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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훈 NOWer Nov 26. 2024

엽편소설 「O2R」

미스터리 커뮤니티 O2R(Out Of Reality), 그리고 외계인들


살기는 싫은데 죽고 싶지는 않다. 이 표현은 비겁하다. 나는 살고 싶다, 힘들지만 정말로 잘 살아 보고 싶다, 라는 직관적 문장을 우회한 비굴스러운 비문이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생각한다 대신 생각되어진다, 보인다 말고 보여진다 식의 괴상한 수동태 종결어미를 선호하는 정치판 말버릇과도 비슷하다. 능동태 발언은 명예 훼손, 허위 사실 유포 등으로 고소·고발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위정자들의 해묵은 해명이다. 괜히 나서서 입 털기는 싫은데 입바른 소리를 안 할 수는 없을 때, 그들은 한다를 된다로, 그것도 불안해 되어진다로 겹겹이 말에 수동태를 바른다. 나는 정치인들한테서 처세를 배웠다.


현실이 죽을 만큼 싫었다. 그러나 세상과 하직할 마음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비현실에 탐닉했다. 믿거나 말거나 류의 미스터리, 과학으로 규명되지 않는 초자연 현상. 이것들을 나는 현실의 수동태 버전으로 받아들였다. 아이두(I do)의 생활담이 아닌 비돈바이(be done by)의 기담들. 내 삶과는 무관한 이계의 썰들. 비현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편안했다. 비현실은 나의 안전 가옥이었다. 내 취향은 외계인 목격담이었다. 외계, 바깥 세계, 세계의 바깥. 더할 나위 없는 수동태. 우주 괴담 마니아들이 결국 미국 네바다 주의 51구역을 찾아가게 되듯, 나는 O2R(Out Of Reality)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내건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첫 정모 때 세 명이던 회원이 어느덧 다섯 명으로 늘었다. 아, 정모라는 용어는 알맞지 않으려나. 정기 모임이 맞기는 하나 모임의 성사 과정은 매번 비정기적이니까. 게다가 커뮤니티라면 으례 갖출 법한 정례화된 율칙조차 없다. 가령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상호 소통은 경어체를 유지한다, 중고품 거래와 같은 매매 행위를 금한다, 회원 간 갈라치기 기제로 작용할 수 있는 화젯거리(정치, 종교, 성 인지 감수성 따위)는 금기시한다 등의 준칙이 O2R에는 전무했다. 모임 일시와 장소를 정하는 일만 해도 그렇다. 회원 전원이 동등하게 전권을 갖는다. 1차 정모 때는, 아무래도 처음이다 보니, 커뮤니티장 ‘밥 라자르’를 제외한 ‘파타 모르가나’도 나 ‘파레이돌리아’도 그저 쭈뼛거리기만 했다. 우리 커뮤니티 취지와는 어긋나지만 별 도리가 없네. 참다 못한 밥이 스스로에게 우선권을 부여했다. 미안합니다 라자르, 두 번째부터는 잘 할게. 파타와 나는 밥에게 사과했다. 어색한 온라인 정모 후 딱 보름이 지난 어느 새벽, 밥이 카카오톡 단체방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세 시간 뒤 서울 강북구 북한산 둘레길 21번 코스 우이령길 진입로 앞. 파타는 ㅇㅇ, 나는 ㄱㄱ. 그렇게 우리는 오전 다섯 시에 만나 두 시간 좀 넘게 산길을 걸으며 일출을 보았다. 아침해가 숲의 채도를 높여 갈 무렵 셋은 파했다. 갈림길에서 각자의 코스를 타고 내려갔다. #미확인비행물체 #스페이스오디티 #에이리언 #엑스파일 따위의 해시태그는 온라인 공간의 ‘키워드별 커뮤니티 검색’ 너머, 현실의 오프라인 정모에서는 무쓸모했다. 우리는 입을 꾹 다문 채 걷기만 했다.


