가고 있는 산업의 한 축일 테니 경외감과 경계심이 동시에 들었다
곧이어 일본의 초등생 네 명이 인솔교사 2명과 함께 배에 탄다. 책과 노트를 펴고는 한참을 이야기한다. 책을 보니 이곳의 생태환경에 대한 책인 듯싶다. 다양한 물고기의 모습과 식물의 모습이 함께 보인다. 전 세계 만국 공통 복장인 보이스카웃 복장을 한 남학생 2명과 걸스카웃 복장 여학생 1명이 눈에 띈다. 인솔교사 역시 스카우트 복장을 입고 있다. 일본은 유니폼에 강한 국가임이 분명하다. 유니폼을 입으면 개개인의 특성을 드러낼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다.
항구를 떠난 배는 망망대해를 가르며 앞뒤 구분 없는 바다를 향한다. 한참을 지나서야 항구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지고 해안선의 구분도 아스라하게 사라져 간다. 이제는 배가 어디로 가든 남쪽 태평양 한 복판이리라. 한반도 남쪽이야 남지나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본은 어찌 됐든 태평양과 맞닿아 있는 곳이니 바다도 직접 태평양일 게다.
한참을 항해하는 배 너머로 섬이 눈앞에 들어온다.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섬의 모습이 특이하다. 푸르른 나무로 덮여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벌거숭이 섬이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파헤쳤는지 반쪽이 날아가버린 모습을 하고 있다. 나머지 섬이 일부분 남아 황토색 섬의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무슨 사막의 커다란 산을 연상시키는 모습이 바다 한복판에 드러나는 것은 여간 생경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 남쪽이야 남지나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본은 어찌 됐든 태평양과 맞닿아 있는 곳이니 바다도 직접 태평양일 게다
설마 오늘의 목적지가 저곳은 아니겠지. 배는 황량해 보이는 섬을 향해 속도를 높이지만 그 섬을 직접 향하지는 않는다. 그 섬 너머에 또 다른 섬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섬 역시 목적지인 이에시마의 부속섬이다. 섬에 다가설수록 황량한 모습과 다른 다양한 집들과 배의 모습이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항구로 들어서자 황량한 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아늑한 항구의 잔잔한 물길이 연락선을 맞이한다. 그런데 놀랍다. 잔잔하고 크지 않은 항구에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화물선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조그만 섬에도 이렇게 큰 배들이 필요한 무엇인가 있는가? 놀라움을 한편으로 접어둔 채 섬의 풍경 이곳저곳을 살피느라 고개를 돌리기 여념이 없다.
조선소에서나 사용되는 크레인이 보이고 경제가 활성화된 항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물선이 곳곳에 진용을 갖추고 있다. 통상적으로 조그만 어선들이 진을 치는 한국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또한 항구에 맞닿아 적지 않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섬의 생김새가 완만하기보다는 아주 가파른 곳이니 항구 주변에 집들이 모여 있는 것은 당연한 모습일 테지만 건물 뒤편에 거의 여유가 없어 보이는 곳이라 그런지 굉장히 각박하고 공격적인 느낌까지 나는 곳이다.
