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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Oct 26. 2022

오롯이 제주서 보내는 추석명절

[중산간 일기 7]

비교적 일찍   예약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비행기 삯이 싸지질 않는다. 결국 이틀 일찍 오고 이틀 늦게 돌아가는 편으로 예매를 했다. 아직 명절 연휴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도 않는데 공항에 나가야 한다. 제주 공항은 시도 때도 없이 붐비지만 추석을 맞이하면서 여행을 오는 가족 혹은 단체가 많아서인지 모든 곳이 부산하기 이를 때 없다.  결국 출국 창구로 올라오라고 일정을 변경하고는 출발 게이트인 이층에서 아버지와 누이를 맞았다.

"공항에서 30~40분 걸리는 거리예요"

공항의 도착이 여행지의 도착이 아닌 여정 중이라는 사실을 슬며시 고지해주었다. 산골에 살고 있으며 버스나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대도시에 살다 보면 불편한 점이 여간 많은 게 아니다.

작은 집에 2명의 어른이 들어왔으니 잠자리를 재편하고는 할 일을 잃었다. 난 아직 근무 중이고 집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올해 90세 누이는 60이다. 아버지는 귀가 거의 들리지 않기에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목소리톤이 매우 높지 않으면 소통이 어렵다. 누이는 외국생활 30년이라 아무리 감도를 높여도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90년대 초반에 멎어있다. 물론 그동안 간간히 한국을 방문하며 한국에 대한 인식을 업그레이드했어도 여전히 현실과 불일치는 물론 그 간극조차 매우 크다.


공교롭게도 우리 가정에는 의사소통의 프로토콜 같은 건 없다. 서로를 칭찬한다던가 지속적인 접촉이 많지 않았기에 대화가 띄엄띄엄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방사선 치료에 내 생활의 흐름을 침해받는데 익숙지 않다. 나이가 들어선 때문인지 이에 대한 방어본능이 매우 강해졌다. 공감대 없는 가족 4명이 그곳도 다 나이가 꽉 차게 들은 이들이 짧은 명절 연휴를 보내기로 한다. 아참, 우리 집에는 식구 하나가 더 있다. 진돗개 잡종이 한 마리 함께 산다. 집안에서 지내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을 유독 좋아하는 유기견 출신의 제3의 식구다. 아버지나 누이는 개를 집에서 키우는 일에 전혀 이해도 없을뿐더러 익숙하지도 않다. 그래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설정이 너무 우울하지만 그래도 가족은 별일이 아닌 것에도 웃고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할 수 있는 바탕이 존재한다. 최소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고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이거나 며느리 혹은 시누이올케 사이라면 그런 듯 싶다. 아내가 얼마나 잘 참아 주느냐가 문제다. 우리 식구들이 유달리 정 붙이는 언사에는 거리가 있기도 하지만 어찌 됐든 그동안 쌓여있던 오해도 함께 있으니 아내로서는 즐거운 8일이 아니라 견뎌야 하는 시간일 터이다. 그나마 제사를 지내러 인천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위안을 삼아야 하는 거라면 그냥 그런 정도의 조건이다.

