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이 글에는 영화 줄거리가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몇 해 전 혼자 혜화동 낙산공원에 갔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양도성 성곽 위에 올라가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한양도성은 1396년 축조되었고, 지금은 사적 1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적, ‘역사의 흔적’입니다. 조선시대 인부들이 쌓아 올렸을 돌덩이들이 사적으로서 존재 의미를 갖는 까닭은, 그것들을 후대의 사람들이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리려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네모난 돌덩이들 틈에 익명의 후들거리는 팔다리가 끼어 있는 듯했습니다.
제가 혼자 놀러 갔을 때 한양도성 위에 원숭이처럼 앉아 있던 사람들은 대개 내려다보이는 경치를 감상하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좋아 보여서 저도 올라갔습니다. 역시 좋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에 경주의 거대한 왕릉 꼭대기까지 뛰어서 올라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만큼이나 한양도성 성곽 위도 시원하고 편했습니다.(얼마 전 낙산공원에 다시 가보니 이제는 성곽 위에 올라가는 행위를 엄격히 단속하고 있었습니다.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사의 흔적을 놀이기구처럼 이용하는 건 아무래도 죄송한 일이니까. 그 ‘흔적’에 존재했던 옛 사람들에게 말이지요.)
한참을 성곽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가 내려왔습니다. 슬슬 다른 데로 가볼까 하는데, 위아래 낡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께서 “어이-” 하며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혼내시려는 줄 알았습니다. 사적지가 놀이터인 줄 아느냐, 호통이라도 치시려나 싶어 잔뜩 긴장했지요. 할아버지는 혼자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지요. 원래부터 줄곧 혼자였을 것 같은. 혼자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 사람 옆에 가족이나 친구가 나란히 서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힘든. 몸 절반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비스듬히 서 있는 그 할아버지가 그랬습니다.
혼날 준비를 마치고 깍듯하게 자세를 고쳐 잡았을 때였습니다. “저 위에 올라가기 힘들지 않아요?” 생각지도 못 한 공손함에 놀람 반 안도 반이었습니다. 조금은 자세를 풀고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을 골랐습니다. 힘들지 않았기에 힘들지 않다고 대답하려다가 왠지 실례일 것 같아 보이는 것보다는 꽤 높더라고 말씀드렸지요. 신체 건강한 젊은이로서,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에게 제 딴엔 예의를 갖춘 것이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아버지께서는 대뜸 사진 한 장만 좀 찍어달라며 (할아버지 나름대로의) 포즈를 취하셨습니다. 제 목에 걸려 있던 디지털 카메라를 눈여겨보셨던가봅니다. 그렇게 해서 영문도 모른 채 낯선 어르신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액정 화면에 담긴 당신의 모습을 보여드리자 할아버지는 얼굴 주름을 잔뜩 구부려 웃음을 짓고는 고맙다고 하셨지요. 저는 난처했습니다. 사진을, 그러니까 사진 ‘파일’을 드려야 할 텐데, 제 눈앞의 어르신은 (지레짐작이었을 수 있겠습니다만) 이메일 계정이라든지 스마트폰 같은 이른바 디지털의 세계로부터 무척 고원한 삶의 어느 지점에 진즉부터 가 계셨던 듯 보였습니다. 자제 분들의 연락처라도 여쭤볼까 하며 곤란해 하고 있으려니, 할아버지는 느린 걸음으로 어디론가 가셨습니다. 지금 이러한 내 모습을 확인했으니 이걸로 됐다, 싶으셨던 것인지.(이 역시 지레짐작이었을지도요.) 돌아선 할아버지를 다시 돌려 세워 사진 전송 여부 따위를 해결 짓기엔, 그때의 그 상황이 그 자체로 너무나 자연스러웠습니다. 이런 표현이 알맞을지 모르겠는데, 저로서는 ‘자연스러웠다’라고밖에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그랬으니까요. 그 흐름을 왠지 제가 돌려 세우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의 가는 모습은 뭐랄까, 딱히 목적지가 없는 듯한 향함이었습니다. 지팡이가 할아버지의 두 다리를 이끄는 것 같은 뒷모습이었지요. 지팡이가 어디든 가보자고 하면, 불편한 두 다리는 느리고 성실하게 거기에 따르는 듯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의 로이 배티(룻거 하우어 분)는 4년짜리 수명 장치가 탑재된 안드로이드입니다. 자신과 같은 운명을 타고난 동료 안드로이들과 함께 먼 우주 행성에서 고역을 마쳤지요. 제 몸이 육신이 아니라 하드웨어이며, 출생이 아닌 출고를 통해 세상에 나왔음을 아는 로이는 4년째가 다가오자 불안해졌습니다. 수명을 더 연장시키고 싶었지요. 그는 이것을 ‘더 살고 싶다’라는 인간적 명령어로 인식했습니다. 자신처럼 더 살고 싶어 하는 안드로이드 셋을 데리고 우주선을 탈취한 뒤 로이는 지구로 향했습니다.