밥 라자르는 고등학생이거나 끽해야 대학 신입생으로 보이는 늘씬한 여자애였고, 파타 모르가나는 턱뼈가 발달해 있고 목이 육식 공룡의 발목처럼 굵은 험상(險相) 아재였다. 두 사람 눈에 파레이돌리아는 어떻게 보였을까. 저렇게 예쁜 소녀와 험악스러운 아저씨의 삶은 어떤 이미지들로 둘러싸여 있을까. 인간은 낯선 대상을 바라볼 때 자신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참조하여 이른바 자기 충족적 왜곡을 일삼는다고 하던데. 소녀 주변에 득실댈 온갖 ‘플러팅남’ 중 가장 비호감인 자의 인물상이 내게 덧씌워졌을지도 모른다. 혹은 사내를 형님으로 모시는 여러 아우들 가운데 제일 싸가지 없는 애와 묘하게 닮은 과(科)로서 아이디 파레이돌리아를 쓰는 녀석이 각인되었을 수도 있다. 저 바위 왠지 사람 얼굴 같아(내 눈에는 그저 돌덩이일 뿐이다.), 요 애벌레는 나비가 되려고 열심히도 꿈지럭대는구나(매미 유충이면 어쩔래.), 귀하는 부사관 선발 시험의 전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과거 소년법상 보호 처분 이력이 있는바 우리 부대 자체 선발심의회에서 불합격 처리하였습니다(라고 직접 말해 준 곳은 없었으나 지금껏 응시한 세 개 부대 모두 필기, 신체 검사, 인성 검사, 면접 평가까지 전부 통과했음에도 최종 탈락 통보를 받았으므로 역시나 내 소년범 전과가 걸림돌이었을 거다.) 등등이 죄다 파레이돌리아다.


두 번째 모임은 내가, 세 번째는 파타가, 네 번째는 다시 밥이 일시와 장소를 멋대로 정했다. 첫 정모가 첫 단추로 작용한 탓인지 이후 모임들도 깜깜밤중의 산길에서 이루어졌다. 딱히 불만은 없었다. 있었다 해도 내색하지 않았겠지만. 야밤의 산행은 완전무결한 암(暗)과 묵(默)의 시청각적 특수성 덕에 아웃오브리얼리티의 생동감을 돋워 주었다. 밥과 파타는 어땠는지 몰라도 내 경우는 심야의 산오름이 기시체험인 듯 익숙하고 편안했다.


열일곱 살 때였다. 내 인생길이 오밤중 둘레길처럼 암암하고 막막해진 시점은. 나를 ‘골룸 새끼’라 멸칭하며 담배 심부름꾼으로 부리던 녀석이 있었다. 키가 컸던 걔는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 책상에 한쪽 뺨을 붙인 채 자는 중이었다. 내 손에는 제브라 델가드 엘엑스 한정판이 들려 있었다. 학교 앞 알파문구에서 ‘강력 내구도! 심이 부러지지 않는 샤프 입고! ○△중고교 학생 대상 새 학기 반값 특가! 계산 시 학생증을 보여 주세요♥︎’라는 블랙보드 문구에 홀려 산 것이었다. 느낌표가 무려 세 개, 게다가 하트까지. 안 살 수가 없었다. ○△대학교 부속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배정된 내가 나 자신에게 준 입학 선물이었다. 앞으로 삼 년간은 지치지 않는 얼룩말처럼 앞만 보고 달리자, 라는 포부를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첫 학기부터 나는 골룸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내게는 절대 반지 대신 심이 부러지지 않는 제브라가 있었다. 수학 선생이 등을 보인 채 삼각함수 공식을 판서하는 사이, 맨 앞줄의 나는 샤프심처럼 반듯한 직선 보행으로 뒷줄까지 내려갔다. 아니지. 능동의 자의로 행한 일이 아니라 정체 모를 수동의 기운에 의해 내가 ‘걸어가진’ 것이었다. 그다음, 책상에 달라붙지 않은, 판판하게 잠들어 있던 뺨이 정확히 두 번 찔렸다. ‘찔러졌다’. 나는 빨갛게 물든 제브라의 푸시 버튼을 서너 번 눌러 보았다. 주삿바늘 같은 검은 심이 피를 뚫고 나왔고, 그걸 녀석의 동공에 박아 넣는 상상을 하던 찰나에 나는 반 애들한테 제압당했다. 그 바람에 제브라를 교실 바닥에 떨어뜨렸다. 신기하게도 샤프심은 온전했다.


