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베 뒷골목과의 짧은 조우
많은 여행을 하면서 방문하는 도시의 인상을 결정짓는 계기는 무엇일까. 그 도시에 살지 않는 한 혹은 산다고 해도 도시를 대표할 수는 없는 법.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자그마한 계기로 얻게 되는 인상이나 영감은 그 도시를 몇 번 방문하든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하물며 인생을 살면서 한두 번 밖에 방문할 기회가 없을 도시의 일이라면 더욱더 잠깐의 인상이 갖게 될 파급력이 커지게 된다.
여름철의 초입을 알리는 순간들이었지만 비는 추적임을 너머 그냥 맞고 돌아다니기에는 힘든 양을 퍼붓고 있었다
고베라는 도시는 내게 있어서 그런 예를 충분히 보여준 곳이다. 5일간에 걸친 출장의 마지막 순간 오사카 공항행 공항버스를 고베 역 앞에서 타게 됐다. 여름철의 초입을 알리는 순간들이었지만 비는 추적임을 너머 그냥 맞고 돌아다니기에는 힘든 양을 퍼붓고 있었다. 다행히 고베시청부터 고베 역까지 지하도를 거쳐 돌아오게 됐고 지하도는 점심식사부터 쇼핑까지 다양한 행동이 가능한 장소를 열어주었다. 그렇다고 마냥 지하에만 머물 수는 없는 법. 안내도를 따라 공항행 리무진 버스 탑승처를 찾았다. 버스는 두 종류다. 고베공항을 가던가 오사카 공항을 가던가.
50분가량의 버스시간이 남아있다. 일본의 역과 연결된 쇼핑몰은 어느 곳을 가나 비슷한 분위기라 별로 흥미롭지 않다. 또 그곳까지 다녀오기에는 거리도 조금 떨어져 있으니 이 근처 어딘가를 서성여야 하지 않을까.
함께 간 일행이 알려준다. 고베에서 이곳은 가장 오래된 쇼핑상가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현재는 리모델링을 앞둔 오래된 일본의 상가를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이다. 뒷골목의 음습한 어떤 장소를 찾아보기 위해서인 듯 상가의 뒷부분을 향했다. 주변의 드높은 쇼핑타운이 즐비한 가운데 위치한 상가의 초라함은 묘한 기대와 약간의 우울함을 기대하게 한다.
어린 시절 인천에서 자라면서 중앙시장이라고 불리던 시장의 모습과 오버랩이 된다. 당시 그곳은 내가 살던 집에서 동인천역을 가는 지름길로 지하도가 있는 상가였다. 또한 그곳은 외국산 물건을 살 수 있는 곳 소위 양키시장이었다. 그 주변의 상가들이 지속적으로 연결됐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날의 고베와 4~50년 전의 한국의 위성도시 상가와 비교할 만한 수준이 아님에도 내 기억 속에는 왜 그 당시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이상하기만 한 노릇이다.
주변의 드높은 쇼핑타운이 즐비한 가운데 위치한 상가의 초라함은 묘한 기대와 약간의 우울함을 기대하게 한다
고베 역 주변의 상가는 나름 낡아서 곧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구석을 찾으려 했지만 실제로 그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역시 이곳은 일본이다. 쇠락해도 자존심이 있는지 깔끔하고는 원수 짐 없이 늘 친근한 모습과 깨끗함을 보유하는 상가다.
몇몇 관심 있는 물건들의 가격을 살펴보면서 도저히 살 수 없는 가격대라는 것도 놀라워 씁쓸하게 눈길을 거둬야 했지만 그래도 시장 뒤편을 걷는다는 것은 나름 쏠쏠한 재미를 주고 있었다.
가게의 구성은 대부분 젊은이들의 의류와 다양한 액세서리와 소품 가게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전 세계의 어느 상가에 가도 거의 다르지 않은 구성이기에 아이쇼핑을 하기에는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모습이다. 아하... 일본의 젊은이들은 저런 티셔츠와 바지 등을 입는구나를 알게 되고 나름 간지를 중요시하는 젊은이들이 찾을 것 같은 다양한 소품을 기억에 담으며 걷게 된다.
