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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k Feb 08. 2017

책임과 구원

<인도주의의 꽃, 국경 없는 의사회>를 읽고

 나는 읽고 싶은 책만 읽는다. 어느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도 늘 다음에 무엇을 읽을까 탐색한다. 책을 고르는 기준이야 워낙 다양해서 딱 부러지게 하나 내세울 순 없지만 어쨌든 내가 먼저 읽기로 결정한 책이 아니면 도통 읽어지질 않는다. 이유는 좋은 책을 읽고 싶어서다. 물론 내가 고른 책이 반드시 모두에게도 좋은 책은 아니다. 그래도 내가 읽었을 때 만족할 수 있는 책을 읽고 싶다. 그래서인지 누구에게 추천받거나 선물 받은 책을 선뜻 읽기가 어렵다. 이미 나만의 예약 독서 목록에는 몇 권이나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 책들을 먼저 읽다 보면 선물 받은 책은 잊어버릴 때가 많다.


 며칠 전 <인도주의의 꽃, 국경 없는 의사회>라는 책을 얻었다. 로스팔로스 NGO 단체에서 일하다가 한국에 돌아가는 한국인 한 명이 책 십여 권을 주었다. 애초에 예약목록에 있지도 않던 이 책을 읽게 된 건 순전히 종이책을 향한 갈망 때문이었다. 동티모르에서 책을 공수하는 방법은 느린 인터넷으로나마 전자책을 다운로드하여 보는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종이책이 무더기로 들어온 셈이니 읽지 않고는 못 배길 수밖에(어쩌면 진정한 독서가는 책이라는 물성을 숭배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중에서도 이 책을 고른 건 정말 아무 이유가 없다. 십여 권 중에 ‘국경 없는 의사회’와 관련된 책이 두 권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들인데, 같은 주제가 두 권이나 있다면 한 권을 재빨리 해치워야 할 것 같아서 고른 것뿐이다. 다시 말해 얼른 나만의 예약목록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사실 ‘국경 없는 의사회’라는 단체에 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읽고 나니 안 읽었다면 대단히 중요한 것을 놓칠 뻔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래서 독서 편식은 금물이다.


 <인도주의의 꽃, 국경 없는 의사회>는 저널리스트와 사진작가 두 명이 1996년 르완다에서  일어난 난민 사태에서 ‘국경 없는 의사회’가 펼친 구호 활동에 동행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묻고 답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국경 없는 의사회(내부에서는 Médecins Sans Frontières의 약자인 MSF로 불린다고 한다)’는 모두가 알다시피 국경을 초월하여 분쟁지역이나 재해지역에서 질병과 상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인도적 도움을 주는 국제구호기관이다. 당연하게도 ‘국경 없는 의사회’의 구성원은 의사만이 아니다. “‘국경 없는 의사회’로 불리는 MSF는 현대사회가 ‘의사’에게 준 권위에 편승한 부적절한 표현이다. 홍보상의 이유로 의사들이 조직이라고 천명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의사를 포함한 간호사, 수질 및 위생 전문가, 영양학 전문가, 병리학자, 자재 및 행정 담당 등등 수많은 인력이 MSF, 즉 ‘국경 없는 의사회’에서 일한다.


 당연히 재해와 전쟁 한가운데서 인도주의적 활동을 펼치는 이들이기에 고난과 위험은 이들이 받는 가장 큰 스트레스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MSF인들이 자신들을 영웅시하는 일을 가장 성가시게 여긴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영웅으로 생각하지만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취직이 안 돼서 지원한 사람도 있고 극단적이고 위험한 삶을 살고 싶어서 분쟁 현자에 뛰어드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단지 권태로운 삶이 지겨워서 온 사람들도 많다. 좀 뻔한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일반화하자면 현대 서구사회에서 점차 심화되고 있는 ‘소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MSF인들의 헌신과 (무모할 정도로 극단인) 용기가 값싸지는 건 아니다. 그들을 지옥과도 같은 현장으로 이끈 동기는 성인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지 몰라도, 그들이 바로 그 현장에서 보여주는 행동 자체는 추앙받아 마땅하다. 이를테면 MSF는 분쟁이나 재해 때문에 대규모의 난민이나 피해자가 발생하면 그 어떤 기관보다도 먼저 현장으로 달려간다고 한다. 어떤 정치적 고려도 하지 않고 본국에서 대기 중인 인력들을 급파한다. 일종의 응급 처치를 맡는 셈이다. 군사적 긴장과 학살의 공포에서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구호 식량, 의약품, 식수 등을 공급한다. 구호 활동을 하는 와중에 학살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살해되는 일도 일어난다고 한다. 이러한 위험과 고난을 감수하며 긴급한 조치를 우선 취하고 난 다음에는 뒤이어 파견된 다른 기관들에게 현장을 넘기고 떠난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을 부르는 긴급 전화를 기다리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영웅이라기보다는 아드레날린 중독자일지도 모른다. 많은 MSF인들이 현장을 떠났다가도 곧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그들 행동의 동기를 딱 한 마디로 간추려 말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그들의 인도주의적 활동의 동기가 소외에 맞선 저항이든 아드레날린 중독이든 중요치 않다. 분명한 점은 세계 곳곳에선 여전히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는, MSF인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MSF인)의 일은 분명하다. 구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식량, 물, 화장실, 그리고 의약품을 제공하는 것이다(106쪽).”


