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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k Aug 19. 2016

[동티모르 이야기] 모두의 영화, 모두의 조연

여섯 살 사이먼에게, 서른 살 나에게

사이먼을 아는가? 당연히 모를 것이다. 사이먼은 우리 집 맞은편에 있는 동티모르 로스팔로스 엠마누엘 교회 부설 클리닉을 운영하는 미국인 목사 톰과 의사 모니카의 아들이다. 이제 여섯 살이 되었으며, 당연히도 영어를 무척 잘한다. 내가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하자 열심히 연습하면 된다고 조언해주었다. 그 나잇대 소년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똑부러짐이 매력인 친구다. 


왜 사이먼 이야기를 꺼내냐고? 나는 6년 전 사이먼이 태어났던 집에서 살고 있다. 사이먼의 가족들은 사이먼이 태어날 당시 내가 지금 사는 집에서 살았단다. 그런데 누군가에게서 저 집이 자신이 태어난 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오늘 사이먼이 우리 집을 찾아와서는 자기가 태어난 집을 구경해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표정을 보았다. 이 순간은 ‘사이먼의 보이후드’라는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 하나로 기록되어야 하리라. 자신이 태어난 집을 직접 보고 있는 여섯 살 사이먼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나는 모른다. 그러나 네가 태어난 이 집이 기억 나더냐는 아빠의 농담 섞인 질문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던 순간만큼은 그의 일생에 길이 기억될 것이다. 


그런 사이먼을 보며 영화 <보이후드>가 떠올랐다. 지금은 주인공의 이름조차 잊어버렸다. 12년 동안 배우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여 촬영을 했다는 영화다. 독특한 촬영 방법 덕에 현실의 시간은 영화에서도 그대로 흘렀다.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1년이 흐르면 그건 단지 연출이 아니라 정말로 1년이 지난 것이었다. 특히 어린 배우들에게 시간의 흐름이 해주는 자연 그대로의 분장은 그 효과가 더욱 컸다. <보이후드>의 여섯 살짜리 주인공은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인생을 고민하는 대학 신입생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보이후드>가 특별하고도 대단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아니다. 그저 유년 시절 누구에게나 일어났을 법한 일들을 모아놓은 지루한 영화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각자 최소한 영화 한 편은 지니고 있는 셈이다. 유년시절이라는, 아주 가끔 신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영화 말이다. 


내게도 그런 영화가 한 편 있다. 아니 몇 편 더 있다. 개 중엔 편집을 달리해서 코메디 영화로 뽑아낼 장면들도 있고 어떤 장면들로는 수면제 역할을 할 예술영화도 만들 수 있다. 어쨌든 <보이후드>처럼 시간은 실제로 흘렀고 나는 실제로 나이를 먹었다. 딱 그 나이만큼만 살아왔다. 더 성숙해지기도 했지만 더 나빠진 것도 많다.되돌리고 싶은 건 많지만 되돌릴 수 있는 건 정말이지 단 하나도 없다. 얻기도 하고 놓치기도 하면서 나만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다행히도 이 영화엔 주인공(나)을 능가하는 조연들이 있었다. 딱 한 장면에만 나온 이들도 있고 지금껏 빠지지 않고 매년 나온 사람들도 있다. 혹은 앞으로 평생에 걸쳐 나올 이들도 있을 테다. 따지고 보면 이 영화가 온전히 나만의 영화가 맞는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등장하는 하나의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여섯 살 사이먼의 <보이후드>는 이제 시작일 거다. 자신이 태어났던 집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소년의 모습만큼 이 영화의 첫 시작으로 적절하고 아름다운 장면은 없으리라. 맞은편에 사는 낯선 한국인 남자는 특별할 것도 없는 조연에 그치겠지만 그에겐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정말 좋은 조연들이 나타날 테다. 내게도 그랬듯 말이다. 한 편의 영화에서 여섯 살 소년이 실제로 열여덟 살 청년이 되어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보는 건 실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실은 우리 모두가 그렇다. 우리 모두 여섯 살과 열여덟 살을 거치지 않았던가. 결국엔 지금에 이르렀다. 그 우여곡절을 어떻게 다 말하랴. 그래서 사이먼에게 말하고 싶다. 여섯 살 사이먼, 너 혼자만의 영화가 아니니 힘내길. 우리 모두 서로의 조연이니. 그리고 삶은 늘 기적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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