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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May 28. 2018

여행과 묵상 사이에서 헤매다

이시돌목장과 정물오름

맥그린치 신부가 선종하신 지 며칠이 되지도 않은 날. 아무 생각도 없는 주말 아침은 쾌적하다 못해 볕까지 따사롭다. 5월로 들어선 날씨가 따뜻한 게 당연한 일인데도 올해는 그 당연함을 전혀 맛볼 수 없다. 오히려 추워서 벌벌 떨던 기억들이 한가득이다. 사무실에 앉아 조용히 있노라면 히터를 틀어야 할 만큼 날씨 적응이 안된다. 어쩌면 내 몸에 이상이 있어 더 추위를 느끼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상 기후의 연속이었던 것은 모든 면에서 사실이다.


아침 일찍 어디를 갈까 하다 서쪽 언저리의 오름을 찾았다. 이름이 정물오름. 이시돌 목장 언저리에 있다 하니 그곳에 들렀다가 이시돌목장을 둘러보는 일도 좋은 일이다. 다행히 이시돌 목장을 꼭 한번 가봐야 한다던 집사람의 요청도 있었던 터라 다른 고민을 할 새도 없이 자동차의 방향을 잡았다.

5월로 들어선 날씨가 따뜻한 게 당연한 일인데도 올해는 그 당연함을 전혀 맛볼 수 없다

제주의 동쪽 끝자락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은 사실 불편하다 못해 험난하다고 하면 엄살일 테지만 아무튼 편한 길은 아니다. 일부로라도 길을 중산간으로 잡고 송당과 교래, 5.16 도로 관음사길, 제1산록도로를 거쳐 평화로에 접어드는 데까지  1시간이 훌쩍 넘어버린다. 멀지만 한라산을 맞이하면서 달리는 도로는 한적한 데다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든다. 한라산이 훅 들어온다.


평화로에서 안쪽 길을 들어서서 한참을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네비게이션이 바로 정물오름 도착이라고 알려준다. "어... 벌써 도착이라니 이상한데"라는 말을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오름 주차장 이정표가 눈앞에 들어온다. 이 근처면 이시돌목장 길인데 전에 몇 번이고 지났던 도로변에 바로 떡 하니 방문객을 맞이한다.

다른 오름들과 달리 2차선 도로에서 들어오니 바로 넓은 주차장이 나오고 눈 앞에 높지 않은 아담한 말발굽 모양의 오름이 포근히 감싸 안듯 내 앞에 서있다.

정물오름
오름 북서쪽으로 넓게 벌어진 말굽형 화구를 가진 오름으로 오름 동남쪽에  당오름이 이웃해 있다. 오름의 형태는 남서쪽에서 다소 가파르게 솟아올라 꼭대기에서 북서쪽으로 완만하게 뻗어 내렸다. 오름 북서쪽으로 두 팔을 벌린 형태의 비탈 아래쪽 기슭이 '정물'이라 불리는 쌍둥이 샘이 있는데 이 샘 이름에서 오름 이름이 나왔다. 이 오름 서쪽에 조그만 '알오름'이 있는데, 이를 '정물알오름'이라 한다. 표고는 469m이다.
이 오름의 동녘 자락에 있는 들판은 정물오름을 모태로 하여 예로부터 으뜸가는 목장지대로 이용되고 있다. 이 오름에는 '개가 가리켜 준 옥녀 금차형의 명당터'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오름 안팎의 기슭에는 묘지가 많다.

차분히 정물오름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나니 오름 바로 앞에 물이 고여있는 것도 돌로 막아놓은 샘이 솟는 것도 이해가 된다. 말 그대로 아담한 오름이다. 동선이 눈에 다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정상으로 오르고 왼쪽으로 내려오면 될 일이다.

다른 오름들과 달리 2차선 도로에서 들어오니 바로 넓은 주차장이 나오고 눈 앞에 높지 않은 아담한 말발굽 모양의 오름이 포근히 감싸 안듯 내 앞에 서있다

가운데는 오름에 대한 설명대로 명당터라고 여겨서인지 모르지만 여러 기의 묘지가 가까이 붙어있다. 죽어서라도 자손들에게 좋은 결과를 이뤄내 주기를 바라는 후손들의 욕심이 아닐까. 아님 조상들의 유훈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너무 많이 붙어있으니 오름이 묘지터 같은 기분이 든다. 


