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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탈자의 무중력 세상 생존기

<그래비티>

by 임재훈 NOWer

당구장 개업을 준비 중인 사람에게는 당구장 간판밖에 안 보인다는 구식 농담이 있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회사원은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회사 생각을 떨쳐낼 수 없습니다. 특히나 사회생활 5년간 세 번의 이직을 경험한 회사원이, 우주 미아가 된 주인공의 지구 귀환 사투를 다룬 영화를, 심야에 홀로 극장에서 관람한다는 일은, 필연적으로 매우 경이로운 정서적 화학작용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 분)가 “나는 우주가 싫어..(I hate space..)”라고 혼잣말했을 때, 소심한 회사원에게 그녀의 ‘우주’란 왠지 ‘세상’과 동의어처럼 들렸습니다.



detached


<그래비티>는 개봉 전, 예비 관객들로 하여금 ‘도대체 어떻게 촬영한 거지..?’라는 감탄 섞인 의문을 품게 한 놀라운 예고편들을 차례로 공개했었지요. 대기권 밖 지구와 우주의 풍경, 이리저리 날아오는 파편들에 섞여 곡예하듯 부유하는 두 우주인(산드라 블록, 조지 클루니)의 모습은 가히 우주적인 스펙터클을 보여주었습니다. 예고편 역시, 영화 제목에 걸맞은 강력한 ‘인력’으로 기대감을 증폭시켰던 것입니다.

예고편들 가운데 세 편은 제목을 달고 있는데, 각각 ‘Detached’, ‘Drifting’, ‘I've got you’입니다. ‘이탈’, ‘표류’, ‘구조’. 영화의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키워드들이기도 합니다. 이탈되지 않았다면, 표류할 일도 없고, 구조될 필요도 없을 것이기에, 세 키워드들 중에서도 핵심은 ‘이탈(detached)’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단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패밀리로서의 소속감을 가짐과 동시에, 이탈의 위험에 놓이게 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직장인이 체감하는 이탈에의 위협이란, 자신이 몸담은 회사나 팀에서 방출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일 수 있지요. 혹은 학생의 경우라면, 졸업―학생 신분으로부터의 이탈―이란 게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탈은 수동형이기도 하지만 능동형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현재 소속된 공간에서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자율권을 가지니까요. 직장인에겐 퇴사와 이직, 학생에겐 자퇴라는 카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비티>의 스톤 박사는 지구로부터의 ‘이탈’을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지구’와 ‘지구 밖’으로 극명히 나뉘는데,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푸른 지구별과 검은 우주는 어쩌면 그녀의 삶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요. 지구인으로 태어난 그녀는, 지구라는 세계에서 어린 딸을 사고로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상실의 기원인 지구를 응시하는 우주인 스톤 박사.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편안함마저 깃들어 있습니다. 행성 지구의 풍광에 달뜬 매트(조지 클루니 분)와는 다르게, 스톤 박사는 시종일관 침착합니다. 그저 말없이, 말없는 지구를 바라볼 뿐이지요.



‘삶’이라는 중력


스톤 박사의 관조적 태도는, 갑작스레 닥친 기체(機體) 파편들에 의해 깨지고 맙니다. 부유하는 몸을 잡아주었던 안전 지지대가 끊어지고, 그녀는 그야말로 실체적 이탈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컨대 스톤 박사는 두 번의 이탈을 겪게 된 것입니다. 지구에서 우주로의, 그리고 우주에서 심연으로의 이탈을. 전자가 본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후자는 물론 사고로 인한 것입니다. 줄이 끊어지면서부터(detached) 스톤 박사의 모험은 시작됩니다.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 이 단순하고 명백한 모티브 하나가 이제부터 영화 전체를 중력처럼 끌어갑니다.