상가에는 손님들이 띄엄띄엄 지나갈 뿐 장사가 제대로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다. 이곳의 매장주들은 얼마나 어려운 상황일까. 순간 걱정이 먼저 앞선다. 어느 곳이나 자영업을 하는 작은 매장의 주인들은 개인 인건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매달려야 하는 것이 숙명이 아니던가.
몇몇 관심 있는 물건들의 가격을 살펴보면서 도저히 살 수 없는 가격대라는 것도 놀라워 씁쓸하게 눈길을 거둬야 했지만 그래도 시장 뒤편을 걷는다는 것은 나름 쏠쏠한 재미를 주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2시가 가까워져 오는 시간 매장들 사이에는 철시를 하고 셔터를 내린 매장들이 꽤나 많이 눈에 보인다. 이런 거리가 몇 곳이나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은 조만간 재개발이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모습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여전히 빈틈 하나 없이 깔끔하다. 젠장...
셔터가 내려지거나 전시용 제품인 듯 손님이 거의 없는 매장들 사이로 음악이 흘러나온다. 미국의 뉴올리언스나 혹은 다른 지역의 어느 곳에서나 나올 듯한 재즈 음악이 귀를 붙잡는다. 발걸음을 순간 멈춘다. 내가 좋아하는 올드한 재즈음악이다. 이곳에서 이런 음악을 들을 줄 이야. 전혀 상상도 못 하던 분위기다. 가게를 살펴보니 손님들이 대낮부터 매주를 마시고 있다. 공사판의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이 아니다. 자그마한 빠에 맥주잔을 들고는 아주 세련된 재주의 올드하면서도 약간의 반복적인 경쾌함을 지닌 재즈음악에 중년이 조금 더 넘었을 남자들과 여자들이 서로의 테이블에서 시간을 음미하고 있다. 멋진 모습이다.
순간 당황스럽다. 이 분위기는 뭐지... 나름 상가의 쓸쓸함에서 블루 한 분위기를 한껏 잡고 있는데 이곳의 고객들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나름 흥겹고 세련된 분위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갑자기 모든 인상이 바뀐다. 고베라는 도시가 다시 보이고 놀라움으로 한참을 가게 앞에 서있다. 홀 안의 손님한두명이 나를 힐긋힐긋 쳐다본다. 저 놈은 뭔데 나를 쳐다보나 하는 분위기다. 눈길을 마주치기 싫어 살며시 시선을 피하지만 귀는 그 가게에서 나오는 음악에 취해 발길을 움직이지 않는다.
갑자기 모든 인상이 바뀐다. 고베라는 도시가 다시 보이고 놀라움으로 한참을 가게 앞에 서있다
아뿔싸 버스시간이 10분도 채 안 남았다. 부리나케 대기하는 곳으로 가보니 고베공항 해 버스에 많은 손님들이 오르고 있다. 다행히 오사카행 버스에도 사람들이 거의 타고 있지만 약간의 여유가 느껴진다. 다른 일행들이 곧 도착하고 나도 버스에 오른다. 일본에서 오랜 생활 유학한 동행에게 물었다. 고베라는 도시는 어떤 평가를 받는 도시인가? 그는 자신도 고베를 잘은 모르지만 고베 사람들이 일본 내에서 가장 멋쟁이가 많고 재즈음악의 본산임을 자부하는 도시라는 설명을 해 준다. 고베가 독특하게 멋을 중시하는 도시라는 설명이다. 그 사실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설명에 내가 본모습을 연결시켜보니 고베라는 도시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버스는 공항을 향해 달리는데 내 마음은 고베의 낡은 상가의 매장과 그 안에서 나오는 세련된 재즈에 계속 매달려 있는다
시간이 되면 고베에 다시 와보고 싶어 졌다. 고베인들의 멋이 어떤지 궁금해졌다. 버스는 공항을 향해 달리는데 내 마음은 고베의 낡은 상가의 매장과 그 안에서 나오는 세련된 재즈에 계속 매달려 있는다. 공항행 버스가 야속하게 느껴지는 마음을 갖데 될 줄은 몰랐다. 고베라는 도시가 지진 이외의 기억으로 나에게 남었던 순간이다. 도시는 한순간의 인상으로 남는데 내게 고베는 오랫동안 세련되게 남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