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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Apr 22. 2018

마흐니숲길

인생은 사는 동안 잘 살아야 하는 법

지난해 겨울 열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궁금해서 가보고자 했는데 기회를 얻지 못했다. 누군가 봄을 맞아 숲길을 걸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품고는 주말이 되기에 앞서 선뜻 길을 나서기로 결심한 날 아침. 아침 일찍 청수리의 지인에게 들러오느라 진이 다 빠진 상태로 숲길을 향한다.


출발점은 뜻밖에도 물영아리 오름의 출발점과 같은 장소다. 남조로를 두고 건너편 숲을 향해 들어가는 입구가 다를 뿐이다. 이쪽은 오히려 머체왓숲길과 끝자락 어디쯤엔가 만나야 정상인 듯싶을 구조다. 숲길은 잘 알려지지 않은 숲 속의 길을 자연스럽게 찾아가는 모양새다.

이름을 익숙하게 생각해보려 해도 영 익숙지가 않다. 마흐니오름이라니... 사실 들어보기 힘든 이름이 아니던가. 무슨 인디언 부족의 이름도 아니고.. 초입은 넓은 목초지를 따라 한참을 포장된 임도로 들어간 후 본격적으로 초지에 다 달으면 옆으로 걸어 들어 숲을 향하는 길이다. 총 5km가 조금 넘으니 천천히 걸으면 4시간이면 다녀오리라 생각된다. 빨리 걸으면 좋겠지만 그동안 숲길 트레킹을 등한시한 탓에 몸 상태가 별로다. 

숲길은 잘 알려지지 않은 숲 속의 길을 자연스럽게 찾아가는 모양새다

마흐니 숲길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특별히 독특한 숲길의 구조를 만난다거나 멋들어진 경치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는 숲길이다. 봄이 되면서 아직 새싹이 풍성한 신록을 만들어내지 않은 탓인지 약간은 빈약한 숲길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이 숲을 계속 찾게 되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가 인공적인 길의 느낌이 비교적 적으며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오히려 특징을 느끼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인가 여타의 다른 숲길과 다른 무언가 숲으로의 특징을 찾는다는 것이 어쩌면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방길을 찾아 나서는 가장 큰 이유는 독특하지 않고 자연스러움 속에서 나를 되새기거나 시간의 무아경을 통해 정화의 방법을 찾는 일일터 그 점에서 본다면 마흐니숲길은 매우 매력적이니 할 수 없다.

초입에서 만난 숲은 무엇보다도 봄철 산과 들에서 만나면 반가운 노란색 꽃을 보여 환영을 해준다. 이름하여 복수초. 한두 개의 꽃들을 볼 수 있는 기회야 있지만 마흐니숲길 내에는 곳곳에 복수초의 군락과도 같은 멋진 장소를 보여주는 곳이 여러 개다. 거기에 남쪽 숲임을 느끼게 해주는 동백꽃이 함께 어우러지며 한라산 남쪽 숲길의 자태를 뽐낸다. 머체왓숲길이 마지막에 서중천을 끼고 오르고 내리는 길이 커다란 역할을 한다면 이곳은 오름이 정점을 찍는다.


남쪽 숲임을 느끼게 해주는 동백꽃이 함께 어우러지며 한라산 남쪽 숲길의 자태를 뽐낸다

그전에 기억해야 할 몇 가지 관전 포인트가 있다. 걸으며 느끼게 되는 이 숲만의 주요한 특징을 꼽자면 우선 삼나무 숲이다. 삼나무 숲이야 제주의 어느 곳에 가도 이제는 쉽게 만날 수 있는 조림지들이기에 새삼스러울 일이 없지만 숲을 걷다가 불현듯 만나게 되는 숲은 이제 빠져서는 안 될 감초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계곡이나 산길이 깊어 혹시라도 여기서 길을 잃으면 미아가 되겠다거나 조난의 위험을 현저하게 느끼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그래도 이곳에서 방향을 잃으면 어찌할 방법이 없을 텐데 숲이 그에 비해 굉장히 포근하게 맞아주는 탐방길을 보여준다. 


곳곳에 쇠락한 흔적을 보여주는 돌담이 이곳이 제주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이곳이 육지의 남쪽 숲 속이나 등산을 위한 여정의 한 시간쯤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혹은 내가 그만큼 제주 숲의 모습에 익숙해져 버린 탓이기도 하리라.

분명한 것은 여름이 다가올수록 숲이 더 빽빽해질 테고 그때가 되면 지금에 내가 느끼는 여유보다는 숲은 좀 더 강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점이다.


숲 사이의 빽빽함이 조금 적으니 기존의 다른 곶자왈에서 볼 수 있는 진초록의 원초성을 느끼는 탐방길과는 꽤나 다르게 공간의 여유로움과 색의 긴장감이 비교적 덜하다.

