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탑을 둘러싸고 놀던 자유공원에 대한 추억
몇몇을 빼고 고향은 향수와 연결되어 있다. 머릿속의 고향은 현실과 다르고 실제로 그곳을 찾아가면 기억 속의 고향은 멀리 사라져 버린 안개나 신기루와 같다.
내게 있어 어린 시절 정확히는 국민학교 5학년까지 지낸 곳이 내 마음의 고향이다. 더 어린 시절 태어나서 자란 곳이야 지금은 사라져 버린 철길 옆 어딘가이지만 그곳에 대한 기억은 한 가지 장면을 빼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대신 국민학교 입학 전부터 5학년까지 지냈던 그곳은 언제나 그립고 슬프고 애닳고 그러나 결코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곳이다.
머릿속의 고향은 현실과 다르고 실제로 그곳을 찾아가면 기억 속의 고향은 멀리 사라져 버린 안개나 신기루와 같다
그곳을 떠나온 지가 42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흘렀다. 엊그제 같은데 42년이라니... 시간을 세어 보고는 너무나 깜짝 놀랐다. 그 언저리를 왔다 갔다 했던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확히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살던 그 집을 찾아가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저리를 헤매던 기억을 안고 있으면서도 왜 그곳을 걸어서 찾아가 볼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언제나 그곳은 나를 기다려줄 것이라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차마 내 기억 속의 장소를 다시 찾았을 때 기억과 현실이 달라지는 슬픔을 받아들일 만큼 자신이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고향은 추억 속에 응축된 시간을 가지고 남아있다.
얼마 전 도시재생산업박람회가 있어 인천을 찾았다. 그것도 인천역과 자유공원이 있는 곳. 짜장면으로 유명한 식당가와 화교학교가 있는 거리. 지금은 중견 인척 하지만 신인시절 배우 최민수를 뜨게 했던 '고개 숙인 남자'라는 제목의 드라마에서 배경이 됐던 일본 적산가옥들이 즐비한 거리. 그렇다 내 고향은 인천이고 지금은 수도국산박물관이 있는 곳이다. 앞에서 언급한 장소는 자유공원을 둘레로 늘어져 있는 곳이고 내가 종종 놀던 놀이터지만 찾고 싶은 곳은 그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수도국이 있어 어린 시절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수도곡산'이라고 부르며 동네의 골목골목을 뛰어놀던 산동네가 내 고향이다.
언제나 그곳은 나를 기다려줄 것이라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차마 내 기억 속의 장소를 다시 찾았을 때 기억과 현실이 달라지는 슬픔을 받아들일 만큼 자신이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행사를 둘러보고 업체와의 미팅을 앞둔 채 시간을 보니 1시간이 남았다. 무조건 내가 살던 집을 찾아보리라는 마음으로 발길을 옮긴다. 마음이 바쁜 관계로 걸음걸이가 빨라진다. 짜장면을 먹고 자유공원을 향해 부리나케 걸음을 옮긴다. 바로 앞에 화교가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학생들이 화교 앞 정문에서 기웃거리며 그들의 노는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본다. 내 기억에는 화교학교에서는 쌍십절이면 사자를 둘러싼 사자놀이를 했다. 중국 영화에서 종종 보던 모습이다. 기억을 더듬으며 길을 걷는다. 원래 목표했던 자유공원 꼭대기가 아닌 제물포구락부가 나온다.
제물포 구락부
1891년 청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이다. 1901년 자유공원 기슭에 옮겨왔단다. 러시아인의 설계로 지어졌고 1914년 조계가 폐지되면서 더 이상 사교장의 역할은 중단됐다. 해방 후 미군 장교클럽, 시립박물관, 문화원 등으로 활용되다 지금은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내용을 대충 정리하면 이렇다.
그 건물을 지나 위로 식식거리며 오르니 자유공원이다. 공원 한복판에 9.15 인천 상륙작전의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보인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동상이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공원 옆의 다른 공원에 있었는데 고등학교 시절인가 언젠가 지금의 장소로 이전했다. 오래된 공원의 풍취가 이곳저곳에 남아있다. 남아있는 벚꽃이 반가워 여기저기서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거나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자유공원은 어찌 됐든 한국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다. 전쟁 후 그동안의 다양한 이름에서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이 정착됐다.
나는 이곳에서 어떤 심정을 토로해야 할까. 반갑기도 하고 다양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뭐라고 짧게 할 말이 없다. 내가 이공원에서 확인할 것은 다른 추억도 있지만 어린 시절 몇 번인가 놀던 아주 황당하던 게임을 하던 장소가 그대로 남아있는지 장소이다.
