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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Jul 13. 2018

오름스럽지 않은 곳에서 마음을 두고 오다

덕천리의 뒤꾸브니오름을 헤매다

세상 모든 일들이 다 대표적인 모양새만 갖게 되면 심심해 죽을 것이다.

오름도 원통형으로 분화구가 잘 발달되면 좋겠지만 모든 오름이 원통형으로 동일하다면 역시 심심했을 것이다.

흔히 강남미인이라는 성형의 비슷한 모형을 보고 사람들이 비아냥거리는 것도 미모를 단일형으로 만드는 때문일 것이다. 개성이 없으니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과 뭐가 다를텐가.


다행히 많은 오름의 한쪽 분화구가 힘을 못 받고 무너져 말굽형의 모양을 갖는다. 그나마 그 정도면 다행이지만 많은 오름은 모양도 불분명하고 이름도 어정쩡하니 남아있는 것이 많다.

개성이 없으니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과 뭐가 다를텐가

집 가까운 덕천의 낯선 장소에 낯선 이름의 오름이 하나 있다. 한두 번 지나다녀 봤을 뿐이지만 그곳이 오름이라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이름도 생소하기 그지없다. 뒤굽으니오름. 이름뿐 아니라 장소도 생뚱맞다. 그곳에 오름이 있기 쉽지 않아 보이는데 지도상에는버적이 오름이 표시돼있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의 평을 찾는다. 찾기 어렵고 오르는 입구를 몰라 남의 집 담을 넘었다거나 밭을 가로질렀다는 이야기뿐이다.

괜한 호기심이 생긴다. 평상시에 잘 다녀보지 않았으니 어떤 곳일지 모르는데 그래도 가보기로 했다. 송당에서 덕천으로 가는 길에 살짝 빠져 가다 보니 한적한 도로가 구불구불 드라이브 하기에 그지없이 좋다. 차들도 거의 보이지 않으니 한가로움을 느끼는 드라이브 코스다. 지도상의 오름 표시에도 어디가 입구인지 찾을 길이 없다. 근처를 왔다 갔다 반복하다 일단 오름으로 여겨지는 장소의 뒤편 쪽으로간다. 혹시나 하고 뒤편에 차를 세우고 한두 군데를 기웃거린다. 저기가 정상인 것을 알겠다.  철책은 아니지만 경게 담장이 그물로 쳐져있다. 그냥 밀고 올라가면 금새 오를 위치다. 근데 그러자고 온 것이 아니니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지도상의 오름 표시에도 어디가 입구인지 찾을 길이 없다

어렴풋하게 구부러진 모양이 오름이라고 말하기에 조금 민망한 수준이다. 바로 코밑까지 밭으로 덮여있다. 어딘가 요란한 트랙터 소리가 들린다. 밭을 갈고 있는 소리다. 오름의 앞으로 나와 천천히 걷는다. 오름으로 보이는 능선 정상 부근을 모두 밭으로 뒤덮고 있으니 오르는 길이 없는 게 당연하다.

오르기 가장 완만한 장소 앞으로 밭이 가로막고 있다. 최근에 밭을 갈아놓았는지 흙이 고르게 퍼져 있다. 그곳을 지나면 완만한 경사와 초원의 풀들이 지속된다. 그 받대쪽으로 일부 숲이 보인다. 그게 전부다. 걸어서 10분이 채 안 걸릴듯한 분위기다. 밭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다행히 밭으로 쓰기에 적당하지 않은 밭 사이의 넓은 길 같은 장소가 보인다. 고랑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넓은 지역이라 그냥 방치된 땅과 흡사하다. 지대도 낮지만 커다란 돌이 잔뜩 놓여있어 밭으로는 영 아닌 땅이 오름의 입구까지 연결되어 있다. 다행이다. 남의 밭을 밟고 지나도 되지 않는다는 안도감이 찾아온다.

오름으로 보이는 능선 정상 부근을 모두 밭으로 뒤덮고 있으니 오르는 길이 없는 게 당연하다

밭을 가로지르고 나면 목초들이 바람에 한들거리며 방문객을 맞고 있다. 나지막한 동네 언덕을 오르는 이 기분에 주변을 둘러봐야 밭밖에 보이지 않지만 하가로운 농촌의 풍경, 특히나 제주 중산간의 풍경이 유유자적하게 펼쳐지는 느낌이다. 이런 날 날씨가 뙤약볕이었으면 굉장히 싫었을 것이다. 다행히 충분히 마음을 가라앉힐 만큼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었다. 이런 날씨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벼운 트레킹을 하기에는 좋은 날씨다.