깨물근이라 불리는 교근(咬筋), 광대 부근의 소관골근(小顴骨筋)이 파열되었다고 들었다. 오만상을 찌푸리거나 울상과 미소를 짓거나 하는 표정 관리가 힘들어졌다고도 들었다. 수술을 여러 차례 했음에도 별 차도가 없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소년교도소에 세 번이나 면회를 온 담임 선생이 다 알려주었다. 아빠한테서도 여러 얘기를 들었는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 다섯 살 때 집 나갔다는 엄마 얘기를 들려 주었던 것도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늬 엄마, 재혼해서 애 낳고 잘 산다더라, 너가 엄마 손 타면서 자라기만 했어도⋯⋯.


서로 근황 토크라는 걸 해 본 적도 없는 사이임에도 우리는 암묵적으로 다 알았다.(적어도 나는 그랬다.) 셋 모두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데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다는 걸. 액면가로만 보자면 파타 아저씨도 나처럼 현직 백수일 것이 자명하다. 청소년이거나 이십 대 초반일 밥은 학업을 작파한 자취생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우리 셋 다 꼭두새벽의 정모 공지에 즉각 응할 수 있는 거고, 따라서 O2R 모임이 네 차례나 성공적으로 이뤄졌을 터였다.


그사이 회원은 두 명이 더 늘었다. 페르미 역설, 페르미 추정. 페르미를 공유하는 걸로 보아 둘은 친구 사이인 모양이었다. 회원들이 아이디를 헷갈릴 수 있다는 걸 인지한 둘은 온라인 정모 때 스스로 호칭을 정리했다. 그냥 저는 역설, 얘는 추정으로 불러 주십쇼. 꼬박꼬박 합쇼체를 사용하는 글투가 거슬렸지만 당연히 지적하지는 않았다. 여기는 O2R이고, 현실을 벗어난 이계의 시공간이며, 따라서 현실에서의 개인적 불평불만은 성립되지 않는다. 중력의 법도를 무중력의 세상에 적용할 수는 없다. 다섯 번째 모임 공지의 주체는 역설이었다.


현 재시각 09:03. 인근군 부대 2 개소대사 격장으로 행 군중. 16:00 사 격훈련종 료 예정.

사 격장옆 폐교 정 문앞에서 16:30 집 결요 망.

경기 도가평설 악면 애이리언 미초 교.

금일 18:00~19:00 UFO 목 격가능.


밥 라자르도 파타 모르가나도 나도 조용했다. 띄어쓰기가 엉망진창이라 해독에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난 네 번의 정모를 떠올려 보건대, 공지 메시지에 대한 회원들의 대응은 그야말로 순응적이었다. 상대가 제시한 일시와 장소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수용한다는 불문율을 우리는 즉답의 형태로 준수해 온 셈이다. 그런 고분고분한 행태에는 얼마간 화기(火氣) 내지는 광기가 어려 있다고 나는 분석한다. 쉬파 이 시간에 산을 타자고? 그래 쒸빠 가자 가. 가 준다고. 됐냐? 일테면 요런 심리가 아닐까. 샌드위치 판매점의 불친절한 서비스와도 같은 거다. 양상추랑 할라피뇨 빼 주시고요, 아니다, 할라피뇨는 그냥 넣어 주세요, 너무 많이는 말고 세 개만, 올리브 듬뿍요, 더 많이요, 더요, 더, 좀만 더. 이윽고 내 손에 쥐어진 건 ‘올리브빵’이다. 올리브가 모든 토핑을 뒤덮은 흉측한 빵 덩어리다. 올리브 줠라 넣으라며? 됐냐 쒸빠? 제 울화와 광태(狂態)가 내재된 샌드위치를 종업원은 나왔습니다 손님, 하는 친절한 말씨로 건넨다. O2R 회원들의 순순함은 말하자면 그런 샌드위치 같은 거다.


그런데 역설의 메시지가 그 암묵적 연대 의식에 얄따란 균열을 냈다. 우리의 샌드위치를 상하게 했다.(그렇다고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내 느낌은 그랬다. 우리가 아무리 아웃 오브 리얼리티라고 해도, 뭐라? 유에프오 목격? ⋯⋯이라는 생각을 밥도 파타도 하고 있던 게 아닐까 싶다. 내가 그랬듯이.

단결! 당소 현 시간부로 16:30 집결 명령 접수. 수신 상태, 교통 상태 모두 양호, 이상.


