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아닌, 조력자에 대한 믿음으로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by 임재훈 NOWer

영웅은 없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구원자(savior)로써 기능하는 모습은 이미 철 지난 트렌드입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1990년대 초반까지가 제철이었죠. 아놀드 슈워제네거, 실베스터 스탤론, 장 클로드 반담, 스티븐 시걸 등 이른바 ‘액션 스타’들은 당시 박스오피스의 총아들입니다. 근육과 격투 능력으로 다져진 신체적 우월성, 위기 상황을 돌파해나가는 비범한 추진력,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애국심(영웅심)이야말로 그들의 캐릭터를 이루는 주요한 요소입니다. 이러한 원톱 액션 활극 시대는 1990년대 중후반 <매트릭스> 류의 ‘고뇌하는 주인공’을 표방한 액션 영화의 등장과 함께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제이슨 본 시리즈(<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 2000년대 007 시리즈(<카지노 로얄>, <퀀텀 오브 솔러스>, <스카이폴>)는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대표작들이죠. 이러한 트렌드는 슈퍼히어로 무비들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는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필두로 급속히 번진 ‘다크 코드’가 그것입니다. 지극히 경쾌했던 <아이언맨>은 3편에 이르러 토니 스타크의 정체성 고민을 다루었고,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스티브 로저스 대위는 자기 존재에 대한 갈등 때문에 제대를 고려하기까지 합니다. 기존 체제와 가치에 대한 불신, 그럼에도 고수해야만 하는 어떤 책무 사이에서의 갈등. 바야흐로 할리우드 액션영화 속 주인공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요즘 액션영화에는 ‘영웅’이 없습니다. 뒤돌아보지 않는 자, 머뭇거리지 않는 자, 전진하는 자, 타협하지 않는 자, 그리하여 추앙받는 자, …. 영웅의 전형성이란 대체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2000년대 액션영화에는 이런 주인공을 보기 어렵습니다. 계속 뒤돌아보고, 머뭇거리고,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적절히 타협할 줄 알고, 심지어 대중의 거센 비난까지 감내해야 하는 캐릭터들이 대부분입니다. 주인공의 정서가 이렇듯 불안정하다 보니 조력자 캐릭터가 부각되는 것이 당연지사. 70∙80∙90 시절의 원톱 액션 활극은 끝나고, 이제는 팀워크와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가 전성기를 맞은 것입니다. 톰 크루즈의 개인기 열전에서 다시금 팀플레이로 포커스를 돌린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 마블 슈퍼히어로들을 집결시킨 <어벤져스> 같은 기획이 대성공을 거둘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하죠. 이제 대중은 유일한 구원자를 그저 희구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성으로부터, 지금 내 곁에 실재하는 조력자와 협력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누군가의 조력자가 되어주고 싶은 능동성의 단계로 거듭난 것이 아닐까요. 맛집 소개 프로그램이 지고, 레시피 소개 프로그램이 뜨는 것은 그러고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외부의 절대적 미식의 대상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 현재 내가 지닌 재료들을 활용하여 지금 당장 요리를 만들어 먹어보려는 능동성. 각종 레시피 소개 프로그램들에 출연하며 급부상한 스타 쉐프들은, 직접 맛 좋은 요리를 해보고 싶은 대중의 욕망이 불러들인 충실한 조력자 캐릭터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구원자’보다 고결한 현실의 ‘조력자’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주동인물은 맥스(톰 하디 분)가 아니라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 분)입니다. 핵전쟁으로 황폐화된 세계. 인류는 물과 기름을 쟁탈하기 위해 서로를 살상하며 살아갑니다. 자본주의에서 물과 기름의 시대로 격변한 세상. 물과 기름을 소유한 자가 곧 ‘구원자’로 숭앙받고, 그렇지 못한 자는 스캐빈저(scavenger)로 남습니다. 구조적으로는 자본주의와 똑같죠. 평범한 소시민들이 자본가들에게 의지해 돈(월급)을 벌듯이, 헐벗은 스캐빈저들은 물과 기름을 가진 자에게 엎드려 구원을 바랍니다. 물은 생명이며, 기름은 이동성의 상징입니다. 물이 있어야 살 수 있고, 기름이 있어야 이동할 수 있죠. 둘 다 없는 사람들은 살 수도 없고 이동할 수도 없습니다. 속박되어 죽어가는 수밖에는 없죠. 이런 현실에서 퓨리오사는 자신의 고향―녹색 땅(green place)을 새로운 구원으로 믿으며 체제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합니다.