아버지는 오신 다음날 아침이 되자 집 주변을 둘러싼 자그마한 정원과 뒤쪽 텃밭이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몸을 움직이신다. 하루 종일 뙤약 별 아래서 우거진 잡초 뽑기를 시작하더니 오후에 내가 우연히 집을 둘러보는 상황이 되자 나를 놀라 자빠지게 했다. 내가 집에 이사 와서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대지 않던, 여름을 보내며 숲이 우거져 버린 텃밭과 마당을 맨땅으로 만들어 버리셨다.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기도 했거니와 몸이 아픈 아들이 게으름을 피우며 대충 살아가는 모습이 못내 못마땅했던 것이 분명했다. 다음날이 되어 나는 마지못해 마을에서 사용하는 공동 수레를 끌고 와 쌓인 잡풀을 외부의 공터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몇 수레 정도면 될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뽑아놓으신 검질은 산더미처럼 많았고 내 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고 말았다. 이 많은 걸 다 뽑으셨다니 노인의 대단함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날씨가 약간 좋아지는 기미가 보이는 날조차 며칠이 되지 않은 일주일을 보내고 말았다. 그 우울한 날들을 놓치랴 가장 일반적인 관광의 모양새를 갖추기로 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함덕을 들러 바다 산책을 하고 누구나 찾을 수 있는 델문도 카페에서 차와 빵을 먹으며 한껏 관광객 흉내를 내곤 했다. 하루가 지나면서 아버지는 우리의 생활패턴과 결정적인 차이를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아침을 거르는 게 기본이었고 아내 역시 야행성 취향인지라 아침식사 시간이 꽤나 늦는 편이다. 반면 아버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시고는 산책을 나가거나 다른 일을 시작하셨다. 노인다운 모습이었고 게으른 자식다운 대응이라고나 할까. 결국 매일 저녁에 다음날 아침에 아버지가 드실 식사를 준비해놓고 누나가 아침에 데워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는 일이 나를 비롯해 우리 식구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추석 연휴 기간이야 다른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했지만 연휴 전과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했고 떠나기 전날에는 하루 종일 비가 오면서 부녀는 집안에 갇혀 지내야 하는 시간을 갖었다. 누나는 TV를 보면서 새로운 한국문화에 익숙해질 기회를 맘껏 가질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TV에서도 뉴스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가장 놀라운 현상은 누나와 아버지에게 자유로운 wifi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불행히도 아버지가 기거하는 인전의 아파트에는 무료 wifi가 없었고 아버지는 핸드폰의 약정 데이터가 매우 적어 제대로 무엇하나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나 역시 스웨덴에서 쓰는 아이폰을 가지고 있기에, 로밍을 하고 오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하나 핸드폰을 사용하기 쉬운 상황이 아이 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대한민국 대부분의 가정들처럼 무료 와이파이가 흘러 다녔다. 아버지는 이번 기회에 유튜브를 맘껏 시청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누나 역시 와이파이를 통해 카톡이나 다른 다양한 소식을 편하게 접할 수 있게 됐다. 


그 덕에 아버지의 저녁시간은 그다지 심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기거하는 방에는 유튜브가 큰 소리로 틀어져 있어서 지나면서 어떤 뉴스를 듣고 계시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즐거운 유튜브 시청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단 한 가지 궁금한 건 어떤 유튜브를 보고 계시는가 였다. 아내와 나는 혹시 아버지가 태극기 부대들이 집중하는 극우 꼴통들의 프로그램에 심취해 있지 않나 걱정을 했지만 의외로 민주당 계열의 뉴스쇼를 보고 계셔서 뜻밖이라는 대화를 나누곤 했다.


매일 저녁 약간의 음주 시간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많은 술을 마실 수 없는 상황인지라 다행히 술값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4명 중에는 아내가 가장 애주가인 관계로 맥주 캔을 두어 개 정도 마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럴만한 취향도 능력도 아니었다. 어찌 됐든 아내는 이번 기회에 그동안 20여 년간 명절을 지내기 위해 찾았던 아버지 집에서 일어났던 어이없는 오해 혹은 서운한 점을 술기운을 통해 풀 수 있었다. 물론 누나는 그 기억을 별로 하지 못했지만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이야기는 잘하면 추억이 될 가능성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동안 품었던 한 가지 이야기를 통해 집안에서 입장을 분명히 하기로 했다. 우리 집은 누나는 스웨덴에 살고 있고 형은 미국에서 산다. 형과는 거의 통화를 하는 일이 없을뿐더러 형수와는 거의 등을 지고 연락을 하지 않은지 20여 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나는 형의 역할을 집안에서 해야 했고 세부적인 사항은 건너뛰더라도 형네 집과 관계는 소원해져 있었다. 이참에 나는 형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모르겠지만 형수와의 관계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으며 식구로 인정하지도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전했다. 정작 본인에게는 전달이 될 리 없지만 그 말을 하기까지 나 역시 2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놀랍고도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한 가지 나는 그동안 꽤나 궁금한 이야기 하나를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에게는 외국인 남편이 있고 내 아이와 동갑의 쌍둥이 형제가 있다. 마르크스와 알렉산더. 참으로 거창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좋으나 싫으나 그들의 반은 한국피가 섞였을 텐데 그들에게는 한국적 요소가 단 하나도 없다. 나는 그게 늘 궁금하기도 하고 불만이기도 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았느냐. 어느 정도 집에서 한국어를 가르쳤으면 지금과 같은 한류시대나 한국의 위상을 고려할 때 그들에게도 꽤나 유리한 구석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한국어 한마디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누나는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하더니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나 혼자를 건사하는 것도 힘든 시절이었어. 내 일에 바빴지. 영어도 아닌 스웨덴어를 하랴 학교를 다니면 직업을 찾으려 하니 가외로 아이들에게 무언가 가르칠 생각을 하지 못했어"

