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브릿지>
<스파이 브릿지>의 시대적 배경은 미·소 냉전 시기였던 1957년입니다. 이해에 소련(소비에트 연방)은 스푸트니크(Sputnik)를 쏘아 올렸지요. 몇 년 앞선 1953년, 소련은 ‘짜르 봄바(Tsar Bomba)’라는 건식 수소 폭탄 실험에 성공했었습니다. 1952년 미국이 습식 수소 폭탄 실험을 성공시킨 지 1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리와인드 버튼을 좀 더 눌러보겠습니다. 1945년 종전 후, 소련은 독일 분할 점령국들(미·영·프·소) 중 하나로서 동베를린을 관할했습니다. 독일 문제를 두고서는 미국과 줄곧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결국 1948년 독일관리이사회 탈퇴를 선언, 이후 미·영·프의 점령지인 서베를린을 흡수하고자 약 1년간 ‘베를린 봉쇄’ 작전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서도 미국과 소련의 이념 싸움은 (우리가 아는 대로) 내내 지속됐습니다. 3년 뒤 스탈린이 사망하고, 한국전 휴전 협정이 맺어짐에 따라 미·소 냉전도 잠시 소강기를 맞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 했지요. 1955년 소련을 주축으로 한 동유럽 국가들이 서방국들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NATO)에 맞서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체결한 것입니다. 국제정세는 더욱 차가워졌습니다.
이런 와중에 소련이 인공위성을 발사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세계 최초였고, ‘동반자(Sputnik)’라는 이름까지 표방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유일한 핵 보유국’이란 타이틀을 빼앗긴 데 이어, ‘세계 최초 인공위성 발사국’이란 영예마저 소련에게 내준 셈이지요. 스푸트니크를 동반이 아니라 ‘모반’으로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스파이 브릿지>의 무대인 1957년 미국은 대략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똑똑하고 실적 좋은 보험 전문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 분)이 주인공입니다. 뜻밖의 계기로 소련 스파이의 변호를 맡게 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반공 감정이 거센 시절이라 변호인에 대한 여론의 뭇매가 호됩니다. “누구에게나 변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주인공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드라마틱한 전환을 맞습니다. 소련 상공에서 첩보 활동 중이던 미 공군 전투기가 나포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지요. 붙잡힌 파일럿은 CIA(미국 대통령 직속 국가정보기관, 냉전 시기인 1947년 창설)에서 급파된 스파이. 물론 CIA는 이 사실을 부인합니다. 미국으로서는 몹시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자국 군인을 매정하게 버렸다는 불신 여론이 피어오를 수 있으니까요. 이에 CIA는 발빠르게 비밀 작전을 준비하는데, 바로 미국이 체포한 소련 스파이와 소련에 구금된 미국 스파이를 맞교환하는 것. 이 프로젝트에 차출된 민간인 협상가는 다름 아닌 제임스 도노반. 변호인의 이야기에서 협상가의 이야기로의 극적인 국면 전환입니다.
그야말로 맨투맨 트레이드의 단순명쾌한 조건. 이것만 잘 성사시키면 만사형통인데, 우리의 주인공은 어려운 길을 가려는 중입니다. 베를린 내 미국인 유학생이 동독 군인들에게 억류됐다고 합니다. 베를린 장벽 너머의 서로 가야 하는데 동에 발이 묶이고 만 것이지요. 소련 관할인 동독에서, 학생은 스파이로 오인받아 구금되어 있다고 합니다. 제임스 도노반은 이 남학생도 함께 데려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소련 스파이 한 명을 넘겨주고, 미국 스파이 한 명과 미국 대학생 한 명을 확보해야 합니다. 협상 테이블의 현안은 맨투맨에서 ‘맨투멘(man to men)’으로 급변합니다.
이윽고 펼쳐지는 이야기는 실화 그대로입니다. 제임스 도노반은 협상을 성사시키지요. 국가 단위의 이해관계는 차치하고, 오로지 이 로맨티스트 협상가의 입장에서라면, 이것은 ‘타결’이 아니라 완전한 ‘승리’입니다. 그의 고집대로 일 대 이(소련인 한 명 대 미국인 두 명)를 이루었으니 말입니다. 이 영화는 그 승리의 과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 승리를 국가(미국)의 것으로 헌정하는 낯뜨거운 실책을 저지르기에 <스파이 브릿지>의 장인들은 너무나 노련합니다. 폴란드 출신 촬영감독 야누즈 카민스키가 포착한 영상들은 냉전의 서늘함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배경 안에 배우(인간)가 담길 때, 온도차가 생깁니다. 배경과 배우 둘 다 놓치지 않으면서, 결과적으로 두 피사체가 전체 프레임의 적정온도를 맞추게끔 하는 마력적인 영상미가 이 영화에는 배어 있습니다.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리듬감은 이제 경지에 오른 듯하고요. 늘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면서, 가다 마는 걸 또 지켜보지 않습니다. 이야기 흐름의 리듬감은 곧 대중과의 호흡이지요. <쥬라기 월드>를 연출한 콜린 트레보로우의 말처럼, 대중을 읽는 스필버그의 능력은 가히 천부적인 듯합니다. 물론, 이런 세련이 가능했던 데에는 코엔 형제(조엘 코엔, 에단 코엔)의 뛰어난 각본이 바탕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배우들의 연기는 또 어떤가요. 톰 행크스야 말할 것도 없고,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 역을 연기한 마크 라이언스의 작고 쓸쓸한 몸 연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스파이 브릿지>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일개 회사원으로서 제임스 도노반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 시점은, 그가 변호인에서 협상가로 변모하던 터닝포인트부터였습니다. 소련 스파이 변호라는 기존 업무 수행 중 CIA에게서 새 프로젝트를 하달받은 셈이니, CIA가 갑, 제임스가 을인 구도입니다. 대행사 클라이언트잡 종사자인 소심한 관객은 이렇게 또 주관적 감상에 빠지고 만 것이지요.
