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이 절망을 보여주려 한 이유

<작전명 발키리>, 그리고 세월호

by 임재훈 NOWer

실화를 영화로 재현한다는 것은 꽤나 큰 모험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분명한 결말이 나버린 상태이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이지요. 끝이 정해진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니. 스토리텔러로서는 대단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이야기만큼은 꼭 당신들에게 해주고 싶다, 라는 모티브는 왜 생긴 걸까요.

<작전명 발키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갖은 수를 썼던 몇몇 독일 군인들과 그 측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중심이 되는 인물은 클라우즈 폰 슈타펜버그 대령입니다. 톰 크루즈가 이 실존인물을 연기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히틀러는 자살했습니다. 십여 차례의 암살 시도들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그 속에서도 독재자는 끝끝내 살아남아 결국 자기 손으로 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살아 있던 시간들도 그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히틀러라는 남자는 삶과 죽음의 영역 모두를 지배하려 했던, 문자 그대로 독.재.자.였습니다. 핵폭발 이후의 버섯구름처럼, 지배권에 대한 그의 욕망은 폭발하기만 하면 압도적인 범위와 파괴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뒤덮었던 듯싶습니다. 버섯구름이란 단지 몇 사람들의 손짓만으로 쉽게 걷히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터지고 나면,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그 구름 속에 갇혀 있어야 합니다.




