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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을 주피터의 품 안에

⟨카우보이 비밥⟩ TV 시리즈 EP 12~13 ‘주피터 재즈’ 리뷰

by 임재훈 NOWer



타이탄을 주피터의 품 안에

— ⟨카우보이 비밥⟩ TV 시리즈 EP 12~13 ‘주피터 재즈’ 리뷰


알려드립니다 ①

[스포일러 주의] 본편 줄거리와 장면(캡처 화면)이 포함된 리뷰입니다.


알려드립니다 ②

2013년 발표했던 글을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카우보이 비밥(Cowboy Bebop)⟩의 주요 캐릭터 3인방―스파이크 스피겔(Spike Spiegel), 제트 블랙(Jet Black), 페이 발렌타인(Faye Valentine)―은 저마다 소중한 것을 잃었던 과거사를 지니고 있다. 갱단 레드 드래곤(Red Dragon)의 일원이었던 스파이크는 조직을 떠나면서 연인 줄리아(Julia)와도 이별해야 했고, 용호상박의 파트너였던 비셔스(Vicious)가 줄리아와 내연의 관계라는 걸 알고 난 뒤 그와 철천지 원수로 돌아서게 되었다. ISSP(Inter-Solar System Police, 태양계 경찰 기구) 출신인 제트는 부패한 동료 형사에게 저격을 당해 왼팔을 절단해야 했는데, 자신이 동료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그 동료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다 제트의 눈앞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페이는 우주선 탑승 중 발생한 폭발 사고로 콜드슬립(cold-sleep) 상태에 빠져 50년 만에 간신히 깨어나지만, 모든 기억이 지워졌다.


재미있는 점은 이 세 명이 각자의 상실을 채우는 방식이다. 스파이크는 우주 어딘가에 있을 줄리아를 찾아 헤매고, 제트는 스파이크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헛헛함을 메우며, 페이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스파이크와 제트 곁을 떠났다 돌아왔다를 반복하면서 귀소의 위안을 얻는다.(게다가 그녀는 스파이크를 내심 짝사랑한다.) 우좌지간 사연 많은 이 셋은 ‘바운티 헌터(bounty hunter)’라는 공통의 정체성과 비밥호(Bebop號, 세 명이 함께 타고 있는 비행선으로서 바운티 헌팅의 헤드쿼터 역할을 함)라는 공간을 공유하며 한 팀을 이루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돌아올 곳’이 되어주는 셈이랄까.


‘주피터 재즈(Jupiter Jazz)’는 ⟨카우보이 비밥⟩ TV시리즈의 12~13화 2부작으로 구성된 에피소드다. 시리즈 전편을 통틀어 스파이크-제트-페이 3인방 모두의 감정선이 가장 ‘찐하게’ 맞물려 있는 에피소드가 아닐는지. 또한, 그렌(Gren)이라는 흥미로운 캐릭터의 등장으로 극적 재미를 더하고 있다. 비셔스와 타이탄(Titan) 행성에서 함께 싸운 전우였으나, 그의 배신으로 수용소에 갇혀 약물에 중독되고, 그 부작용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갖게 된 슬픈 그렌. 왠지 그는 스파이크와 묘하게 닮았다. 비셔스를 증오하면서도, 어쩌면 그 이유 때문에 비셔스와의 과거에서 결코 헤어나오지 못하는 스파이크의 또 다른 자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jupiter jazz 001.jpg 연약한 야누스, 그렌


이야기의 주 무대는 칼리스토(Callisto) 행성이다. 그곳에 그렌이 있다. 그는 레드 드래곤에 ‘레드 아이(Red Eye)’라는 환각제를 대주는 마약 딜러다. 물론, 현상 수배범이다. 그렌과의 거래를 위해 비셔스가 칼리스토 행성으로 향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때마침 고독이 발동한 페이는 비밥호의 비상금을 털어 사라지는데, 알고 보니 칼리스토의 어느 재즈 바에서 쓸쓸히 독작을 하고 있다. 비밥호의 해커 소녀 에드(Edward)가 페이의 행방을 추적하던 중 ‘줄리아’라는 낯선 코드네임을 발견하고, 스파이크는 그길로 칼리스토에 날아간다. 제트가 “페이는 어떡하냐?”라고 걱정하자 스파이크는 “당신은 당신의 여자를, 나는 나의 여자를 찾으러 가면 되는 것”이라고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이에 둘의 관계는 마치 심하게 다툰 연인처럼 냉랭해지지만, 제트는 페이의 첩보를 통해 그렌과 비셔스가 칼리스토에 와 있으며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진행 중임을 알게 된 뒤, 못 이기는 척 문제의 행성으로 뒤따라간다.


그렌 역시 스파이크-제트-페이와 마찬가지로 ‘상실’의 캐릭터다. 비셔스를 향한 그의 적개심은 증오라기보다는 원망에 가까운 것이다. 타이탄에서의 전투는 그렌에게 잊지 못할 메모리다. 전우애란 무엇인가. 처절한 생사의 경계에서 ‘반드시 살아야 한다’라는 감정을 공유하는 것. 내 옆에서 웃고 있는 이 녀석이 이 전장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녀석과 담배를 나눠 피우며 잠시나마 여유를 찾는 나라는 존재도 내일이면 총알 세례를 받아 사라질지 모른다. 이런 극도의 불안 속에서, 삶에 대한 의지는 강렬히 타오른다. ‘살고 싶어 죽을 지경’인 자들의 사랑. 그것이 전장에서의 전우애가 아닐까. 그런 사랑을, 그렌은 비셔스에게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정(情) 따위 이미 버린 지 오래인 비셔스에게 전우애란 하찮다. 사랑하는 자(그렌)와 사랑을 냉소하는 자(비셔스)의 갈등은 적요했던 칼리스토 행성을 비극으로 몰아넣는다.


