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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May 31. 2023

느닷없는 일기

2023년 5월 23일

많은 부분에서 부질없음을 알아가는 일은 참 어려운 일임에도 그 느낌은 삽시간에 마음을 점령한다. 아직 준비가 한창 덜 되었음에도 문뜩 잠에서 깨었을 때 하늘이 파랗더라도 그 파랑에 휘둘릴 일이 없는 자신을 갖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순간들의 연속이다. 


제주에서 10년을 보냈다. 다시 원위치에 섰다. 늘어난 것은 집안 가득한 쓸데없는 짐뿐이고 헛된 욕심과 망가진 몸 그리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피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뿐이다. 한 가지 바뀐 일이 있다면 매일 아침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잿빛 도시의 무질서한 볼품없는 건물이거나 아파트 단지였던 일상 대신 저 멀리 보이는 바다의 뿌연 느낌과 힘차게 자라고 있는 초지의 출렁임을 바라보고 있음이다. 그 변화가 얼마나 많은 변화였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나 역시 내 마음은 여전히 초조하고 불안함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면 시간이 지나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할 뿐이다. 나는 누구였고 앞으로는 누가 될 것인가. 진지한 고뇌보다는 하루하루에 충실했다는 자조 섞인 시간들을 보내고 나니 세상이 새삼스레 부질없어지고 답답함이 몰려온다. 


제주가 작아서인가. 섬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어는 정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지 기준을 잃어서 발생한 일이라는 점을 충분히 알게 됐다. 제주에 와서 돈을 벌기 위해 바둥거리는 게 초심은 아니었지만 인간은 또 원래의 초심대로 발버둥 치는 세계에 몰입된 채 개미지옥을 끝없이 벗어나려 애쓰게 된다. 시지프스의 신화를 언급할 일도 아니고 스스로 고행길을 택하고 있는 선택의 차악에 대해 무슨 변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한밤중에도 잠은 나를 멀리한다. 수없이 많은 날들, 잠을 청해 보지만 다량의 수면제가 없이는 잠을 청할 수 없는 시간이 벌써 2년이 되어간다. 참 어이없는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잠을 찰 수 없어서 수면제를 먹는 일이 서울이라는 도심이 아니라 제주의 숲과 오름과 바람이 그치지 않는 자연에 자리 잡은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니. 어찌 보면 도시가 체질이 아닐까 판단하는 이상한 인과성에 빠질 수도 있는데 현상적으로는 그것이 옳다. 시기가 그렇게 겹치기 때문이다.


핵심은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정착하면 살아가고 있는가가 아닐까. 제주에서 내 인생의 후반을 보낼 수 있는 준비와 각오가 되어있는지를 알 수가 없기에 마음이 부유하는 것은 아닐까. 10년이라는 세월이 나름 무게감을 꽤나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시간들. 주변에 사람들이 없음을 알고 있기에 여전히 업무와 관련된 약속을 잡고 있다. 그렇다고 내 인간관계가 확장되는 것도 아닌데. 이 같은 삶의 패턴은 어디쯤 가야 나 아닌 다른 인생의 고개를 넘게 될는지. 


많은 일들은 여전히 매일 일어난다. 그럼에도 하나씩 외면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그를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싶다. 뜻밖에 조금씩 나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찾는 일이 어쩌면 지금의 내게 가장 중요한 과제일런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밤이다. 참 시골에서 살아가는 일은 새로운 정신세계를 유도해 내는 마술을 보유한다. 자연은 어쩌면 최악의 독소조항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를 찾게 해 준다는 명목하에 기존의 나를 깡그리 바꾸고 있으니 인생의 테라포밍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불현듯 인생의 깊은 연속성을 지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구와 함께 계곡을 넘어갈 것인가. 그 너머에 밝은 미래가 있다는 희망보다는 난쟁이들의 깊은 광산이나 수많은 굴에 묻혀있던 한 맺힌 원혼들을 만날 것 같은데 길은 여전히 계곡을 향해 내 발길을 이끈다. 좋고 싫음을 비우려는 노력에 집중해 볼 일이다.


어느 순간 10년의 제주 생활이 이러했음을 기억하기 위해 버둥되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자 한다. 그 흔적이 볼품없지만 그래도 발버둥 쳤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일을 위해 가장 편한 방법은 느닷없는 일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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