결국 추정이 맨 먼저 답문을 입력했다. 나는 두 페르미가 주고받는 군대식 소통 언어가 몹시 언짢았으나 우리 커뮤니티의 본의를 되새기며 화를 삭였다. 부사관 선발 시험에 합격해서 직업 군인으로 돈을 벌게 되었다면 나도 카톡 메시지를 얘들처럼 썼으려나. 설마⋯.


ㅇㅇ ㅋㅋ


파타의 응답은 전송 후 약 일 초 만에 삭제되었다. 그럴 만했다. ‘크크’라니. 커뮤니티 회원들끼리 키읔키읔 및 히읗히읗, 또는 이모티콘 사용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문자 표현이므로. 이런 건 금합니다, 라고 정해 놓은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 셋, 즉 원년 멤버들 사이에는 그런 건 역시 안 되지, 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크크 웃고 흐흐 쪼개고 유유 우는 척하는 건 현실에서나 통하는 의사소통이지, 우리는 O2R이잖아, 비현실감 있게 말하고 행동해야 맞지, ⋯⋯.


ㅇㅇ

ㅇㅋ

ㄱㄱ


파타가 정정한 응답 아래로 밥과 나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그걸로 끝. 대화창의 ‘경기 도가평설 악면 애이리언 미초 교’를 복사해 포털 사이트에 그대로 붙여 넣어 검색을 하니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雪岳面) 애이리(厓異里) 언미초교(言美初校)’라는 온전한 지명이 떴다. 오케이, 바로 출발. 그래 간다 가, 가 준다고, 줠라 가 보자고, 됐냐 쉬퐐람들아?



두 페르미는 외국인이었다. 역설은 세네갈, 추정은 과테말라. 애이리 소재의 리튬 전지 공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군부대 인근 지역이라 휴가나 외박 나온 국군 장병을 대상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고, 그래서 어쩌다 보니 군인들한테서 한국어를 배웠다고, 본인들도 자기네 말투가 웃긴 걸 안다고,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세네갈 역설과 과테말라 추정은 설명했다. O2R 회원답지 않은 처사였다. 어쩌라고. 너희가 어디서 왔고 누구한테 말을 배웠든, 무슨 경로로 아웃오브리얼리티에 가입했든 내 알 바 아님, 하고 무시하는 게 우리다운 교류 방식일 텐데, 어쩐 일인지 파타 모르가나가 그들과 말을 섞었다.


“며칠 전에 큰불 났었다며?”


페르미 추정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하는 양으로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똥그랗게 떴고, 그 옆에서 페르미 역설은 감격한 얼굴로 곧장 대꾸했다.


“단결. 우리랑 같이 일하던 전우들 대부분이 전사했습니다. 김밥천국 단골 최 중사님이 우리더러 애이리에 파병 나왔냐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돌쏙비삠밥 시켜 주셨습니다. 같이 먹던 전우들,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내가 못 지켜 줬습니다. 단결, 단결.”


역설은 ‘ㅇㅇ’ 또는 ‘ㅠㅠ’의 의미로 ‘단결’을 사용하는 듯했다. 희한한 말본새였으나 묘하게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돌쏙비삠이 아니라 돌솥비빔이라고 말해 주려다가 말았다. O2R 회원답게. 돌쏙이든 돌솥이든 뭔 상관. 뒤이어 대화에 참전한 추정의 언어도 역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맞지 말입니다. 단결, 단결. 씨유에서 만났던 최 이병이랑 황 일병도 전사했습니다. 첫 외박이라고 캔맥주랑 육포 잔뜩 사 가지고, 모텔 들어가기 전에 우리랑 여기 언미초등학교 앞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그랬습니다. 줫같다는 말, 황 일병한테 처음 배웠습니다. 군 생활 줫같다, 분대장 줫같다, 중대장 개쒜뀌, 사단장 개쒸뽜쒜뀌, 죽고 싶다 쒸뽜, 다 줫같다. 우리, 말 빨리 배웠습니다. 공장 생활 줫같네, 공장장 쒸뽜쒜뀌, 팀장 개쒜뀌, 인력사무소 줫까, 다 줫같지만 그래도 참는다, 세네갈이랑 과테말라랑 파키스탄이랑 말레이시아 내 식구들, 내 쒜뀌들 생각하면서 참는다, 단결 단결. 불나기 사흘 전에 들었습니다. 최 이병이랑 황 일병 전사했다는 소식. 훈련 중에 물에 빠졌다고, 김밥천국 최 중사님이 돌쏙에 참이슬 마시면서 똑같이 말했습니다. 군 생활 줫같다, 다 줫같다, 내가 와이프랑 애들 때문에 참는다 쒸뽜, 이리 와 앉아, 너희도 한 잔 해, 한국 생활 줫같지? 쒸뽜 마셔, 단결은 쒸뽜, 닥치고 마셔 쒸뽜, 짠, 이모 여기 참빨 한 병 더요.”


