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숨겨져 있던 모든 야채들을 죄다 꺼내 먹은 듯싶은데 그래도 어딘가에서 먹거리가 계속 나온다. 신기하다. 두부도 있고 청국장도 있고 배춧국, 콩나물국 등 그동안 아무런 의미 없이 넘기던 먹거리들이 주식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물론 나한테는 그렇지만 집사람에게는 다른 상태가 되었다. 그다지 육식을 밝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일정시간이 지나면 회 한 접시를 하나로마트 수산물코너에서 사가지고 와인 한잔을 곁들이는 일들이 일요일 저녁에 가질 수 있던 소소한 즐거움이었을 텐데 그 일이 가능하지 않게 됐다. 아니 혼자서만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소고기를 사다 뜨거운 불에 구워 먹으며 맛을 음미하던 그 순간들도 함께 할 수 없게 됐다는 아쉬움도 토로한다. 고기를 사 오거나 할 수 없다는 이유다. 내 입장에서는 언제든 고기를 먹고 싶을 때 집에서 구워 먹어도 상관없으니 맘 편히 기존의 식생활을 유지하라고 하는데 말처럼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같이 살던 사람이 식생활을 바꾼다고 하니 뭐든 쉽게 적응이 되겠는가. 당연하듯이 함께 먹었던 음식을 거부하는 꼴이 되어버렸으니. 본인도 야채만을 가지고 요리를 하는 습관은 여전히 낯선지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쉽게 드러난다고 투덜 된다. 호박이나 두부를 부치거나 야채를 굽거나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비슷한 음식이 식사에 올라오는 경우, 즉 음식종류의 회전 속도가 빨라졌다. 급기야 홈쇼핑에서 야채만 토핑으로 들어간 누룽지탕을 주문해 변화를 주기도 한다.
일요일이 되자 작심하고 마트에 가기를 청한다. 마트에 가본 지가 몇 달은 된 듯하다. 연말이라 외식이 잦았고 냉장고를 파먹고 사는 일이 많아서 그럭저럭 버티며 지내왔는데 더 이상 꺼내 먹을 게 없다는 말을 건넨다. 나 먹자고 가는 마트인데 마다할 일도 없고 순순히 운전대를 잡았다. 물론 일요일이니 그동안 쌓아놓은 쓰레기들도 한꺼번에 치우는 일도 잊지 않고. 다행히 일요일 날씨가 평일보다 따뜻하다. 오랜만에 겪는 따뜻한 날씨다. 운전 중에 뒷머리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히며 무더움을 느끼게 된다.
내 몸에서 열이 나는 경우가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일단 미련스럽게 옷을 끼어 입고서는 더위에 못 이긴 채 허덕대는 경우. 추위를 많이 타게 되면서 일단 두껍게 입고 보자는 생각에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두 번째는 차량의 히터를 틀었거나 좌석을 열시트를 뜨겁게 해 놓은 경우. 세 번째는 호르몬 작용으로 갱년기 현상처럼 갑자기 열이 나면서 땀이 주르륵 흐르는 경우. 세 가지 모두 흔히 있는 일인지라 솔직히 가끔은 헷갈리기도 한다. 오늘도 그중 어느 경우인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날씨가 따뜻한데 옷이 두꺼워서 라는 사실을 알았다. 미련스럽다.
마트에 도착해서 순서대로 장을 본다. 맛있는 과일이 가득하지만 나는 손도 댈 수 없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당을 높이는 주범인지라 과일은 가능하면 손을 많이 대지 않으려 한다. 더구나 겨울에는 귤이 나오는 철인지라 집안에 어찌해서든 귤이 끊이질 않는다. 올해도 3월까지는 귤로 과일을 대체하고 지내리라. 제주에 살면서 귤을 얻어먹기 시작하면 일차적인 제주 적응을 됐다고 판단하곤 한다. 나야 벌써 10년이니 나 역시 귤을 사 먹는 일을 내 선택사항으로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어찌 됐든 귤은 생긴다.
나머지는 이런저런 야채를 담는다. 호박, 오이고추, 꽈리고추, 청양고추, 양상추, 순두부, 두부, 아욱, 대파에 몇 가지 버섯류까지 흔히 살 수 있는 야채들은 하나씩 담는다. 단 한 가지 브로콜리는 쉬고 싶다. 너무 자주 먹으니 브로콜리도 물리기 시작한다. 큰일이다. 벌써 질리기 시작하는 종목이 생기면 곤란한데. 다양성이 부족하고 요리에 익숙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다음 코너는 패스다. 소시지, 베이컨, 치즈, 어묵 등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해산물코너다. 언제까지가 될는지 모르지만 해산물 중 물고기류는 일단 제외하기로 했으니 나에게는 구매 대상이 아니다. 집사람은 한 줄짜리 회를 찾고서는 오늘은 자기의 저녁이라며 좋아한다. 혼자 먹으면 되니 사라고 격려를 해준다. 굴과 멍게에 대해 묻기에 일단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멍게를 좋아하지만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은 조금 나중에 해보기로 했으니 지금은 참기로 했다. 계란을 산다. 당연히 계란은 선택의 여지가 있다. 많은 요리에도 쓰이고 이것조차 안 먹겠다고 하기에는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멀리하고는 있는 중이다.