푸르른 하늘이 그나마 오름행을 반겨주는 듯 푸르름을 덧붙인다. 그 사이에 비행기가 지난 흔적이 길게 늘어져 있다. 모습이 대포라도 쏘아낸 듯하다. 하늘을 가르는 흰색 흔적이 구름들과 잘 어울린다. 푸르름과 하얀색은 어느 모로 보나 좋은 날의 증거라 할 수 있다.

옆으로 오르는 오름길은 이어 곧바로 계단으로 향하며 위쪽으로 뻗어있다. 벌써 오르막이면 너무 단순한데 싶은 생각이 든다. 너무 금세 올랐다가 내려와 버리면 너무 아쉬운데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천천히 걷자. 사실은 그동안 운동을 너무나 등한시했기에 그 언덕길조차 아주 가벼운 발걸음이 되지 않은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오르는 계단을 지나자 곧바로 그늘이 사라진다. 볕이 온몸을 직접 내리쬐니 입었던 옷가지가 한결 거추장스럽다. 덥다. 그래도 바람이 분다. 뒤돌아 보고자 등을 돌린다. 너른 초원지대가 동쪽과 북쪽을 향해 널리 퍼져있다. 저 앞쪽에 많은 차들이 모여있고 말들이 띄어 논다. 차들이 왜 저리 몰려있지....

 볕이 온몸을 직접 내리쬐니 입었던 옷가지가 한결 거추장스럽다. 덥다. 그래도 바람이 분다

북쪽으로 향하는 오름이 다른 것보다 높아 보인다. 금악오름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앞에 붉은색 지붕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은 이시돌목장과 관련 있는 다양한 종교시설인 셈이다. 피정센터도 있을 것이고 수도원도 있을 것이고... 나야 천주교 시설들은 잘 모르지만 많은 시설들이 한 군데 모여있는 모습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까 보였던 초원과 자동차들의 모임, 그리고 차들이 계속해서 그곳으로 몰리는 이유를 알겠다. 저기가 이시돌 목장이구나... 관광객들이 잔뜩 달려가는 테쉬폰과 이시돌목장 우유로 만든 우유부단 카페 일터다. 


갑자기 허무해진다. 아직도 한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름 바로 앞이 이시돌 목장이라니.. 그렇다면 이시돌 목장을 갈 때마다 보아왔던 그 오름에 역으로 올라가 있었던 것이고 그 오름을 쳐다보면서 오름의 정체를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나의 무심함이 다시 한번 생각이 난다. 참 아무 생각 없이 살기는 하는 모양이다. 

오름을 쳐다보면서 오름의 정체를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나의 무심함이 다시 한번 생각이 난다. 참 아무 생각 없이 살기는 하는 모양이다


다행히 뒤돌아 보니 멀리 한라산이 아주 선명하지는 않아도 형체의 구분이 가능하도록 실루엣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는 꽤나 멀리 보이는 느낌이다. 그곳까지 거쳐야 할 다양한 오름들이 장막을 치고 있다. 저것들을 다 넘고 가면 정상에 갈 수 있겠지만 그 사이사이에 커다란 난관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갑자기 이곳에서 한라산 정상 사이에 놓여있을 꽤나 많은 오름들의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난다. 노꼬메, 바리메, 노로, 삼 형제, 붉은, 궷물, 어승생악 등등.... 내가 아는 몇 안되지만 그래도 가봤던 오름들의 기억들이 저 앞의 풍경 어딘가에 깊게 박혀 있을 것이다. 

남쪽을 보았을때 가까이  보이는 오름은 도너리오름이다.