<작전명 발키리>가 그려낸 그 구름의 실체란, 영화의 오프닝 장면에서 거대한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깃발과 함께 시끄럽게 울려 퍼지던 나치 당원들의 서약(an Oath)입니다. 목숨을 바쳐 히틀러에게 충성하겠다는 내용이지요. 히틀러 암살을 도모하는 비밀 결사대가 새 조직원으로 슈타펜버그를 불러들였을 때, 대령은 대원들에게 묻습니다. “히틀러가 죽은 다음엔 어떻게 할 거요?” 이어 그는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발언을 합니다. “군인들이 맹세한 서약은 히틀러가 죽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소.” 슈타펜버그 대령은 독일 전역에 독버섯처럼 피어나 있던 ‘구름’의 실체를 볼 줄 알았던 인물입니다. 제거해야 할 대상은 독재자 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퍼뜨린 욕망의 구름, 즉 ‘서약’인 것이지요.서약을 무효화시키려면, 그것의 전도사들을 꺾어내야만 합니다. 히틀러는 물론이고, 동생인 히믈러와 그 주변인들까지 처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잡초를 뽑아낸 뒤, 마무리 단계로 잔디밭 곳곳에 제초제를 뿌리듯 말입니다. 이런 핵심을 슈타펜버그는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지배 구조란 그런 게 아닐까요. 지배 계층이 허물어지는 순간, 피지배 계층은 어찌 할 바를 모르게 되는 것. 지배자의 지배에 강력하게 길들여진 피지배자는, 한 지배자가 소멸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지배자의 지배를 기다리게 되는 법입니다. 이런 메카니즘이 영화 속에서 매우 직접적으로 묘사되는데, 통신실 장면이 그렇습니다. 슈타펜버그가 히틀러 암살을 기도하며 폭탄을 터뜨린 후, 그의 결사 조직은 히틀러의 사망을 기정사실화하는 공문을 독일 내 전 부대에 급전합니다. 그런데 나치당 충성파에서는 히틀러는 아직 건재하며, 암살자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명령문을 송신하지요. 서로 다른 양 진영의 메시지를 받은 통신실 담당관은 갈등합니다. 어느 쪽을 내보내야 이로울 것인가. 히틀러가 죽었다..? 히틀러는 살아 있다..? 대단히 시니컬한 장면 아닌가요. 결국 대중이란, 위기의 순간에 이쪽과 저쪽이라는 타성의 세계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약자인 걸까요. 영화에서 한가롭게 수영이나 하고 이발에 꽤 공을 들이던 한량 미남 장교의 대사 역시 가관입니다. “어느 쪽에 서야 하는지 말하기가 어렵군(What I can’t say is which side we’re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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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펜버그의 가장 큰 실책은 우선 히틀러 암살에 실패했다는 점이고, 또 다른 과실은 뭇 군인들의 ‘가벼운’ 천성을 간과했다는 것입니다. 블록 하나를 빼내면 성은 와르르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으나, 애초부터 거기에 성은 없었습니다. 두텁고 견고해 보이던 블록들은 실은 허상이었던 것이지요. 히틀러의 욕망이 압도적인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하급 군인들이 전적으로 복종했기 때문입니다. 상명하복의 엔진으로 군대라는 조직은 가동됩니다.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라는 군인들의 문장에서 ‘상관’이라는 키워드는 유동적입니다. 상관이 바뀌면, 그때까지의 서약은 무효화되고 새로운 버전으로 갱신됩니다. 슈타펜버그 대령은 히틀러의 욕망보다, 무시무시한 서약보다, 더 깊은 단계로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피지배 계층의 생존 본능인 ‘줄 서기’ 말입니다. 모두가 슈타펜버그와 같은 액티비스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슈타펜버그 대령은 자기가 믿는 바를 매우 터프하게 긍정하고, 그 신념에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일직선으로 행동할 수 있는 남자입니다. 이런 비범한 리더십이 탄력을 받으려면,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강력한 팔로어십이 필요하겠지요. 이쪽과 저쪽의 갈림길에서 두리번거리지 않는, 온전히 ‘나의 신념’만으로도 충분히 내비게이션이 가능한 인격체들이 많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슈타펜버그 대령과 그 일원들의 실패 요인은, 그들과 뜻을 함께할 ‘나’들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를 죽여도, 히믈러를 죽여도, 서약을 죽여도, ‘나’들이 없다면 또 다른 히틀러와 히믈러와 서약이 재생될 테니까요. 서약 자체가 이미 ‘히틀러에게 나를 바친다’는 주제의식으로 가득하기에, 서약을 받든 대다수의 군인들은 ‘나’가 없는 존재들인 셈입니다. ‘나’가 없는 사람들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결코 스스로 판단하거나 행동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반드시 멘토―이 경우엔 히틀러―가 강권하는 행동강령에 의해서만 그들은 반응합니다. 자체적으로 사고하여 움직이는 프로세스가 단 한 번도 작동된 적이 없는 부류가 세상에는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슈타펜버그는 군인이 아닌 일반 대중을 포섭해야 했을까요?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길거리 총살이 대낮에 버젓이 집행되고, 한 무리의 발가벗겨진 사람들이 가스실에 감금되어 질식사하는 현실 속에서 ‘나’들이 존재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걸 기대하는 것도 어쩌면 매우 폭력적인 인식일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슈타펜버그 대령은 일반 서민이 아니라 명백히 집행자이자 지휘권자의 위치였으니, 그런 안전망으로 말미암아 자신만의 ‘나’를 정립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절망입니다.

그럼에도 이 절망을 보여주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결말이 뻔히 다 알려진 이야기를, 해피엔딩도 아닌 이 비극을 굳이 왜 꺼내든 것인가요.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접근해보지요. ‘끝’은 모두가 압니다. 바뀔 수 없습니다. 그대로 놓아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러가 손질하고 칼질할 수 있는 부분은 ‘과정’입니다. 이때, 불변의 새드엔딩이라는 점은 장애가 아닌 축복으로 변모합니다. 이야기가 비극으로 치달을수록, 그 과정은 더욱 비장하고 치열해지니까요. 해피엔딩을 꿈꿨던 등장인물들의 모든 행동과 대사와 표정 들은 가공할 만한 진정성으로 관객들의 정서를 후비고 들어올 것이고, 따라서 기.억.될. 것.입. 니. 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단원고 학생이 서서히 침몰 중인 세월호 선실 안에서 친구들을 찍은 휴대폰 영상 복원 파일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대부분 웃고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과자를 먹고 있기도 했습니다. 하기야, 그런 크고 튼튼해 보이는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은―그로 인해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아직 20년도 채 살지 않은 아이들에게 매우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 한 여학생이 아빠엄마에게 미안하다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자 밝은 표정의 다른 여학생이 장난스럽게 핀잔을 줍니다. “살 건데 무슨 개소리야. 살아서 보자.” 그 다음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살아서 본 아이들도 있고, 그리하지 못한 채로 본 아이들도 있으며, 끝내 바닷속으로 몸을 감춘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 영상을 촬영한 여학생의 이름 앞에 지금은 ‘희생자’라는 끔찍한 단어가 따라다닙니다. 이제는 결코 바뀌지 않고 모두가 다 아는 ‘끝’이기에, 그 끝으로 가고 있던 당사자들의 마지막 영상은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기우는 배 안에서 깔깔대고 군것질을 하고 울고 아빠엄마를 부르던 그 모든 장면들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순간의 ‘과정’들이었으니까요.