지구에는 안드로이드 전담 처리 요원인 블레이드 러너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 분)도 그중 하나입니다. 로이 배티를 비롯한 안드로이드 개체 넷을 좇는 자이지요. 본격적인 추적에 앞서, 그는 안드로이드 제조 기업인 타이렐사를 방문해 신형 모델(숀 영 분)의 업그레이드 수준을 직접 확인합니다. 이름이 레이첼이라고 했습니다. 제조 과정에서 인간의 기억을 이식받아 자신이 그 기억의 주인인 양 행세하는 제품입니다. 그러나 휴먼/안드로이드 감별 테스트를 통과할 만큼 정교한 모델은 아니었지요. 레이첼은 혼란스러워 합니다. 이 제품은 급기야 릭의 집까지 찾아와 자신이 인간이라고 우겨대다가 훌쩍이며 돌아가기도 하지요. 실망하고 쓸쓸해 하는 모습이 꼭 사람 같기는 합니다.
레이첼이 다녀간 밤, 릭은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숲 속에서 하얀 유니콘이 질주해 오는 장면. 어쩌다 이런 괴상한 꿈을 꾼 것인지, 실존하지도 않는 일각수가 왜 꿈속에 등장한 것인지, 릭은 알지 못 했습니다.
목표 안드로이드 넷 중 둘을 가까스로 처리하고 나자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거구의 남성형 안드로이드를 상대할 때는 목이 부러질 뻔하기까지 했습니다. 현장을 목격한 레이첼이 덩치를 총살하지 않았더라면 꼼짝 못했을 것입니다.
레이첼은 자신이 ‘살인’이라도 한 줄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하게 몸을 떨고.. 릭은 레이첼을 제 집으로 데려와 쉬게 해주었습니다. 쉬게 해주다니, 안드로이드 따위를.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어쨌든 릭은 그렇게 했습니다.
실은 릭의 처리 대상 안드로이드 리스트에 레이첼도 추가된 상황이었습니다. 릭은 목숨을 빚졌다며 레이첼을 좇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희망의 메시지는 아니지요. “다른 누군가가 당신을 좇을 거요.”라고 분명히 해둡니다. 대꾸 대신 레이첼은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피아노를 칠 수 있는지 몰랐어요. 아마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겠죠.” 실망하고 쓸쓸해 하는 인간 고유의 감정 표현이 또다시 레이첼이라는 안드로이드의 표정과 음성을 통해 재현됩니다. 이 제품은 정말 사람과 닮았다, 라고 감탄이라도 한 듯 릭은 “아름다운 연주였어.” 칭찬해줍니다. 그리고 입맞춤. 비 내리는 한밤의 음울한 도시 어딘가에서 기묘한 사랑이 시작되려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타깃까지 처리하고 이제 로이 하나만 남았습니다. 민첩하고 억센 로이는 미로 같은 구형 맨션을 무대로 릭을 마음껏 희롱합니다. 손가락뼈를 부러뜨리는가 하면, 빼앗았던 총을 되돌려주며 잘 좀 해보라고 다그치기까지 하지요. 4년짜리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로이는 마치 “잘 봐둬라. 나는 이렇게나 강한 존재였다. 네까짓 것 정도는 이렇게 갖고 놀 만큼 월등했다. 잘 봐두고 잘 기억해라.”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드웨어 기능이 서서히 정지해갈 즈음, 로이는 흰 비둘기 한 마리를 손에 쥐고 맨션 옥상에 오릅니다. 세찬 비를 맞으며 주저앉은 로이의 인조적인 동공에 희미한 빛이 어리고. 그것이 그의 눈빛인지, 도시의 암연한 네온사인 빛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존재를 증언해줄 마지막 대상은 이제 둘뿐이다. 비둘기와 블레이드 러너. 동료 안드로이들이 있었다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외롭지 않게 이 도시를 방랑했을 테지만.
“나는 너희 인간들이 감히 믿지 못할 광경들을 봤다. 오리온 평행부를 불붙은 듯 돌진하는 공격선들, 탄호이저 게이트 주변에서 반짝이던 세슘 빔.. 이 모든 순간들은 머잖아 상실되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군.”