잠자코 있던 밥 라자르가 깍지걸이한 양팔을 공중으로 쭉 뻗으며 후⋯ 하고 날숨을 길게 띄웠다. 그러고는 혓바닥을 내밀어 위아래 입술을 빠르게 핥았다. 모습이 뭐라 해야 할까, 해석의 양태가 다양해질 수 있는 이미지였다. 동료나 애인이라면 립밤을 건넬지도 모르겠다. 왜, 입이 건조해? 한데 나는⋯ 발기를 하고 말았다. 누군가에게는 혀 내민 여성의 이미지를 보고 페니스를 세우는 일이 지극히 현실적인 반응일 것이다. 하나 나에겐⋯ 몹시 비현실적인 사태였다. 성욕이라는 걸 가져 본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소년교도소에 복역했던 십오 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자위를 하지 않았었다. 진짜다. 자발적 의사였다기보다는 환경의 영향이 컸다. 사기범, 잡범, 추행범, 폭력범 등 온갖 어린 범들이 우글우글한 소굴에서는 아무래도 쉽지 않은 일이어서 난 아예 손장난을 끊었고, 그러다 보니 차차 성욕 자체가 사라졌다. 출소 후에는 고졸 검정고시, 아르바이트, 부사관 선발 시험 응시 등등으로 바빴던 터라 정액 배출에 신경 쓸 틈도 없었다. 말하자면, 근 오륙 년만의 첫 발기였다. 나는 밥을 보기가 괜히 민망스러워 부러 시선을 피했다. 부풀었던 성기가 간신히 제 크기로 돌아올 때쯤 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오 쒸뽜!”


뭐지? 다들 어리둥절해져서 O2R 커뮤니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밥은 아까보다 더 격렬히 혀를 놀리며 제 입술을 핥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뜨겁게 일어섰던 내 아랫도리에 일순 한기가 일었다. 고환 두 쪽이 바싹 졸아드는 게 느껴졌다. 뭐야 저 여자. 미쳤나?


“제발, 술 얘기는 그만⋯⋯. 나 알중 치료 중이라고 쒸뽜! 아아악!”


지난 네 번의 심야 산행과 똑같은 암과 묵의 공간감이 훅 끼쳐 왔다. 한때 언미초등학교라 불렸던 이곳 폐교 정문 앞은 더없이 O2R 정모 장소다운 적막강산으로 돌변했다. 그렇지. 이래야 맞지. 이래야 아웃오브리얼리티지.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입술을 핥는 건 알코올 금단 현상인 듯했다. 파타와 나, 그리고 두 페르미는 밥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미안요. 실은 내 알중 치료 때문에 이 모임도 만든 거거든. 인생 하자 있는 인간들끼리 걍 아무 말 없이 산이나 타고 그러면 술 끊는 데 좋을 것 같아서. 걍 뭐랄까, 당신들 보고만 있어도 뭔가 위로가 되거든. 그래 쒸뽜, 나뿐만은 아니구나, 몇 명 더 있구나, 줠라 비정상인들이. 그런 거예요. 비현실 커뮤니티에서 다시 연습을 하자, 다시 현실로 가자. 왜 그런 거 있잖아. 게임 처음 시작하면 튜토리얼 스테이지 나오는 거. 그런 거였다고 O2R은. 혹시 무슨 느슨한 연대니, 침묵의 공동체니 하는 테라피 모임인 줄 알고 가입한 건 아니죠들?”


뭐지 이 여자. 찌를까?