아마도 제가 한국인 관객이라 그럴지 모르겠는데, <작전명 발키리>를 다시 보는 내내 세월호가 떠올랐습니다. 슈타펜버그 대령과 그 동료들이 결국 히틀러 암살에 실패하여 한밤중에 한 사람 한 사람씩 총살을 당하리라는 ‘끝’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히틀러 사망을 기정사실화하고 신속하게 반나치 세력들을 호집하며 뿌듯해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꾸만 세월호 영상 속 아이들이 떠올랐습니다. 새드엔딩임을 아는 채로 끝까지 봐야 하는 일이란 정말이지 괴롭습니다. 그럼에도 봐야만 합니다. 그들이 비극의 끝으로 가는 동안 ‘어떻게 살아 있었는지’, 그 과정을 생생히 기억해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그 과정을 잊는다면 끝도 잊게 됩니다. 아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릅니다. ‘1 더하기 1은 2이다’는 아는 것이고, ‘그 2는 단순히 1과 1이 더해진 값이 아니라 수많은 0.01들이 모여 합쳐진 결과였다’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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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는 “히틀러의 독일(Hitler's Germany)”이라는 대사가 몇 차례 반복된다. 히틀러의 소유격으로 표현되던 이 나라는 아주 느린 속도로 침몰 중이던 전함이었습니다. 독재자 히틀러로부터 근원한 ‘서약’의 플러그들이 나치 당원과 군인 들의 뇌에 꽂혀 있었고, 그들의 과신과 맹신과 몰아가 비대해질수록 독일은 기울었던 것입니다. 그 기울기가 한쪽 끝에선 상승처럼 보였고, 다른 끝에선 추락 같았을 것입니다. 시소의 양 끝처럼 말입니다. 슈타펜버그는 딱 그 중간 지점에 있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요. 시소의 치솟은 쪽 무게를 줄여 다시금 평형을 맞추려 했던. 다시 말해, 그는 독일이라는 거대한 배 안에서 ‘살고자 했던’, 그리하여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려 했던 사람인 것입니다.

굳이 이 절망을 보여주려 한 이유, 봐야 하는 이유는 간명합니다.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기억해야만 우리가 온전히 살 수 있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에서 세월호는 여전히 기울어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다만, 어딘가 한쪽의 무게중심이 지금 맞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쪽은 비정상적으로 솟구쳐 있고, 또 다른 쪽은 터무니없이 고꾸라져 천대받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각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시소의 형국입니다. 우리가 어디쯤에 걸터앉아 있느냐에 따라 이 시소가 평형을 맞출 수도 완전히 엎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겠지요. 적어도 영화 속 슈타펜버그 대령은 그걸 정확히 알았으며, 아는 대로 행동하다 살았고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의 무게를 맞춰야 할 방향은 어디인가. 잔뜩 기울어진 채로 고꾸라져 있는 생각들은 없는가. 미처 구조하지 못한 순수한 가치들이 내면의 깊은 심연 속으로 실종되지는 않았는가. 그 잃어버린 순결함을 우리는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색했었나. 머뭇거리는 사이, 지금 아름다운 생각 하나가 희생되었습니다.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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