 그렇지만, 이렇게 의심의 여지없이 자기 자신을 구호 활동에 밀어 넣는 이들이라고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 책, <인도주의의 꽃, 국경 없는 의사회>는 찬양받아야 마땅한 그들의 활동 이면에 드리운, 아주 약간은 어두운 면을 들춰내기도 한다. MSF의 활동 자체가 분쟁 지역에서 세를 떨치는 군벌들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닌 최악의 딜레마는 우리가 파견돼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곳 군벌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난민을 위한 임시병원을 세우면 그들은 환자들을 보호한답시고 인간방패로 사용합니다. 군벌들에게 공식 지휘권을 부여하는 꼴이 되는 거지요(208쪽).” MSF인들이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난민들에게 각종 구호품 역시 군벌이 가로채기 일쑤다. 결국 인도주의 기관들의 구호 활동은 전쟁의 피폐함을 누그러뜨림으로써 오히려 전쟁을 연장하는 것 아닌가, 하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구호 활동을 전면 중지하고 모든 문제를 근본 차원에서만 해결하려고 시도할 수는 없다. 설사 그게 가능하다 해도, 근본적 해결을 기다리는 동안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해선 안 된다. 그래서, 혹은 그래도 MSF는 여전히 앞장선다. 그들 자신의 영웅적 면모 아래 드리워 있는 그늘을 충분히 알기에, 고뇌하되 ‘끝까지’ 간다. 


 어쩌면 MSF와 같이 국제구호활동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기관이야말로 분쟁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런 국제기구 혹은 개발협력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씁쓸하게 느껴지는 점이 하나 있다. 이런 책들은 거의 예외 없이 UN을 비판한다. UN을 향한 비판은 비단 최근만의 일이 아니다. UN이 과연 국제 분쟁 문제 해결을 향한 의지를 갖고나 있는지 의심하는 목소리가 많았고, 지금도 많다. 행동하는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아가며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본부’의 행정관료나 ‘선진국’ 정치인들은 어떤가. 신속하기는커녕 방향조차 잘못된 정책을 추진할 때도 많다. 물론 정책을 만드는 이들의 일에 활동가들처럼 목숨을 걸만한 요소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될 정도의 유능함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너무나 유능해서, 그리고 그 유능함이 우열을 가릴 수 없어서 “(UN) 회원국들은 이 모험에서 거둘 정치적 이득을 최대화하기 위해 옥신각신(227쪽)”하고 있는 걸까? 국제정치학이야 어떻든 죽어가는 사람들을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게 MSF의 정신이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국제정치의 역할을 기대하면서도 무능한 그들을 대신하여 현장으로 달려 나갈 것이다.


 ‘지구촌’이라는 말은 너무 진부해져서 이제 잘 쓰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지구촌이라는 낱말이 함의하는 바는 여전히 유효하다. 작은 마을일수록 구성원들의 사소한 행동이라도 서로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처럼 점점 작아지는 국제사회 역시 밀접한 인과 사슬에 한데 묶여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아직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굶는 사람이 천지인데’라는 말로 세계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책임감을 애써 부정하고 있다. 대중의 인식이 이렇기에 ‘빈곤 포르노’를 연출해서라도 기금을 모아야 하는 절박함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둘 다 건강하지 못한 태도다. 한쪽은 문제를 도외시하고 한쪽은 문제를 과장할뿐더러 왜곡한다. ‘국경 없는 의사회’ 역시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기금과 재정의 문제다. 결국 이런 구호 기관들이 현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난민과 빈민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시민의 관심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시민의 관심은 상호 책임의 인식에서 비롯되리라.


 시민의 상호 책임이란 이런 것이다. 지구에 발 딛고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환경 문제, 국제 분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책임이 있다. 이는 미국만의 책임도 아니요, 서구 선진국만의 책임도 아니다. 분쟁 지역의 자원이 포함된 제품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거나 탄소를 조금이라도 배출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지구 상 모든 환경 및 분쟁 문제에 영향을 끼쳤다. 광합성하는 식물처럼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자신이 배출한 이산화탄소마저도 다시 산소로 환원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닌 다음에야 이 상호 책임의 사슬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지구상 모든 사람이 원조 현장에 나설 순 없다. 적어도 상호 책임을 인식하고 그에 마땅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여기엔 MSF와 같은 활동을 후원함과 동시에 감시, 비판하는 일까지 포함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돌보고 서로를 구원해야 한다. 그럼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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