무중력 상태의 이탈자에게 가장 절실한 건, 영화 제목이기도 한 중력(gravity)일 것입니다. 회사원들이라면 종종, 자신과 맞지 않는 일을 하거나 도통 소속감을 느낄 수 없을 때 ‘붕 뜬’ 기분을 느끼곤 할 것입니다. 여기서의 ‘붕 뜨다’라는 인식은, 우주에서의 무중력 상태와 같은 맥락이지요. 발 붙일 곳이 없는 듯한 무력감. 비단 회사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퍽 자주 느끼게 되는 감정입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또는 ‘내가 여기 왜 있는 거지?’ 같은 생각들을 하게 될 때 그렇지요. 그러다 결국 ‘나는 왜 사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까지 던지게 되고 말입니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누구나 철학자가 되곤 하니까요.


02.jpg ⓒ daum movie


그러나 어떤 이는 무중력 상태에서 ‘철학자’가 되는 대신 ‘행동가’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영화 속 매트처럼 말입니다. 그는 제트 수트(jet suit)라는 일종의 추진기를 장착한 채 우주 공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괴짜입니다. 앞선 이가 기록한 최고 우주 유영 시간을 갱신하기 위해서이지요. 안전 지지대로부터 분리되자 “나 어떡하죠?(What do I do?)"를 반복해 외치던 스톤 박사와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절박하게 구조를 요청하는 그녀의 수동적 태도와 반대로, 매트는 매우 능동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우주 저편으로 이탈된 스톤 박사를 다시 붙잡아준 것도 그였고, 자신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해진 순간에도 스톤 박사에게 끝까지(교신이 끊기는 순간까지) 우주 기지로 가는 경로와 비상 탈출기 작동법을 알려준 것도 그였습니다. 심지어 혼백(?)이 되어서도 그는 스톤 박사의 꿈에 나타나 생존 의지를 독려하지요. 매트가 없었다면, 스톤 박사는 생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매트라는 캐릭터는, 스톤 박사가 살아내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 즉 ‘중력’과도 같은 역할을 해준 셈이지요. 안전 로프 하나 없는 무중력 공간에서 우주 유영 시간 기록 갱신을 욕망하는 매트는, ‘삶’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보입니다. ‘삶이 곧 중력이다.’ 매트가 스톤 박사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가 아닐는지요.


비상 탈출기에 몸을 실은 스톤 박사는, 가까스로 지구 대기권 진입에 성공합니다. 우주는 고요했으나, 지구는 시끄럽습니다. 대기권에 들어서자, 비상 탈출기의 라디오에서 온갖 주파수가 잡히며 요란스러운 잡음들이 들려옵니다. 여기는 지구 ‘안’, 여기는 ‘삶’입니다. 스톤 박사의 비상 탈출기는 바다에 불시착하고, 기체를 빠져나온 그녀는 양수 안의 태아처럼 바닷물을 헤엄쳐 육지로 나옵니다. 손끝에 와 닿는 모래의 감촉. 물과 땅의 세계, 지구에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모래를 힘껏 움켜쥔 그녀의 젖은 손 안에는, 모래만 들어 있지는 않겠지요. 그녀는 삶이라는 중력을 움켜잡은 것일 테니까요.




살면서 ‘이탈’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자의로든 타의로든 한 번쯤은, 혹은 그 이상, 누구나 ‘이탈자’가 됩니다. 그렇게 무중력 상태에 놓이고, 잉여 부유물로서 삶의 외곽을 떠다니게 될 때, 다시 그 핵으로 잡음 속으로 상처 투성이 속으로 들어가볼 결단을 내린다면, 중력은 점점 가까워질 것입니다. ‘어쨌든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 영화 <그래비티>가 그랬듯, 현실의 삶 역시 플롯은 결국 하나입니다. ‘어쨌든 살아야 한다.’ 살.아.내.기. 그래서 오늘도 나, 회사원은 출근을 합니다. 이것이 무중력 세상에서 내가 선택한 살아내기의 방식이므로. 언젠가 나를 확- 끌어당겨줄 비옥하고 촉촉한 ‘중력’의 세상을 꿈꾸며.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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