곳곳에 쇠락한 흔적을 보여주는 돌담이 이곳이 제주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반환점에 가까울수록 편안한 숲의 느낌은 조금씩 사라지고 이곳 마흐니숲길만의 특징을 하나씩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 손님맞이는 용암대지다. 얼른 보아서는 바위들이 널려 있는 장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설명을 읽어보니 이해가 된다. 용암이 흘러 널찍한 대지를 형성한 지형이 보인다. 그 밑으로 구멍이 파여 있으니 필시 비가 오면 소가 형성될 지형을 가지고 있다. 그런 비 오는 날 이 숲을 들어올 일이 없겠지만 진정 그런 날 숲길을 걷는 기분을 느껴볼 필요가 있

을듯한 생각이 들었다. 용암대지를 지나면서 용암굴이 패인 곳에 나무가 어렵게 버티고 서있다. 아래쪽은 바라보기만 해도 시퍼렇게 음침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어 쳐다보기가 겁난다. 진초록의 이끼가 검은색 어두운 그림자와 함께 모습을 보이니 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후 정상을 향해 가는 길은 몇 가지 이상한 나무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마치 동맥경화가 걸린 듯한 나무, 혹이 붙어 있다고 해야 하나.


마흐니 오름의 정상 막판을 향해 가는 중에 가장 시선을 사로잡은 모습은 결국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놓은 묘지였다.


만호 벼슬을 지낸 이의 정부인의 묘지라고 설명이 쓰여있다. 그럼에도 이 묘는 결국 사람의 관심을 잃어버린 당대의 건축물이건 문명이 어찌 쇠락해져 가는지를 보여준다.  어떤 이유로든 묘는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묘지 한가운데 나무가 올라와 묘를 상당히 파괴했다. 최근에 나무를 베어내 그루터기만 남아있으니 묘의 입장에서는 한가운데 나무가 파고들었으니 얼마나 힘든 시절을 보냈던 것일까.

주면의 묘지를 둘러싼 산담 역시 시간을 못 이기고 여기저기 무너져 내린 모습을 보면서 이 먼 구석까지 올라와 묘를 쓴 다른 이유야 있었겠지만 뭣하러 이 깊은 곳에까지 올라와 묘를 썼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면 자손들이 이미 멀어졌거나...

마흐니 오름의 정상 막판을 향해 가는 중에 가장 시선을 사로잡은 모습은 결국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놓은 묘지였다

씁쓸한 마음을 뒤로한 채 목적지로 방향을 튼다. 갑자기 나무들의 모습이 기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들이 하나같이 살아있는 다른 생명체에 의해 둘러싸여 있거나 강하게 압박을 받고 있는 분위기다. 자세히 보니 나무를 둘러싼 넝쿨들에 잔가시가 마치 동물의 털처럼 나와있다.


넝쿨에 난 털이 나무를 감싸며 마치 이 나무가 애초에는 승천하기 위해 준비한 이무기나 구렁이었으나 결국 하늘로 오르지 못해 땅에 주저앉은 듯한 모습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역으로 나무를 이용해 넝쿨이 승천을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느 쪽이든 저 넝쿨은 해가 지면 스스로 나무와의 연대를 풀고 자리에 서서 대화를 나누거나 자신들의 운명을 서로 이야기하지 않을까 하는 황당한 생각을 해본다. 단순히 나무와 넝쿨이라고만 보기에는 모습의 기이함과 느낌이 전혀 색달라 이곳 나무들을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게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숲은 좀 더 깊은 곳에서 색다름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다. 오름을 오르기 전 마흐니궤가 한번 들러보라고 권한다. 바위 밑으로 패인 커다란 동굴이 있으니 이곳 역시 비가 오면 색다른 느낌을 줄 것이다. 바위굴을 보면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설명을 읽으니 흐르던 물이 궤에 모여 낙수를 만들어 사냥하거나 벌채하는 사람들이 겨울철에 궤 안에서 며칠 동안 머물 수 있었다고 하니 사람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최종 목적지는 마흐니 오름이다. 숲 속에 솟아있는 오름인지라 그렇게 높지는 않다. 비고가 47m라면 한달음이면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4.3 이전에 이곳에서 밭농사를 하고 노루사냥을 하기도 했던 곳이라 한다. 중산간의 사람 흔적을 느낄 수 있을 곳이었을 것이다. 4.3이  사람들과 멀어지게 한 셈이다.


정상은 공교롭게도 조망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다. 가볍게 앉아 쉴만한 곳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주변을 살며시 둘러보고는 그냥 내려오는 오름이다. 정상에까지 나무가 자라고 있어 오래 머물기에는 쉽지 않은 오름이다. 오르고 내려오는 길이 경사가 비교적 심한 편이라 힘이 들지만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 곳이다. 다만 이곳까지 오기 위해 힘을 거의 다 소진한 상태에서 마지막 정상을 오르는 에너지를 빼내고 나니 지쳤다는 말과 힘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중산간의 사람 흔적을 느낄 수 있을 곳이었을 것이다. 4.3이  사람들과 멀어지게 한 셈이다

그 때문인가 돌아가는 길.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길이 너무나 힘들다. 출발점을 향해 가며 혼자서 계속 이야기한다. 이렇게 길고 오랫동안 숲 속으로 들어왔던가. 아... 올 때와 갈 때의 느낌이 너무 다르다. 갈 때가 되니 숲이 너무나 깊다. 체력 보충이 필요하다. 배도 고프고... 시간은 비슷하게 걸렸다. 막판에는 빨리 밥을 먹으러 가야겠다는 집념이 출발지로 이끈다. 이 희망마저 없었다면 힘들었을 하산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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