그 사실로 변명의 구실이 됐든 다른 이유가 있던 나는 여전히 그 점이 못내 아쉽다. 이기적으로 생각하면 내 아들에게 외사촌을 그것도 동갑이자 문화가 다른 2명의 친구를 줄 수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촌이 있다는 사실이 나름 괜찮은 인연이 될 수도 있었는데. 평생의 아쉬움으로 남는 일이다.


이제 한 명의 식구만 남았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 버스다. 아버지는 여전히 개를 집안에서 기르는 일에 낯설고 익숙해하지 않았으며 누나는 금세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버스가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개인지라 새로운 사람 두 명이 집에 계속 있으니 너무나 반가운지 모든 면에서 업되어있다. 놀아줄 상대가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문제는 밤에 누나가 거실에서 잠을 자는 동안 계속해서 놀아달라고 놀이기구를 물고 찾아가서는 계속 놀자고 졸라대는 통에 잠자는 시간이 늦어졌다. 결국 마지막에는 버스의 행동반경을 2층으로 국한시키고 잠자리에 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8일간은 시간이 길다면 꽤나 긴 시간인데 별로 한 것도 없이 시간이 금세 지나고 말았다. 명절이 끝나고 나는 다시 바쁘게 서귀포를 다녀오고 내부 회의에 병원 치료에 트럼펫 모임에 하루를 바쁘게 지내다 보니 마지막 저녁이 지나고 말았다. 아침에 힘겨운 기상을 하며 공항 갈 준비를 한다. 이미 아버지는 모든 준비를 다 마친 상태다. 아버지는 원래 그렇다. 절대 늦게 움직이거나 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공항에 2시간 전에는 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신다. 국제공항도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엇비슷하게 일찍 공항을 향해 떠났다. 날씨는 단 하루도 반짝이며 파란 하늘을 보여주지 않은 채 8일이 지나버리고 오히려 더 깊은 안개와 비바람을 계속해서 보내고 있어 비행기가 제시간에 뜰 수 있을는지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출발 게이트 앞에 서서 두 양반은 어찌 이별인사를 해야 할지 모른 채 짐을 들고 그냥 가고자 한다. 나는 두 사람을 세우고 한 명씩 포옹을 하며 조심해서 올라가라고 인사를 했다. 가족끼리 이별이기도 하지만 언제 다시 아버지를 이리 오래도록 내가 사는 집에 모실 수 있을는지 모를 일이고 누나 역시 스웨덴으로 돌아가면 역시 그 나라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 하는 상황이 이별의 깊이를 더 깊게 만들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누이는 제주를 떠났다. 오후 늦게 집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방사선 치료 후에 받았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매우 밝다. 불편한 장소에서 지내다 본인의 집에 도착하니 편안해진 탓이리라. 앞으로 아버지를 어찌해야 할까. 누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아무런 결론을 내지도 못했다. 시간이 답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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