“I’ve seen things you people woudn’t believe. Attack ships on fire off the shoulder of Orion. I watched C-beams glitter in the dark near the Tannhauser gate.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die.”
기어이 자신의 기능 종료를 ‘죽음’으로 인식한 채, 로이의 고개는 앞으로 푹 꺾입니다. 그의 품속에 붙들려 있던 비둘기는 비 내리는 도시의 하늘로 날아올랐지요. 비둘기는 하얗게 빛났습니다. 언젠가 릭의 꿈을 헤집어놓았던 흰 유니콘처럼.
릭의 임무 수행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블레이드 러너 전담반 소속인 사내가 도착했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말없는 사내. 왜소하지만 어쩐지 서늘한 인상의 그 남자는 이상한 버릇을 갖고 있었습니다. 종이를 접어 작은 형상을 만드는 괴벽. 릭이 안드로이드 처리 임무를 하달받던 사무실 안에서도, 그 남자는 조용히 자그마한 종이 인간을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것입니다.
“이제 끝났소.” 지쳐 쓰러진 채로 릭은 겨우 말합니다. 사내는 대답 대신 릭에게 총을 던집니다. 아직 처리해야 할 안드로이드가 하나 남았다는 으름장. 레이첼을 두고 사내는 불쾌한 위로를 남깁니다.
“그녀가 살아남지 못하게 돼 유감이오. 뭐 그렇기는 하지만, 누군들 그럴 수 있겠소.”
“It’s too bad she won’t live. But then again, who does?”
릭은 곧장 집으로 향했습니다. 다른 블레이드 러너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레이첼과 서둘러 떠나야 합니다. 곤히 잠든 레이첼을 끌어내다시피 하여 집을 뜨려는 순간, 문 앞 바닥에 놓인 작고 하얀 종이 모형이 눈에 띄었습니다. 유니콘! 종이 접는 사내가 벌써 릭의 집에 당도했었던 것이지요. 레이첼의 행방을 이미 파악하고 있으니 허튼 생각 말고 일을 마치라는 경고일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릭의 꿈속에 나타났던 유니콘을 사내는 알고 있는 걸까. 이유는 자명합니다. 릭의 꿈은, 온전한 꿈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이식된 이미지였던 것이지요. 즉, 릭 역시 안드로이드였다는.
릭은 종이 유니콘을 얼마간 바라보다가 뭔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고는 유니콘을 손에 쥐고 레이첼과 떠나지요. 어쩌면 릭은 레이첼을 처리할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릭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레이첼을 지킬지도 모릅니다. 종이 접는 사내는 왜 레이첼을 처리하지 않았을까. 릭이 레이첼을 처리하지 않을 것을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릭을 가만히 놓아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종이 접는 사내 역시 혹 안드로이드는 아니었을까. 여기저기 놓인 그의 종이 모형은, 그가 의도적으로 남겨두고 싶었던 자기 존재의 흔적은 아니었을까. 많은 의문들을 뒤로 하고 <블레이드 러너>의 이야기는 끝납니다. 이 의문들은 <블레이드 러너>가 남긴 흔적이기도 하지요.
“이 모든 순간들은 머잖아 상실되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한양도성 성곽들도 다른 돌덩이들 속에 섞이면 그저 낱개의 돌덩이에 불과할 테지만, 600여 년 전 인부들은 그 돌더미 속에서 그 하나하나를 다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혼자 그럴 듯한 상상을 해봅니다. 돌들의 무게를 기억하는 그들은 돌들의 의미의 증인일 테니.
종이 접는 사내처럼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할아버지는 누구였을까. 제게 사진 한 장으로 존재의 증거를 남겨두고 지팡이 노인은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언젠가 저 역시 지팡이를 짚을 나이가 되면 그 할아버지의 존재를 제 안에서 다시금 확인하게 될까요. 그때쯤이면, 낯선 젊은이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하고 떠나간 의중을 풀어내게 될까요.
종이 유니콘처럼 제게 남겨진 할아버지의 사진을 이따금 물끄러미 봅니다. 릭이 이 사진을 본다면 유니콘을 볼 때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생각만 한다고 존재할 수는 없고, 생각하는 그를 바라봐줘야만 그가 존재할 수 있는 걸까. 그런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면? 나는 그의 존재의 증인이 될 자격이 있을까.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존재의 증인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귓전에 반젤리스의 ‘Blade Runner Blues’가 내내 울립니다.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