01.jpe ⓒ daum movie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그녀의 지난한 여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온통 모래뿐인 황색의 세계에서 초록이라는 색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데, 그 선명함 때문에 황색과 녹색 사이의 아득함은 더욱 깊고 까마득합니다. 초록을 향해 우직하게 전진하는 그녀의 목적성은 숭고해 보이면서도 일면 안타깝게 그려집니다. 현실 너머의 희망을 찾아 떠나는 퓨리오사의 목표 의식은 허무주의자 맥스에 의해 제동이 걸리고, 그리하여 현실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이 영화는 멜 깁슨이 주연한 <매드 맥스> 시리즈와 어느 정도 이야기의 궤를 같이하는데, 맥스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지 못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설정이 그것입니다. 원래 경찰이었던 맥스는 악당들에게 아내와 자식을 잃었고, 또한 그에게 도움을 청한 무고한 시민들을 구하지 못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실패한 구원자’인 것이죠. 큰 상처로 인한 허무주의, 그럼에도 천성적으로 남을 도우려 하는 책임감. 맥스는 이런 상반된 캐릭터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그에게는 남다른 재능이 생겼는데, 바로 현실 감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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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희망(구원)이라 믿었던 녹색 땅이 실재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자 퓨리오사는 절규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인정하지 않고 계속 전진하려 하죠. 바이크를 타고 120여 일을 달려가면 또 다른 구원의 땅이 나올 거라 믿으며 다시 여정을 시작하려 합니다. 이때 맥스가 그녀에게 제안하는 바는, 그녀가 탈출해 나온 지옥 같은 장소로 다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체제로부터 겨우 탈출했는데 다시 체제로 회귀하라니? 퓨리오사는 당황하지만 맥스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체제로의 회귀는 ‘체제 전복’을 전제로 한 것이니까요. 절대군주인 임모르탄(Hugh Keays-Byrne 분)을 넘어서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보라는 혁명의 제스쳐입니다. 물과 기름을 소유한 채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임모르탄은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에게 신성을 부여했습니다. 자신은 불멸의 존재(임모르탈, immortal)이며, 자신을 숭배하는 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겠다는 구원의 공약을 내세워서 말입니다. 그의 부하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다 바쳐서 전투에 임하는데, 이는 마치 광신도들의 자살 테러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맥스가 퓨리오사에게 다시 임모르탄의 세계로 돌아갈 것을 권고했을 때, 그것은 임모르탄이라는 지배자로부터 비롯된 모든 맹목과 맹신의 시스템에 맞서라는 제언입니다. 희망이 ‘현실’이 아닌 곳(이를테면 천국)에 있다면 그건 공허할 뿐이고, 현실에의 희망을 복원하는 액션의 시작은 바로 잘못된 구조를 바꾸는 것임을 맥스는 가르쳐준 셈이죠. f(x)라는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f(y)와 f(z)가 반복될 테고, x 대신 y가 오든 z가 오든 똑같은 결과값이 나올 것임을 맥스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소중한 사람들을 처참히 잃었던 과거의 체험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경찰로서 제아무리 정의를 수호한다 해도, 그것은 잘라도 잘라도 언젠가 다시 자라는 잡초 제거와 다름없는 상황이며, 이걸 타개하는 유일한 방법은 잡초가 자라게끔 되어 있는 구조 자체를 뒤엎는 수밖에는 없음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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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영화는 현실에서의 초월적 사랑이, 머나먼 구원(자)에 대한 맹신보다 고귀하다고 역설합니다. 임모르탄을 신격화하던 맹신도 눅스(니콜라스 홀트 분)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주는 케페이블(Riley Keough 분)을 만나면서 점차 주체성을 갖게 되고, 자신의 정서를 지배하던 임모르탄과 대등하게 맞서는 성숙을 맞이합니다. ‘천국’(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던 미숙한 눅스는, 비로소 사랑을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하는(희생하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당당한 주체로 거듭나며 뭉클한 감동을 선사히죠. 눅스는 병약하고 추하며, 케페이블은 건강하고 아름다운데, 이 둘의 초월적 사랑은 ‘분노의 도로(fury road)’와도 같은 ‘미친(mad)’ 세상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도록 지탱하는 단 하나의 고결함처럼 그려집니다. 케페이블이라는 이름처럼, 초월적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capable) 한다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이죠. 눅스처럼 지독히도 타성에 세뇌당한 인간도, 진정한 사랑으로 충분히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자애로운 시선까지 이 영화는 지닌 것입니다.




맥스는 끝내 조력자로 남습니다. 임모르탄을 궤멸한 인물은 맥스가 아니라 퓨리오사였으며, 그녀를 무사히 ‘현실’로 회귀시켜 새로운 영웅으로 추대받도록 도운 뒤 맥스는 조용히 등을 돌려 자신의 길을 갑니다. 엔딩 장면을 떠올려보죠. 맥스는 퓨리오사를 올려다보고, 퓨리오사는 맥스를 내려다봅니다. 두 사람의 올려다봄과 내려다봄은 우열의 격차가 아니라 우애의 시선입니다. 조력자는 아래에, 영웅은 위에 있지만, 세계의 구성에 기여하는 두 존재의 가치는 동등합니다. 영화 속 눅스의 마지막 대사처럼, 지금 내 곁의 소중한 조력자들을 언제나 ‘증명(witness)’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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