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한 개인은 주장의 존재입니다. 주장하는 바가 없이는 자기 삶도 없지요. 누구나 주장을 하며 삽니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굳이 말을 만들자면 ‘주장력’쯤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 게 내면에 강력히 형성된 개인은 타자들과의 불화를 가히 운명적으로 반복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옳다’(실은 ‘내가 옳아야만 한다’에 더 가깝지만)라는 명제는 일종의 흉기로 쓰이기도 합니다. 쳐내고 자르고 찌르고 바르고 쑤시고 후벼서 끝내 나의 옳음을 각인시키고 마는 것이지요. 이토록 겁박하듯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관철시키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틀려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 그것이지요. 이건 심리적 발화일 수도 있고(‘지구는 나를 중심으로 돈다’론자들), 현실의 특정 상황에 기인한 방어기제일 수도 있습니다. 후자 쪽에 치중된 이들의 주장은 대체로 ‘거짓’입니다. 달리 말해 은폐입니다. 내가 틀리면 치명적인 명예 훼손을 당한다, 그러므로 내가 옳아야 한다, 내가 옳도록 만들어야 한다, ······.
추함을 깊은 어둠 속에 묻어두는 건 요즘 트렌드가 아닙니다. 지금은 가림막을 씌워 당당히 바깥에 둡니다. 가림막은 두텁고 화려할수록 좋지요. 근사한 가죽 쇼파 같은 추함입니다. <헤이트풀8>의 한 장면을 빌리면, 누군가가 그 쇼파에 앉아 있다 총살당했습니다. 시체는 신속히 치워졌지만, 쇼파 등받이의 선명한 핏자국은 지워지지 않았지요. 그래서 가죽 커버가 덧대졌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었다는 듯, 쇼파는 가만히 놓여 있습니다. 예쁜 쇼파 가죽을 구태여 벗겨내려는 사람은 드뭅니다. 혼자 벗기기에도 벅찹니다. 그냥 그대로, 쇼파는 언제까지고 놓여 있습니다.
진실엔 형용사가 없습니다. 기자들은 기사에 형용사를 가급적 배제하지요. 기자라는 직업은 객관성과 주관성의 무게중심 딜레마를 집요하게 고민할 것 같습니다. 진실엔 형용사가 없지만, 기자에겐 있을 테니까요. 어떤 사실을 현상으로 받아들인 기자의 내면에는 당연히 특정한 형용사가 형성될 것입니다. 이 형용사를 제거해내는 과정이 진실에 가 닿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 길이 취재이고, 탐사보도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탐사보도는 기자 자신의 성긴 주장, 그러니까 ‘형용사’를 소멸시켜 ‘기사’라는 객관화된 형태의 성숙한 주장으로 빚는 일이 아닐까요. 최초의 형용사는 편견이었을 수도 있고, 진실의 원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걸 확인하는 방법은 직접 보고 듣는 수밖에는 없겠지요. 확신이 검증되기까지, 탐사보도는 지난한 여정일 것입니다.
실화에 근거한 <스포트라이트>는 주동인물 한 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지 않습니다. 어느 지역 일간지의 탐사보도팀 일원 전체가 마치 한 주동인물처럼 극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개개인의 내면이라든지 구성원 간 갈등양상도 깊이 다루지 않습니다. 등장인물 한 사람마다의 내밀한 사정은 전체 극 안에서 엄격히 통제되고 있습니다. 탐사보도팀 기자들 각자의 ‘형용사’가 의도적으로 제거된 것처럼 보입니다. 기사처럼 작성된 각본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거대 종교권력이 십여 년에 걸쳐 보존해온 장엄한 ‘가죽 쇼파’를 해체하는 바가 이 영화의 중심사건입니다. 가죽을 뜯어낸 자리에는, 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성직자들의 상습적 성범죄가 얼룩져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사실’입니다. 탐사보도팀은 이 사실만을 밝혀내는 데서 머무르지 않으려 합니다. 이 지점에서 아직 제 형용사를 말끔히 제거하지 못한 마이크 레젠데스 기자(마크 러팔로 분)는 얼른 보도 안 하고 뭐 하는 거냐고 팀장 월터 로빈슨(마이클 키튼 분)에게 대들기도 합니다. 나쁜 성직자 놈들을 빨리 족치자는 분노의 주장일 것이고, 지금이라도 당장 특종 보도 건수를 올리자는 사욕일지도 모르지요. 영화는 이런 소소한 갈등에 긴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갈등은 금세 매듭되고, 탐사보도팀은 사실 너머의 현상으로 나아갑니다. 성직자들의 성범죄가 한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세계적으로, 그리고 관례적으로 저질러져왔음을 알아낸 것입니다. 다편의 기획기사 형태로 뉴스는 보도되고, 수치심에 조용히 지낸 피해자들이 언론사 사무실로 추가 피해 사례를 제보하는 상황이 이어집니다. 안락하게만 보였던 종교권력이라는 가죽 쇼파는, 이제 까뒤집어진 불편한 의자로 휑뎅그레 대중 앞에 놓여 있습니다. 언론의 ‘현상’ 보도가, 또 다른 숨은 ‘현상’을 발굴해낸 것입니다.
<스포트라이트>는 자기 객관화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써 자기 ‘주장’의 객관화가 얼마나 큰 파급력을 지닐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자기’라는 자리에는 개개인, 언론사, 기업, 정부 등 갖가지 대상이 대입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제언은 곱씹을수록 공허하고 아득합니다. 어떻게 그리 할 것인가요. 일면 위험한 발상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세계에는 통수권자와 자본가가 존재합니다. 실체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개인은 무엇 혹은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거나 직간접적으로 억압을 경험합니다. 이런 개개인 전부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계층 구조는 보다 견고해질 것이며 가죽 쇼파들은 보다 튼튼한 형태로 발전해나가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급진적으로, 그리고 타성적으로 희망을 걸어볼 대상은 언론입니다. 언론이 실천하는 ‘주장의 객관화’가 지속성과 선사례를 획득한다면, 대중 개개인의 사회적 자기개념은 어떤 형태로든 도약할 것이라는 희망 말입니다. 혹은 반대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나’들이 자기 객관화를 넘어 주장의 객관화의 단계로 진입한다면 내러티브 저널리즘이나 탐사 저널리즘 같은 보도 방식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된다면, 형용사로 치장된 가죽 쇼파에 함부로 앉는 일이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요.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