정상에 오르니 목장의 모습이 더 잘 보인다. 바람의 세기도 아래쪽에서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도 따스한 날씨를 이기지는 못할 수준이다. 오늘은 볕이 승리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웬일인지 정상에 반듯히 놓여 있어야 할 나무 의자 하나가 발라당 엎어져 있다. 이전의 강한 바람에 넘어졌음이 분명하지만 괜히 개가 넘어져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는 포즈가 연상된다.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다.

내가 아는 몇 안되지만 그래도 가봤던 오름들의 기억들이 저 앞의 풍경 어딘가에 깊게 박혀 있을 것이다

한참을 앉아 있는다. 오르면서 발견한 고사리 몇 개를 꺾어 오른 집사람이 고사리를 펴 보이고는 사진을 찍어달란다.  아직까지 고사리가 곳곳에서 순을 재빠르게 올리며 시간이 빨리 가기를 기다리는 듯하다. 이전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을 고사리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방향이 자꾸 다른 길로 빠지게 된다. 걷다가 혹시나 하는 기대심리에 시선을 자꾸 땅과 풀숲으로 돌리고 아주 천천히 걷게 된다. 내 눈에도 고사리가 보인다니 신기한 일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하산길을 선택하는데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오며 오토바이의 배기 머플러 소리가 요란하기 그지없다.  길도 없는 낮은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적막강산에 불청객이 찾아온 셈이다. 오토바이 탑승자도 우리가 인상을 찌푸린다고 생각했는지 연신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던진다. 그대로 목례를 하고 내려가는데 실력이 달리는 때문인지 후발주자가 또다시 오토바이의 굉음을 내며 힘겹게 오름을 오르고 있다. 길도 아닌 풀들을 마구 쓰러뜨리며... 


저들은 너무나 재미있으니 그리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름에 오르는 의미를 한 순간에 잊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까지 저런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건은 내 생각일 뿐이다. 다른 사람도 이 상황을 직접 경험했으면 어느 정도 내 느낌을 이해할 수 있을 듯...

이시돌 목장에서 바라본 정물오름. 잠시전에 올랐다 내려온 오름이다.

이제는 유명 관광지가 되어버린 이시돌목장을 둘러본다. 우유부단 카페도 있고 테쉬폰인가 하는 목장 초기의 주거지도 있다. 목초지 앞에 조금 전까지 이곳을 내려다보던 정물 오름이 목장의 배경으로 떡하니 앉아있다. 내가 이곳을 바라보듯 반대로 오름 곳곳을 바라본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장소를 바라보고 있으니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꽤나 많은 관광객들이 목장우유로 만들어진 아이스크림을 맛보며 인증숏을 찍는데 전념한다. 나 역시 렌터카에 이곳을 찾았으니 역락없는 관광객 포스다. 그냥 관광객으로 다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시돌 목장을 돌아 나오며 예수님의 14처를 만들어 놓은 장소를 지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호수가 있다. 14처를 다 지나 약간의 언덕을 넘어 아래로 내려가 보면 잔잔한 인공호수의 물이 새로운 묵상의 세계로 사람을 이끈다. 묵상이란 무엇을 생각하든 자신을 내려놓는 일일 것이다.


무엇을 아는지 오리 2마리가 호수 안을 향해 미끄러지듯 멀어진다. 물속의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빠르게 호수를 움직이는 오리들이 마치 인형이나 로봇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혹시 인공지능이 아닐까.

14처를 다 지나 약간의 언덕을 넘어 아래로 내려가 보면 잔잔한 인공호수의 물이 새로운 묵상의 세계로 사람을 이끈다

오름을 올라 먼 경치를 즐기는 것 또한 좋지만 아무도 없이 천천히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는 장소를 걷는 일은 건강함을 예보한다. 내 안의 무엇인 요동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기에 그 요동의 근원을 알아보고자 한다. 호수가 잔잔한 것이 다행이다. 이 호수마저 풍랑처럼 일렁거렸으면 자칫 구토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호수는 마치 서녘을 향해 떠나는 반지의 제왕 마지막 요정들의 배를 연상시킨다. 그래서인가. 길게 서술하거나 자세히 써야 할 이유가 없다. 알려지는 것 대신 침잠을 더욱 중요시 여기는 장소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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