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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Jun 27. 2018

뭐라고 칭할 수 있었겠는가 ... 거슨새미 말고

거슨세미 오름을 오르며 느끼는 송당 오름군의 한 단면들

오랫동안 비자림로를 지나면서 겉에 드러나 있는 삼나무 숲 이면의 속살이 궁금한 적이 여러 번이다. 더 안쪽의 안돌과 밧돌은 오르락 내리락을 해보았지만 울창한 나무로 덛혀있어 정상에서의 전망도 안 좋을게 뻔한 오름을 앞다투어가며 오를 일이 잘 없다. 늘 후순위로 밀렸다.


일요일 오전이 지나고 작심하고 길을 나섰다. 이미 오르는 입구야 여러 차례 들러봤지만 바로 발걸음을 내딛는 일이 쉽지 않다. 세상일이 다 그렇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앞으로 나아가고 금세 이루어질 만한 일들도 그 첫발을 띠지 못해 머뭇거리며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울창한 나무로 덛혀있어 정상에서의 전망도 안 좋을게 뻔한 오름을 앞다투어가며 오를 일이 잘 없다

이정표 만으로는 친절한 갈래길의 표시가 있어 헷갈릴 일이 전혀 없다. 선택은 바로 그 순간 이후부터다. 비자림로에서 들어가는 임도는 입구는 작아 보여도 들어서는 순간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온 구력이 느껴지는 너른 길이다. 거슨새미 오름의 새로운 입구를 만들려는지 무언가 공사 팻말이 있지만 무시하기로 한다. 이미 잘 알려진 길들을 다녀오기로 했다.

입구의 선택에서부터 바로 좌우로 갈린다. 거슨세미 물 아마도 연못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거슨세미라는 말의 의미가 무언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방향은 오름 정상으로 틀었다. 거슨세미 물은 기회가 닿는 대로 내려와서 다시 보기로 한다.


정상으로 가는 길이 다시 두 갈래로 선택을 강요한다. 그래도 방향은 언덕 쪽으로 고고. 그래야 정상과 조금이라도 가깝지 않겠는가.

거슨새미 물 방향으로 난 길.
정상입구를 선택하자 바로 두갈래 길이 갈린다. 왼쪽이 정상과 가까운듯 주저함 없이 왼쪽길을 택했다.

길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다닌 덕인지 잘 정돈되어 있다. 다만 숲이 주는 으스스함과 인적이 드문 이유로 한가로움과 스산함이 함께 다가온다. 인적이 드물고 숲으로 우거져 있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머뭇거리게 한다. 목초지로 이루어진 오름이 아니라 조림된 나무로 가득한 오름이나 산은 섣불리 손쉽게 들락날락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오르는 길 내내 험하거나 어둡다는 느낌보다는 괜히 주변의 좋은 오름들이 너무 많다 보니 소외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걸으면 걸을수록 정겨운 마음이 더 깊기에 그 생각이 강하게 다가왔다. 

목초지로 이루어진 오름이 아니라 조림된 나무로 가득한 오름이나 산은 섣불리 손쉽게 들락날락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중턱에 오르고 나니 산세가 조금씩 드러난다. 바로 앞에는 이 오름의 정상이 보인다. 오름이 말발굽 모양으로 굽어져 있는 데다 한쪽 끝에서 오르기 시작한 오름 탐방길이라 반대편 오름의 정상이 나무로 가득한 채 잘 보인다. 내가 갈 곳은 저곳이로구나. 그 너머로 제주 오름의 전형성을 잘 보여준다고 침이 마르도록 읊어대던 오름이 보인다. 숲 대신 목초가 덮인 오름이다. 두 개가 보여야 하지만 일단 하나가 보인다. 안돌오름이다. 저쪽에서 이쪽을 바라본 기억이 벌써 2년은 된 듯하다. 그만큼 이 오름군을 오른 지가 오래되었다. 한참을 되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다. 

멀리 보리는 안돌오름 너머로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구부린듯한 새의 모양을 한 오름이 보인다. 그 모양새로 보니 체오름인 것을 금세 알겠다. 여전히 저곳을 가보지 못했다. 듣기로는 사유지인 저 오름의 주인이 오름 탐방객들의 무분별한 행동으로 수억 원에 해당되는 손해를 입었고 그 이유로 오름 탐방을 막고 있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아마도 상당 부분은 사실일 듯싶다. 알아보고 가보기로 한다.


거슨세미의 정상은 마치 덥수룩한 머리에 주변으로 듬성듬성 머리카락이 뽑힌 머리를 연상케 한다. 암튼 이곳에서 오르면서 보이는 풍경은 주변의 세 개 오름이 거의 대부분이다. 안돌과 밧돌, 체오름. 그 너머에 있는 거친오름. 조금 더 오르면 비자림로 건너편의 다른 오름들도 잘 보일 것이다. 