이 영화에 묘사된 제임스 도노반은 평범한 직장인 관객의 깜냥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태도를 유지하는데, 갑을 압도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게다가 갑이 CIA인데도 바른말을 잘도 내뱉습니다.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기까지 하지요. 이런 ‘을’반하장의 행동양상이 ‘을’ 관객에게는 큰 카타르시스로 작용했습니다. 갑과 대등한 수준을 넘어, 갑을 이끄는 을의 리더십을 배웠다고 할까요.
영화 속 제임스는 베를린 장벽을 월담하던 사람들이 경비병에게 즉각 사살되는 현장을 목격합니다. 거리의 부랑아들에게 제 코트를 갈취당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어쩌겠나요.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실상입니다. 우좌지간 이곳이 바로 자신이 협상을 진행해야 할 홈그라운드입니다. 특파된 협상가는 이 끔찍한 ‘일터’에 적응하는 수밖에는 없고, 여기에서 과업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베를린 장벽의 참상과 현실의 회사 생활을 비교한다는 게 어불성설이기는 합니다. 그저 ‘극단적 비유’ 정도로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한 프로젝트가 끝나고 새로운 클라이언트와의 일이 시작되는 순간 역시, 영화 속 제임스 도노반의 독일 적응기와 비슷합니다. 특히, 비교적 매너가 좋은 외국계 기업과 작별하고, 공공기관 혹은 공기업을 새 클라이언트로 맞으면 극심한 환경 차이를 실감하게 되지요. 어쨌거나, 업무 환경의 변화는 실무자에게 대단히 강도 높은 정신력을 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보험 전문 변호사였던 제임스는 소련 스파이라는 클라이언트를 위해 일했었습니다. 을의 위치였지요. 그러다 CIA의 반 강제적 공조로 협상가가 됩니다. 클라이언트가 바뀐 것입니다. 당연히 그에 따른 업무 환경 변화가 수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일관적인 태도는 흔들리지 않은 것으로 영화에는 묘사되고 있습니다. 실존인물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영화 속에 그려진 모습은 근사하고 품위 있으며, 쿨하기까지 합니다.
미·소 양 적대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협상 활동을 벌이는 속에서도 그가 잃지 않은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습니다. 갑을관계의 본질은 결국 사람과 사람이지요. 변호인 제임스는 소련 스파이가 아니라, ‘소련에서 미국으로 온 한 중년 남성’을 상대했습니다. 협상가 제임스 역시, 양국에 구금된 스파이들을 교환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을 보고 있었지요. 얼른 일대일 맞교환으로 끝내버리자는 CIA가 밉상이었을 법도 한데, 크게 화를 내는 법도 없었습니다. 제임스는 CIA라는 갑마저 ‘인간’으로 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미·소 양국 스파이에 대한 일대일 맞교환을 사실상 거부하고, 억울하게 투옥된 미국인 대학생까지 포함시켜 이 대 일 거래로 만들어버린 그에게 이 협상은 단순한 일(임무)이 아닙니다. 일개 을이었던 자가 타인, 즉 ‘인간’을 보게 되는 순간, 그는 완전한 개인으로 승격하는 것입니다. 불세출의 민완가? 열성적인 인권 운동가? 또는 애국자? 어느 쪽이든 제임스 도노반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제임스 도노반이라는 ‘개인’의 일부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갑 앞에서 얼마나 ‘개인’이었던가. 생각해보면, 갑으로 구분되는 존재─클라이언트, 회사 앞에서 내가 온전히 개인이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갑을 증오하는 순간에도 나는 갑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아니, 갑에 소속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묘한 소속감을 짊어진 채 격무에 시달리고, 음주와 흡연에 매달리고, 점차 다혈한으로 변태해가며, 기어이 급여를 받습니다. 만약 더 이상 분노하고 짜증 낼 대상이 사라질 때, 즉 그 누구에게서도 ‘을’로 소속될 수 없을 때, 월급이 끊길 때, 아마도 나는 격정적으로 을로 회귀하고자 발악할 것입니다. 총기도 변변치 못한 저급 잡헌터가 되어 갑들의 정글을 위태로이 헤치고 다닐지도 모릅니다. 회사를 벗어났으나, 여전히 회사원의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꼴이지요.
회사원이기는 하지만 협상가는 아니었다는 자각은, 내가 개인으로 존재해본 지가 굉장히 오래되었음을 문득 실감했다는 뜻입니다. 어느 순간 이 미천한 회사원은, 더 이상 아무 것도 ‘협상’할 수 없게 된 건 아닐까. 협상가가 못 된 채로, 중년·노년에 이르도록 그저 ‘협조자’에 머물게 돼버리는 건 아닐까. 변호사에서 협상가로 변모하는 제임스 도노반을 보며 현실의 회사원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별 뾰족한 수가 생긴 건 아닙니다. 늘 떳떳한 개인이라···.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