나는 공원 옆을 천천히 내려가다 말고 갑자기 옆으로 발길을 돌렸다. 옆에 서있던 철탑이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어린 시절 철탑의 높이가 그대로인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찾던 탑이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나는 반가움에 펄쩍펄쩍 뛰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긋거릴 만도 하다. 다른 좋은 풍경 놔두고 왜 쓸데없는 철탑의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일까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전기 때문에 위험해 출입을 금하기 위해 철망을 두른 철탑을 말이다. 지금이야 전기나 송전탑 역할을 하고 있겠지만 그 당시 기억으로는 전기 탑이 아니라 높이도 아주 높지 않은 철탑이었고 철망이 쳐져있거나 감전의 위험이 있거나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내 기억은 이렇다. 매일은 아니지만 또래의 아이들은 점심시간 언저리가 되면 공원의 이 철탑 아래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서로가 훨씬 용기 있고 담력을 지닌 남자인 것을 증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기 마련이다. 누가 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는가 하는 내기는 물론 한 움큼의 소금을 먹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 주전자 물을 누가 더 많이 마시나 등등 지금 생각하면 실로 말도 안 되는 내기를 하곤 했다. 그 용기에 대한 보답이래 봐야 곧 사라지게 될 '너 진짜 용감하다'거나 요즘 말로 하면 '완전 쩔어!' 정도의 칭호를 받기 위해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전을 하곤 했다.
다른 좋은 풍경 놔두고 왜 쓸데없는 철탑의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일까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전기 때문에 위험해 출입을 금하기 위해 철망을 두른 철탑을 말이다
우리가 이 철탑을 둘러싸고 했던 내기는 공교롭게도 누가 더 오래 참을 수 있는 담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시합이었다. 이 철탑에서는 매일 정오가 되면 사이렌이 울렸다. 그 당시에는 뭔 상황을 알려주기 위해 다양한 신호를 보내는 게 일상적인 시절이었다. 이 철탑의 기능 중 하나는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을 울리는 일이었고 우리들은 그로 인해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멀리까지 사이렌 소리가 들리도록 하려다 보니 철탑 주변에는 어머어마한 소음을 감내해야 했다는 것이다. 바로 근처에 있으면 소음의 데시벨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 철탑 아래에 우리는 12시가 되기 10여분 전쯤에 모여 내기를 청하곤 했다. 그날 내기에 나선 이들은 승자에게 무언가를 몰아주었기는 했는데 대단한 건 아니었다. 모두든 가난하던 시절 기껏 가지고 있는 거래야 종이로 접은 네모 딱지나 나무 상자를 잘라 만든 칼, 동그란 종이딱지, 구슬 뭐 그런 것들 중 한두 가지였다. 어린 시절의 보물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뿌듯함과 장밋빛 미래였다.
사이렌이 올리기 약 5분 전쯤이나 10분 전쯤 우리들의 치킨게임은 그렇게 시작된다. 시작하는 구령(아마 그 당시에는 일본식으로 요이땅! 을 외쳤으리라.)을 시작으로 철탑의 양쪽에서 아이들이 오르기 시작한다. 그중에서 담력이 가장 센 아이는 사이렌 아래에서 오랫동안 버티기를 했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우리들은 사이렌이 곧 울릴 것을 알기에 초조함에 견디기 힘든 아이들은 재빨리 철탑을 내려가 자신이 피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철탑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달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위쪽보다는 달리기가 용이한 동인천역 쪽의 아래로 뛰어내려 갔다. 마지막까지 시간을 속으로 재거나 하는 친구들은 적절한 타이밍이 됐을 때 재빨리 철탑을 내려와 달리기 시작한다. 그 달리기를 시작한 무렵 약간의 고요함이 지나고 나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한다.
"에~엥~~~"
그 소리는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 시끄럽고 귀가 터질 듯이 괴로운 소리였던 기억이 난다. 기억 속에는 5분 이상 사이렌이 울렸던 것 같다. 암튼 사이렌이 울리는 시간 동안 우리는 그 소리에서 멀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 멀리 뛰어나갔다. 아마도 우주가 폭발하는 빅뱅의 심정이 이러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경기이기는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 일정기간은 그렇게 놀았다.
어린 시절의 보물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뿌듯함과 장밋빛 미래였다
이미 전기 송전탑으로 변해버린 철탑밖에 없었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기억의 장소로 남아있는 곳이었다. 물론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 이전에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그때는 그 당시의 철탑이 그래도 남아있기를 기대하고 왔으나 높은 전기 송전탑으로 변해 출입이 막힌 사실을 보면서 서운했던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고향은 물론 어린 시절은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렇게 자유공원에 대한 내 추억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후 자유공원의 또 다른 상징이자 옛 문이었던 홍예문을 찬찬히 바라보며 나는 창영 국민학교가 있던 자리를 내려가 인천의 최고 번화가 역할을 했던 동인천역을 향해 걸었다. 동인천역은 인천이 인천역 시대에서 벗어나 초기 확장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그곳에서 신포동으로 이어지는 중앙지하상가는 세상의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는 전시장 역할을 하곤 했다.
휴일에 중앙지하상가에 가서 새 옷을 살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커다란 일이었던가. 그리고 언젠가 쫄면이 전국적인 히트 아이템이 되면서 분식집에서 쫄면을 먹고 영양 통닭을 먹는 흥겨운 날들이 있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 날들을 함께 하던 어머니가 소천하신 지 벌써 20년이 다되어 가다니....
이 세월의 속도를 어찌 감당할 수 있으리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