집사람이 이것저것을 둘러보는 사이 혼자서 만두코너를 찾았다. 모든 만두가 돼지고기를 포함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히 잘 먹었는데 동물성 단백질의 함유량은 모르겠으나 포함되어 있는 것뿐이다. 야채 만두라는 이름에도 고기는 들어가 있다. 한 가지 모든 내용물이 채소인 만두가 다른 만두사이에서 외롭게 진열되어 있다. 풀무원에서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만두를 출시했다. 발 빠른 기업이구나 싶다. 반가운 마음에 뒤편의 구성요소들을 꼼꼼히 살펴본다. 먹어도 될 것 같다. 냉장고의 다른 코너에 가니 온갖가지 튀김류들이 나를 유혹한다. 내가 채식을 시작하면서 경계하게 되는 중요한 음식은 기름에 튀겨서 냉동한 음식들이다. 닭이든 김말이든 피자든 뭐든 식용유를 활용한 튀김의 결과물인 음식이 너무가 한가득이다. 이것저것을 살펴보면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하면서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했다. 과자류는 물론이고. 다행히 국수류나 라면류에서 순식물성 수프를 포함시키고 면을 튀기지 않은 제품을 발견했다. 물론 다른 무엇이 더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다행이다. 라면도 먹을 수 있는 것이 생겼다.
다른 물건을 사면서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예전 같으면 생각 없이 담았을 카트에 물건이 쌓이질 않는다. 집사람의 선택과 합하니 물론 꽤나 많이 샀지만 내 입장에서는 개별적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한 가지였다. 고구마 가격이 좋다. 저녁이나 일반적인 간식으로 이 구황작물의 역할이 꽤나 중요하다. 집에 감자도 받은 게 많이 있다고 하니 감자와 고구마로 한동안의 생활을 보내야 할 모양이다.
마트에 다녀오면서 간단하다면 간단할 수 있는 선택의 기준일 뿐인데 그로 인해 그 넓은 마트의 거의 대부분 공산품은 나와 멀어져 갔음을 알겠다. 마트를 자주 올일이 없어질 것 같았다. 그럼 다른 먹거리 수급루트를 찾아내야 한다. 마음이 조금씩 초조해지고 있다. 아직 2달도 채 안 됐는데 이를 어쩌지.
장류를 한껏 활용해 보는 수밖에. 오늘 저녁은 청국장으로 해보자.
믿거나 말거나 아직까지 내가 채식을 하면서 버티는 중요한 이유는 체중조절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6주에 들어선 지금 나는 최고 때보다 체중이 6kg이 줄었다. 앞에서 말한 2가지 내용물이 들어간 음식을 멀리한 그 이유만으로 그토록 어려웠던 체중조절이 저절로 되고 있는 중이다. 2-3일 만에 몇백 그램씩 줄어드는 재미는 매일아침 저울에 올라서면서 설렘으로 바뀐다. 언제까지 체중이 줄어들 것인가. 이제 지난해말 몸이 안 좋아지면 급하게 올랐던 체중이 하락세로 돌아섰으니 그 하락세가 어디쯤에서 멈출 것인가가 관건이다.
다른 한 가지 지금까지 채식의 결과물 중의 하나는 오히려 먹는 양이 엄청 늘었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밥 반공기만 먹어도 주변에서 눈치를 주곤 했는데 요즘은 밥을 먹고 또 먹는다. 그래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금세 배가 고파진다. 물론 가능하면 현미밥을 먹고 있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울 정도로 많이 먹는데 체중이 저절로 빠지고 있으니 다행이다. 더구나 그동안 꾸준히 올라가서 당뇨병이라고 가늠하는 수치였던 공복혈당이 이틀 전부터 100~110 사이로 줄었다. 당뇨가 없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혈당을 낮추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고통의 시간들이다. 먹을 거를 제대로 먹을 수 없는 고통은 참 사는 게 뭔지 하는 의구심을 들게 만든다. 그런데 그 혈당이 140 가까운 수치에서(나는 당뇨약을 복용 중이다) 30 가까이 줄었으니 긍정적인 변화인 셈이다. 물론 지난번 의사와의 미팅 시 크게 문제가 됐던 중성지방이 다음번 검사에서는 어떻게 나올지가 걱정이기는 하지만 당 수치가 낮아지는데 중성지방이 더 이상 높아지지는 않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아니면 진짜 큰일이기는 하다.
나름 긍정적인 변화를 피력했지만 내 체력이 저질체력인 관계로 하루하루의 생활이 힘겨워진 거는 반전의 사실이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보내는 일이 너무나 힘들어졌다. 유난히 피곤함을 많이 느끼는 기분이다.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에너지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한 달이 조금 넘은 상황에서 나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으면 아직까지 나의 채식생활은 성공적인 셈이다. 물론 깊은 내면의 문제는 남아있다. 진실로 채식생활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가와 체중요소를 제외하고 다른 것이 좋아졌다는 객관적인 수치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래야 이 분야에서도 지속성을 담보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2월에 있을 당뇨관리 의사와의 진료가 기대반 걱정반이 양분되는 순간들이다. 어떤 결과가 나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