다시금 내 손에, 그날의 제브라가 들려 있는 기분이었다. 교실 바닥에 떨어지고도 부러지지 않았던 그날의 검은 심. 그것이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내 안에서 조금씩 튀어나오는 듯했다. 끝이 뾰족한 소지품은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 내 손은 찌를 도구를 찾았다. 잘 좀 뒤져 봐. 정말 없어? 신용카드는 어때? 아, 너 신불이지. 체크카드는 있지? 모서리 끝을 깨뜨려 봐. 찌를 순 없어도 긋는 건 되겠다. 아싸리, 찌르고 긋는 건 포기하자. 그래야 가능성이 더 열리지. 폰으로 찍자. 이미 손에 쥐고 있네. 저 여자 이마 반반하니 참 예쁘다. 바로 깨지겠는데? 그때 걔 뺨도 저렇게 판판했잖아. ⋯⋯하는 불경한 예문들이 능동태인지 수동태인지 의문문인지 명령문인지 헷갈리는 어휘로 내 말초 신경을 자극했다.


“이건 또 뭐야 쒸빠!”


파타 모르가나가 외쳤다. 그의 왼손에 웬 레버 같은 게 들려 있었고, 곧이어 용수철이 튀어 오르는 ‘탕’ 하는 금속음과 함께 칼날이 솟아났다. 과연, 이제야 본인답네. 칼잡이셨어? 그 창졸간에 나는 단도를 쥔 파타의 모습이 너무나 그답다고 느껴 감탄했다. 아웃오브리얼리티는 무슨. 줫까. 본색을 드러내는 시간이 온 건가. 나는 스마트폰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아니지. 스마트폰이 내 손에 의해 바짝 그러쥐어졌다. 제브라를 들고 있던 그때처럼, 내 모든 사고와 동작은 또다시 ‘되어지고’ 있었고 나는 그걸 저지할 수 없었다.

뭐지 저 아재. 어딜 봐?


밥 라자르를 향해야 마땅할 파타의 부라린 시선과 칼은 엉뚱한 쪽을 겨누고 있었다. 밥의 맞은편, 세네갈 역설과 과테말라 추정이 서 있던 자리. 스마트폰이 쥐어진 채 쳐들어져 있던 내 팔의 방향도 천천히 틀어졌다. 내 폰의 모서리와 파타의 칼끝과 밥의 쒸뽜쒸뽜 욕지거리가 일제히 합치된 그곳에, 외계인 둘이 둥실 떠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외계 지적 생명체의 이미지와는 살짝 달랐다. 창백한 피부에 크고 까만 두 눈이 아니라, 검은 살갗에 시허옇게 부릅뜬 양안. 머리통 또한 우주 괴담에서처럼 몸통에 비해 비대하지 않았다. 멀쩡한 지구인의 체형과 비율이었다.


페르미?


세네갈에서 온 역설과 과테말라 출신의 추정. 분명히 그 둘이었다. 어쩐지 말투부터 요상하더라니. 역시 외계인들이었어. 금단 현상 줫같네 진짜⋯. 밥 라자르는 이 말을 남기고 기절했다. 적의 이마를 찍어 가격하긴 글렀다고 판단한 나는 스마트폰 투척 태세를 갖췄다. 그러자 두 페르미의 입에서 외계어가 쏟아져 나왔다.


“쒸뽜라삐아깐따쀠야 개호로로로쒜낏쒜낏조져쀨라 제브라카타브라쒸뽜쒜꺄.”


나는 파타 모르가나가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리라 확신했다. 놈들과 유일하게 말을 섞었던 지구인이기도 했으니. 저기, 파타, 쟤들 뭐래는 거? 탕― 또 한 번의 쇳소리. 칼날을 집어넣은 파타가 돌연 양다리를 일자로 모으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항복의 자세라기보다는, 대국민 사과를 하러 나온 정치인이나 군인의 몸가짐 같았고, 금방이라도 ‘단결!’ 경례를 할 기세였다.


“당신들은 당신네 삶만 현실이고 지구인 줄 압니다. 살면서 못 듣고 못 본 존재들은 다 외계인인 줄 알고 삽니다. 늘 자기 자신이 세상 제일 힘든 줄 알지 말입니다. 죽고 싶다고, 죽지 못해 산다고 뻐기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뉴스 보면서는 내가 아니라 다행이네, 하고 안심합니다. 지긋지긋한 지구인들, 단결!”


⋯⋯이라네. 존댓말을 하네 우리한테. 괜히 미안하게. ⋯⋯라는 파타의 말에 나도 짐짓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스마트폰은 바지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외국인인지 외계인인지 모르겠는 두 페르미는 여전히 둥실, 우리를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끝]


글 임재훈

portfolio | @nowing_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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