jupiter jazz 002.jpg 그렌의 주피터 재즈를 듣는 페이


줄리아가 있었다. 페이가 앉아 술을 마시는 이 바에, 언젠가 줄리아가 있었다. 색소포니스트로 신분을 위장한 그렌의 재즈가 연주되는 곳. 줄리아와 페이 두 여자는 이 바에 앉아 그렌의 색소폰 연주를 들었다. 한 명은 스파이크가 사랑했던 여자, 또 한 명은 스파이크를 사랑하는 여자다. 하지만 정작 스파이크는 이곳에 없다. 오래전 사고로 눈 하나를 실명한 그는 수술을 받고 새 눈을 얻었다. 언젠가 페이에게 자신의 눈과 얽힌 이야기를 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쪽 눈으로는 과거를 보고, 다른 눈으로는 현재를 본다”라고. (아마도 술에 취해 있었을) 줄리아 역시 그렌에게 스파이크라는 남자를 추억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서로 색이 다른 눈동자를 가져서, 마주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라고.


칼리스토 행성의 이 작은 바는 스파이크의 눈처럼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공간이다. 줄리아가 과거라면, 페이는 현재다. 각기 다른 방향을 보는 두 눈을 가졌다는 건 불운이다. 어느 한쪽도 제대로 보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스파이크는 늘 과거와 현재를 놓치고 만다. 손에 닿을 듯하지만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흐릿한 줄리아,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페이. 칼리스토에서도 이 불운은 이어진다. 스파이크가 도착했을 때 줄리아는 떠나고 없었으며, 페이는 스파이크에게 과거의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스파이크는 또 과거와 현재를 비껴간 것이다. 그 남자의 과거와 현재 사이에 난 텅 빈 틈으로, 그렌의 고독한 재즈가 흐른다.


비셔스와 레드 아이 거래를 위해 맞닥뜨린 그렌은 사무친 그리움을 분노로 터뜨린다. 레드 아이 패키지에 몰래 폭탄을 설치한 것이다. 타이탄에서 비셔스는 오르골을 갖고 있었다. 그렌이 오르골에 대해 묻자 비셔스는 “줄리아..”라고만 짧게 답하며, 그것을 그렌에게 줬었다. 과거의 애착을 완전히 끊어버린 것일까. 그런데 그것이 또 다른 애착을 낳을 줄은 몰랐나 보다. 그렌은 오르골의 멜로디를 색소폰으로 연주하며 줄곧 비셔스와의 지난날을 추억해왔던 것이다. 그의 재즈란, 다름 아닌 비셔스였다. 레드 아이 패키지에 설치된 폭탄은 얄궂게도 오르골 멜로디와 함께 작동되어 폭발하고, 비셔스는 그 순간 아주 잠깐이나마 타이탄의 일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폭발은 비셔스를 죽게 할 만큼의 위협적인 것은 아니어서, 그는 급히 자신의 비행선을 몰아 레드 드래곤 본부로 피신한다. 이것이 그렌의 복수다. 그렌은 비셔스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jupiter jazz 003.jpg 그렌에게 줄리아의 오르골을 건네는 비셔스


jupiter jazz 004.jpg 비셔스를 향한 그렌의 적개심은, 증오라기보다 원망에 가까운 것이다


그렌은 마지막까지도 비셔스에게 배신당하고 만다. 레드 아이의 거래 비용으로 비셔스가 건넨 돈 가방 속에 폭탄이 매립되어 있었던 것. 내상을 입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렌에게, 스파이크는 줄리아의 행방을 묻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다만, 이 행성에 줄리아가 왔었다는 사실과, 그녀가 스파이크에 대해 얘기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 마지막으로 타이탄에 가보고 싶다는 그렌의 부탁을 스파이크는 말없이 들어준다. 파손된 그렌의 비행선과 자신의 비행선을 끈으로 연결하고, 넓고 깊은 우주 저편으로 그렌을 보내준다. 그렌은 무사히 타이탄으로 갔을는지.


스파이크-제트-페이 셋은 다시 비밥호로 돌아왔다. 더 큰 상실을 안은 채로, 셋은 한 공간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제트와 페이 두 사람에게는 한 가지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언제가 됐든, 스파이크는 자신들을 떠나게 되리라는 슬픈 예감이 자리 잡은 것이다. 그때가 되면, 스파이크를 놓아주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우주를 떠도는 카우보이들의 이별 방법이랄까.


jupiter jazz 005.jpg 타이탄을 주피터의 품 안에


jupiter jazz 006.jpg 서로가 서로에게 돌아갈 곳, 그러나 언젠가 때가 오면 서로가 서로를 놓아주어야 한다.


이 에피소드의 제목이 왜 ‘주피터 재즈’일까 고민했다. 주피터(목성)와 타이탄(토성의 위성)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토성 주위를 영원히 맴도는 타이탄. 그것을 멀리서 지켜봐야 하는 목성. ‘저 위성은 언제쯤 내 곁으로 와 머물러줄까’라는 생각을 목성은 하지 않을까. 색소포니스트 그렌의 ‘주피터 재즈’는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존재를 부르는 울음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그런 울음의 선율을 한 소절씩은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삶이란 채워가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씩 잃어가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우리의 스페이스 카우보이들(스파이크-제트-페이)처럼 말이다.


See you space cowboy—






※ 본문 이미지 출처: ⟨카우보이 비밥⟩ TV 시리즈 DVD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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