항구의 모습과 달리 우리 일행을 마중 나온 사람은 아주 순해 보이는 30대 남자였다. 환영의 조그만 깃발을 손에 들고 누군가 낯선이 가 자신을 먼저 알아차려 주기를 기다리는 그 남자의 표정은 밝다 못해 순진하기 이를 때 없다. 전형적인 착한 일본 남자의 냄새가 난다. 이름은 나카니시 카주야. 오사카 출신으로 섬에 들어와 정착해서 살고 있는 32세의 마을해설사다. 그는 우리 일행을 이끌고 대합실에 앉아 섬에 대한 역사와 현황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섬의 생김새가 완만하기보다는 아주 가파른 곳이니 항구 주변에 집들이 모여 있는 것은 당연한 모습일 테지만 건물 뒤편에 거의 여유가 없어 보이는 곳이라 그런지 굉장히 각박하고 공격적인 느낌까지 나는 곳이다
그제야 섬의 비밀이 풀렸다. 그가 알려준 섬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경제성장의 시대. 일본 전역의 인프라를 깔기 위해 토목사업이 한창이던 시절. 도로나 항만 공항 등의 기반시설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기반의 맨 밑바닥에 가장 단단한 돌을 깔아한다. 이에시마의 돌은 아주 단단해 토목공사를 하는 맨 밑바닥에 사용하기 적합하단다. 이로 인해 섬이 통째로 채굴되기 시작했고 이 돌과 흙을 나르기 위한 화물선들이 작은 이에시마를 찾아들었다. 섬은 유래 없는 활황을 겪었고 섬의 크기에 안 맞는 커다란 배와 이를 고치기 위한 조선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5개로 구성된 이에시 마의 섬이 채굴의 대상이 되면서 본 섬마저 채굴을 당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인구는 최대 7000명까지 늘면서 섬은 그야말로 활황의 시대를 겪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일본의 불경기가 지속되면서 그리고 일본 내의 인프라 시설의 확장이 한계에 다 달으면서 이에시마의 운명도 조금씩 바뀌었다. 경기가 수축되고 섬에 돌던 자금도 말라가고 화물선과 인부들도 하나씩 떠나기 시작했다. 채광 산업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현재는 3000명까지 인구가 줄었다.
이쯤에서 마을 주민들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됐다. 언젠가는 채광 산업은 끝나고 섬이 이대로 있다가는 고사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주민들이 나서 마을을 살려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다행인 것은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주민들이 스스로 나서 발전의 방향을 성장이 아니라 마을의 특색을 살리고 지속가능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후 마을발전을 위해 섬의 특색을 그대로 살리는 작업에 몰두하고 특화된 상품을 만들어 새로운 마을 만들기의 모범을 만든 섬이 되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주민들이 스스로 나서 발전의 방향을 성장이 아니라 마을의 특색을 살리고 지속가능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섬 투어를 나섰다. 섬의 가파르기가 너무 심해 이런 곳에 어떻게 생활의 터전을 잡을까 싶을 텐데 산업이 있는 곳에 마을이 있듯 모든 집들은 비탈진 곳에 아주 특이하리만큼 위로위로 솟아오르며 자리를 잡았다. 길을 내기도 매우 어려운 섬인지라 모든 교통수단은 오토바이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도중에 보여준 화물선의 프로펠러는 조선소가 있는 커다란 섬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이곳에서는 곳곳에 널려있었다. 이질적인 느낌의 섬이다.
항구를 한구비 돌아 나서자 극적인 모습이 나온다. 비탈진 섬 위를 개발하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사방공사를 한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치 와플을 확대한 듯한 모습에서 이질감과 함께 경이로움이 돋보인다. 일본의 환경에 대한 처절한 대응능력은 대단하다는 느낌이다.
그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걷는다. 보통의 집들은 아주 좁은 계단으로 오르게 되어 있는 데다 보통 3~4층의 집들이 비탈진 경사면에 기대어 서있다. 다리가 아픈 사람들은 지내기 만만치 않으리라.
마치 와플을 확대한 듯한 모습에서 이질감과 함께 경이로움이 돋보인다. 일본의 환경에 대한 처절한 대응능력은 대단하다는 느낌이다
낙석과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사방공사는 곳곳에서 계속됐으며 그 옆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한 일본식 주택이 줄을 지어 이어지고 있었다.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이국적인 느낌을 풍기기에 충분한 모습니다. 더구나 여기가 일본 내 남쪽의 섬, 시코쿠와 혼슈의 중간이 세토내해에 자리 잡은 섬이라는 사실이 더 의아한 모습이었다.
중간에 자그마한 신사와 공원도 보이고 일본 특유의 정원스러운 가로수(?)도 함께 만난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생활 속의 문화는 그대로 드러나는 법. 여기가 일본인 것은 어느 모로 보나 확실하다. 거리는 곳곳에서 가로수 형태의 공원과 나무를 심어놓음으로써 시멘트로 황량해지기 쉬운 거리를 덮으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좁은 골목을 벗어나자 이윽고 약간의 마당스러운 광장에 섰다. 아마도 섬의 중심부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가 나름 위용을 자랑하는 커다란 신사가 눈에 띄고 또 다른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는 입구에 섰다. 이제부터는 산업화된 섬으로서의 이에시마가 아니라 새로운 마을만들기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이에시마로 들어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