풀밭 사이를 걷는 느낌은 대단히 여유롭다. 이 지역에 어린 시절을 보냈으면 이 동산을 굉장히 즐겁게 뛰어다녔을 만한 곳이다. 불행히도 분화구가 깊지 않아 안쪽까지 모두 밭으로 개간되어 사용 중이다. 이 오름도 분명 사유지일 것 같다. 오름을 오르는 가운데로 철망을 두른 경계선이 정상 끝까지 이어져 있다. 처음 오르던 풀밭으로 가다 보니 오름 정상 부근에서 철조망으로 막혀 더 이상 길을 가기가 어렵다. 어디선가 철책을 넘어야 한다. 그래야 오름의 나머지 부분을 가볼 수 있다. 만만한 장소를 찾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넘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필요에 의해 철망을 넘을 장소를 찾았을 것이고 여러 명의 반복적인 방문에 길 아닌 통행로의 흔적이 남은 셈이다.

나지막한 동네 언덕을 오르는 이 기분에 주변을 둘러봐야 밭밖에 보이지 않지만 하가로운 농촌의 풍경, 특히나 제주 중산간의 풍경이 유유자적하게 펼쳐지는 느낌이다

곧이어 정상이다. 앞뒤로 보는 풍광이 오르면서 보는 풍광과 큰 차이가 없다. 워낙 동네 뒷동산 느낌이어서 가벼운 산책 이상이 아니다.  뒤편으로 멀리 체오름도 보이고 송당의 다른 오름이 켜켜이 뒤로 줄을 서있다.  낯선 풍경이다. 체오름이 늘 뒷배경의 역할을 하던 오름을 주로 올랐는데 여기서의 풍경의 반대의 모습이다.


걷는데 무수히 많은 바람이 억새를 흩날리게 한다. 혹시 저게 억새 맞나? 일단 억새라고 해 두자.  억새가 흩날리는 낮은 동산을 오르면 동네 어귀를 굽어보는 느낌은 어린 시절 미국 드라마인 초원의 집을 연상시킨다. 개인 재산의 표시에 의해 철망을 쳐놓은 야속함이 밉기는 하지만 그 야속함도 편안함과 한가로움을 빼앗을 수는 없는 셈이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필요에 의해 철망을 넘을 장소를 찾았을 것이고 여러 명의 반복적인 방문에 길 아닌 통행로의 흔적이 남은 셈이다

정상에 올라 보니 처음에 차를 내려 기웃거리던 장소가 정상 바로 아래다. 저기서부터 철망을 넘어 올라왔으면 5분도 안 걸렸을 거리다. 그랬으면 쉽고 빨랐겠지만 뒤굽은이의 한가로운 맛을 결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일이 결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오르는 게 목적이기만 했으면 다시 내려가야 할 길을 올라올 이유가 없을 터이니 말이다. 오르는 과정에서 느끼는 한가로움과 기대감으로 인해 뒤굽은이는 약간의 모를 장소에서 어린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타임슬립을 경험하게 해준다.


한가로운 농사현장을 보는 느낌. 농사의 고달픔을 이야기하는 상황이라면 불호령을 맞을 일이지만 그래도 지친 몸을 이끌고 약간 쉬어가듯 여유를 이야기해도 좋을 듯하다. 그만큼 이 오름은 낯선 곳에서 의외의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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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반대편으로 깊지 않지만 나무 숲이 나타났다. 하산하는 길이 것이다. 숲으로 들어서자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숲은 언제나 들어가기 바로 전 약간의 공포를 느끼게 한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진입하기 전의 두려움이라고 할까. 숲에 들어가면 곧바로 적응이 되긴 하지만 강한 바람과 억새로 한껏 고무된 분위기에 차분하고 어두운 숲으로 들어오니 낯설다. 몸이 지쳐서인가 갑자기 귀찮은 생각이 먼저 든다. 이 길로 내려가면 저 아래 밭의 언저리 어디로 바로 도착할 테지만 귀차니즘이 모든 것을 앞선다. 돌아서 가자. 오늘은  강한 바람을 맞으며 풀밭 위로 걷는 것이 더 끌린다. 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기로 한다.

농사의 고달픔을 이야기하는 상황이라면 불호령을 맞을 일이지만 그래도 지친 몸을 이끌고 약간 쉬어가듯 여유를 이야기해도 좋을 듯하다

이번에는 철망을 넘지 않고 끝까지 가본다. 내려가면 갈수록 길이 걸어서 내려가기 쉽지 않다. 다시 왔던 길을 돌아와 철망을 넘는다. 곳곳에 철망을 넘은 흔적이 역력하다. 그중 하나를 선택해 넘는다. 저 아래 검은색의 밭이 보인다. 시간이 지나며 저 밭에는 또 어떤 작물이 무성해지려나.


입구도 없고 출구도 없이 초반에 헤매던 뒤굽은이는 오르면서 잔잔한 여유로움을 준다. 이름대로 뒤가 굽어 있어서라기 보다는 오르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입구만 조금 열어주면 산책길로 좋을 텐데. 길은 없는 듯 하지만 그래도 이 여유로움에 마음을 두고 가기로 했다. 뜻밖의 여유를 얻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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