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간장게장의 고수 여진식당
일정의 가장 후반부를 여수로 잡았다. 여수공항에서 제주행 비행기를 타야 하기에 이를 고려한 때문이기도 하고 여수에 여러 차례 방문한 기억을 통해 포인트 있는 무엇인가를 해 보자는 기대를 마지막까지 남겨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나와 객기를 부리며 돌산섬을 한 바퀴 돌아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섬을 도는 내내 괜히 쓸데없는 용기를 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차를 세워 주변을 돌아보고 싶은 곳이 나타나지 않는다. 피곤해 죽겠는데 괜히 운전만 하는 셈이다. 젊었을 때야 운전이 나름 재미있었을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가능한 한 운전은 멀리하고픈 심정이다. 피곤함이 생각 이상으로 육체에 데미지를 준다. 결국 여수에서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여수에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자주는 아니어도 몇 번이고 올 테니 여수를 떠나기 전 한 가지만 하고 가자. 게장 백반을 위해 직진을 결정했다. 얼마 만에 먹어보게 되는 게장이련가.
게야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최고의 식재료이자 나름 다양한 요리를 자랑하는 재료이다. 국내에서도 게는 어느 지방 마다하지 않고 맛난 게장과 게탕을 자랑한다. 또 각 지방마다 독특한 맛집들이 특색을 나타내지만 여수의 간장게장은 어떤 이유인지 파괴력이 최상위급이다. 남도지방의 한정식과 더불어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언제든 먹고픈 음식이다. 연평도나 서해안은 커다란 게가 아닌 비교적 자그마한 돌게로 만든 게장이지만 그 맛은 여수의 대표음식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됐다.
문제는 어딜가지. 여수에 와서 게장을 먹어본 기억이 몇 번 정도 되는 듯싶은데 근년 들어와 본 기억이 없다. 제주로 내려간 이후로는 한 번도 여수에서 간장게장을 식사메뉴로 삼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느 식당을 가야 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참을 생각해보니 황소식당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관광객들로 가득 차서 순서를 기다리다 급하게 게장을 삼키고 쫓기듯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맛은 있었지만 그렇게 쫓기듯 밥을 먹고 싶지는 않다. 두 번째 여수를 찾았을 때, 20여 년 전이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시장통에서 지역주민들만 다니던 간장게장집이 있었다. 당시에는 관광객들은 이 집을 찾지 않았기에 한적하게 푸짐한 간장게장을 먹을 수 있었다. 당시에 좌식 테이블에 앉아 무한리필의 호사를 누릴 수 있었던 식당이었던 기억이 소환된다. 핸드폰을 뒤지다 보니 이름이 생각났다. 여진 식당이었던 것 같다.
20여 년 전이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시장통에서 지역주민들만 다니던 간장게장집이 있었다
다행히 가게는 예나 다름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물론 식탁은 좌식에서 입식으로 바뀌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가게의 분위기는 그대로인 듯싶다. 뭘 고민할 일도 없이 게장백반을 시키고 어떤 맛일지 기다린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긴 간장게장과 양념게장이 도착한다. 접시에 푸짐하게 차려오면 좋으련만 대접에 담아오는 모양새는 그다지 센스가 없어 보인다. 몇만 원씩 하는 고급 식당의 간장게장이 넓은 접시에 나란히 줄을 맞추어 나오는 모양새와는 사뭇 다르다. 적지 않은 양인데 조금 데코레이션을 신경 쓰면 누가 뭐래나. 그래도 맛만 좋으면 용서다.
좀 더 자극적인 입맛을 위해 고추장 게장을 먼저 집었다. 집사람은 간장게장을 먼저 집는다. 맛이 좋다. 이 집만은 독특한 맛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게장이 밥도둑인 것만은 확실하다. 게장 만으로도 밥 없이 먹을 수 있는 약간의 짭짤한 정도지만 그래도 게장만 먹기에는 여전히 아쉬운 무언가가 필요하다. 평상시에 밥과 반찬의 짠맛 정도로 식사를 했다가는 한두 공기로는 어림없다. 약간의 짜고 매운맛을 견디기로 한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다르지만 난 아무래도 이 날따라 양념게장이 좀 더 당긴다.
리필을 부탁하니 둘 중에 한 그릇만 더 리필이 가능하단다. 무엇을 선택할까 고민이다. 매우 맛은 이것으로 만족하고 간장게장을 한 그릇 더 청한다. 이참에 밥 한공기도 추가. 사실 탄수화물을 추가하는 일은 나로서는 꽤나 큰 결심이다. 당뇨로 인해 가능한 한 탄수화물을 멀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밥 한 공기 추가는 괜히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배가시킨다. 당 수치가 꽤나 올라가겠군. 그래도 게장의 유혹을 무시하기가 쉽지 않다. 에구 이놈은 식탐을 어찌할고나.
당뇨로 인해 가능한 한 탄수화물을 멀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밥 한 공기 추가는 괜히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배가시킨다
게장과 함께 나온 밑반찬은 사실 구색으로 나온 느낌이 너무 강하다. 하지만 맛을 보고 나니 전라도에 온 것이 확실하다. 차림새는 빈약하지만 기본 이상의 맛을 가지고 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인데 지역의 음식문화가 이토록 다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혀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는 말인가. 여전히 의문이다. 맛을 못 보는 것일까.
배가 한가득 입안에 짭짤한 맛을 가득 채운 채 식사를 마친다. 이런 식사를 마치고 나면 가장 생각나는 음식은 공교롭게 커피다. 주변에서 카페를 찾아야 한다. 커피 한잔을 마시니 점심이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게장이 오래된 중독으로 뼛속에 새겨졌다면 커피 문화 역시 중독의 한 범주에 속하는 것일 게다.
이제 공항을 향하는 일만 남았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으니 무엇이 아쉽겠는가. 간장게장을 먹으러 죽기 전에 몇 번이나 더 이곳에 올 수 있을까. 홈쇼핑으로 받아먹는 게장도 맛이 나쁘지 않은데 왜 이 지역에 와서는 이 음식을 먹어야 하는 걸까. 특별한 이유를 생각해내지는 못했지만 여수에 올 때마다 간장게장집은 우선순위의 가장 위에 있을 탑픽 일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핑계 삼아 또다시 갈 구실을 찾아야겠다. 또 가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