송당이나 구좌지역 오름에 올라 보면 오름군락이 끝없이 이어져 있어 대륙의 어느 곳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섞인 상상을 한다. 괜히 판타지 무협소설이라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 오르니 기상관측기지인지 모르겠으나 조그마한 대피소로도 사용할 수 있는 건축물이 나를 반긴다. 아, 무엇보다 이곳이 정상이겠구나.


정상에서 뒤를 돌아보니 생각했던 모양보다는 의외로 멀리 다른 건너편 오름들이 보인다. 저것은 개밥그릇처럼 생겼으니 개오름이 아닐까. 저것은 백약이거나 높은 오름일 게야. 등등 막연한 기대와 추측으로 내가 알고 있는 지역 지도를 상상하며 오름의 이름들을 꿰맞추어보고 있다.

베스트는 아니더라도 굳이 악담을 할 필요는 없어졌다. 맘 편할 때 그냥 찾아와서 좋을 곳을 하나 더 추가했을 뿐이다

이제 남은 길은 하산길이다. 날씨가 궂은 이유로 풍광이 수려하거나 오름 주변이 감탄을 자아낼 지경이 아님은 분명하다. 누군가가 거슨세미 오름에 올라 풍경도 별로여서 재미가 없었다며 투덜거리던 생각이 난다. 그래도 특이한 이름의 오름 하나를 더 오르지 않았는가. 나름 아늑한 재미가 있는 오름이었다. 베스트는 아니더라도 굳이 악담을 할 필요는 없어졌다. 맘 편할 때 그냥 찾아와서 좋을 곳을 하나 더 추가했을 뿐이다.


하산길에 이르러 관심을 바꾸려 한다. 산 너머의 풍경에만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하산길이 언뜻 보니 수풀이 우거져 막혀있는 듯 보인다. 가까이 걷다 보면 길이 다 연결되어 있지만 수풀이 무성함은 그 무엇도 금세 덮어버릴 기세댜.


내려가는 길에서 뒤편을 보니 드디어 숨어있던 밧돌오름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안돌에 가리고 주봉에 가려서 제 모습을 잠깐씩만 보이더니 하산길이 그쪽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제대로 오름을 모습을 보여준다. 반갑다. 신비의 장소를 발견한 듯 하다.


가까이 걷다 보면 길이 다 연결되어 있지만 수풀이 무성함은 그 무엇도 금세 덮어버릴 기세다


내려가는 길을알리려는 듯 산수국이 계속해서 나를 반긴다. 산속에서 이즘 만나는 꽃들 중 산수국만큼 이쁘고 기분 좋은 꽃을 보기란 쉽지 않다. 잎새 위를 나비 한 무리씩 앉아있는 느낌이 산수국의 감성일 것이다.

만나던 꽃이 최선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가면 다시 맘에 쏙 드는 꽃이 또 나타난다. 그러길 수차례 발길을 멈추다 보니 하산길이 지체된다. 그러면 어떠랴 지체된다고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오름을 오르내리며 어느 곳에서나 만나는 장면이지만 산담은 또 그대로 묘한 감성을 만들어낸다. 인생의 애절함과 함께 저기 묻힌 사람은 평생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 무엇이 이 오름으로 하여금 이 밭담을 만들어 눕게 했을까. 등등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나 산담의 돌에서 많은 구력이 느껴질 때는 머물지 않을 수 없다. 

산속에서 이즘 만나는 꽃들 중 산수국만큼 이쁘고 기분 좋은 꽃을 보기란 쉽지 않다. 잎새 위를 나비 한 무리씩 앉아있는 느낌이 산수국의 감성일 것이다

제주의 산담은 묘라는 느낌보다는 지나는 이들을 위한 정거장 같다고 할까. 왜 인지 모르겠으나 갑자기 발길이 멈추고 그 돌을 뒤덮은 이끼와 그 사이에 피어난 작은 풀과 꽃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주고 싶어 진다. 아직 정서가 메마르지는 않았나...


하산길 이런저런 오름 내부의 정서를 만끽하며 힘들이지 않은 탐방을 마치고 나니 덥석 작은 연못이 나타난다. 연못위에 나뭇잎들이 떨어져 있어 깨끗한 느낌보다는 고인 물이라는 느낌 이상은 아니었지만 오름이 있는 곳에 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제주에서는 흔치 않은 모습이리라. 더구나 어두운 느낌이 강하니 거슨새미가 괜히 색감과 연결된다. 거슨이 검은 이라는 뜻 일리는 없으니 이름의 유래를 찾아보자. 

왜 인지 모르겠으나 갑자기 발길이 멈추고 그 돌을 뒤덮은 이끼와 그 사이에 피어난 작은 풀과 꽃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주고 싶어 진다

아... 대체로 모든 물은 한라산과 먼 쪽을 향해 흐르게 마련인데 이 샘은 한라산 쪽으로 흐르고 있으니 거슬러 흐른다 하여 거슨세미라고 한단다. 녀석이 곤조가 있는 샘이자 오름이었던 셈이다.  이 오름에 이 샘만큼 특징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름은 없었을 것이다. 뭐라고 칭할 수 있었겠는가 이 오름을... 거슨세미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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