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10
지난 글입니다. 보관용이니 양해바랍니다.
도시재생을 재개발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랫동안 자리 잡았던 개발과 성장 패러다임에 익숙한 상황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같은 등식 대신에 기존의 자원을 활용해 좀 더 가치있는 것으로 바꿔나가는 업사이클링과 흡사하다는 생각에 동의를 표한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세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아간다.
마찬가지로 촛불집회 내내 어린 학생들은 누가 설명한 적도 없지만 스스로 진실의 무게를 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교육적 관점에서 본다면 촛불집회는 우리 교육의 다른 가능성이다. 톡톡 튀며 기성세대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청소년들의 자유발언을 보며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기성세대, 아니 기득권층의 눈으로 보면 청소년들의 경거망동으로 보일테지만 말이다. 기성세대들이 장황한 이야기로 세상을 이야기하는 동안, 자신의 이야기나 글의 파장을 셈하고 있을 때 청소년들은 솔직함을 무기로 진실의 바다에 현실을 띄워놓고는 무게를 가늠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고대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조차 ‘요즘 젊은이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 는 글귀가 씌여 있단다. 수 천년 전에도 기존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으로는 젊은이들의 생각을 따라 잡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들은 아직 소수일터다. 대부분 기성세대와 다름 없어진 학교 안에서 좋은 대학을 이야기하며 무작정 줄서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많은 사회 분야에서 청소년기의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나 프로그램들은 거의 전무한 상태다. 도시재생 관련 프로그램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에게는 무방비 상태에서 대학 입학 이외의 가능성은 모두 닫혀져 있는 것이다.
교육의 잣대가 대학진학이라는 한 가지만 존재하는 한 이 기준은 국정교과서의 논리와 동일하다. 한 가지만을 위한 줄세우기다.
교육의 잣대와 방법론을 다양하게 가져가야 하는데 움직임이 미미하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더욱 그런 느낌이다.
옆 친구가 함께 하는 동료가 아니라 밟고 올라서야 할 경쟁자인 시스템. 편법이 좋은 결과를 만드는 일이 용인되고 탈락한 젊은이들은 ‘루저’가 되는 시스템에 내몰린다.
이 상황을 보며 ‘꿈꾸지 않으면’이라는 한 대안학교의 교가가 생각난다. 그 중 한 소절이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린 알고 있네 우린 알고 있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 탄핵으로 정치체제의 변화를 꿈꾸듯 교육시스템의 가능성도 변화를 꾀해야 한다. 국정교과서처럼 단일화된 체제에 순응하는 황당한 퇴행적 기준이 아니라 가지 않은 길의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줄 문을 곳곳에 만들어야 한다. 교육시스템이 단일기준으로 작동하는 한 수많은 젊은이들은 박근혜 정권의 편법과 부조리를 다시 양산할 보균자가 될 뿐이다. 또 일부는 자유발언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배운다는 것의 실체를 바꿔야 한다. 대입시스템 변화가 당장은 어렵다면 학교 밖의 다양한 교육체계를 열어야 한다. 사회 각 분야에서 다양한 교육과정과 세상을 알고 대처해 나가는 방법을 교육해야 한다. 그것은 직업학교일 수도, 인문학일 수도, 적정기술일 수도, 코딩교육일 수도 있다. 학교의 시스템과 달리 또 다른 가능성을 여는 노력을 시민사회와 교육행정의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시도해야 한다. 공유와 나눔, 지속가능한 성장과 공동체를 이야기하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촛불은 그 가능성을 열어줬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촛불을 통해 교육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