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피터 어센딩>
이 글에는 영화 줄거리가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워쇼스키 감독(The Wachowskis)은 <매트릭스(The Matrix)> 삼부작,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 그리고 이 글에서 다룰 <주피터 어센딩(Jupiter Ascending)>과 같은 SF영화들을 통해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해왔습니다. 특히 <매트릭스> 시리즈는 플라톤의 동굴 비유,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성경의 구원자(the one) 모티프, 화엄경의 인드라망(Indra 網) 개념 등 동서양의 여러 철학적 요소들을 그러모아 장엄한 사이버 오디세이를 펼쳐 보였습니다. 슬로베니아의 유명 철학가인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매트릭스>의 대사(“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를 제목으로 표방한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개봉한 지 십 년도 더 넘었지만, <매트릭스> 삼부작은 일종의 텍스트로서 지금껏 활발히 언급되고 있는 듯합니다.
<매트릭스> 삼부작의 주제를 얄팍하게나마 정리해본다면 ‘의심하라, 그리고 확장하라’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진리인 줄 알았던 것이 실은 시스템이었고, 실재라 맹신했던 것이 알고 보니 시뮬라크르(Simulacre)였다는 인식으로부터 <매트릭스>의 이야기는 전개됩니다. 그러나 의심에서만 그치고 만다면 너무 절망적이겠지요. 더 워쇼스키스가 제시하는 대안은 사고관의 확장입니다. 주인공 네오(Neo, 키아누 리브스 분)는 절대선(성지 시온Zion)과 절대악(인체를 배터리 삼아 가동되는 기계 세력)의 양립을 긍정한 채 중도적이며 타협적인 평화론을 추구합니다. 선과 악,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 싼 것과 비싼 것, 서양인과 동양인, 강한 것과 약한 것, 남자와 여자, 건강한 자와 병약한 자 등등 세상은 수많은 구분의 경계로 직조되어 있습니다. 씁쓸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분류 후에는 자연히 명명의 과정이 뒤따르는데, 이렇게 명명된 분류 체계 사이사이에 자본주의가 스며듭니다. 일상적인 예로, 처자식을 외국에 체류시키고 홀로 국내에 거주하는 남성이 ‘기러기 아빠’로, 출중한 커리어와 패션 감각을 갖춘 40대 미혼 여성은 ‘골드미스’로 분류 및 명명된 것이 대표적이지요. 기러기 아빠들을 위한 건강식품이 등장했는가 하면, 골드미스 마케팅 전략이라는 키워드가 생성되기도 했으니까요. 이런 현상을 제 나름대로는 ‘Grid is Greed(분류는 곧 욕망이다)’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이와 연장선상에서 아래의 인용문은 보다 명징한 해설을 제시해줍니다.
내부와 외부 같은 구별, 정상과 비정상, 미와 추는 경계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사실, 우리가 사회적 주체로 구성되기 위해서 경계의 설정은 필수적이다. 모든 사회는 건강과 질병, 미와 추, 남자와 여자, 정상과 비정상 등의 상징적 차이를 구분한다. 따라서 정상 혹은 건강이라는 관념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사회적·문화적으로 끊임없는 도전이 행해졌다. (···) 단, 지나치게 고정된 경계는 주체를 질식시킬 수 있다. 그래서 경계는 세워지는 순간에 위반되고 위반되는 순간에 재설정되는 끊임없는 진행형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노화는 건강의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건강은 진화 과정상 일시적인 적응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경계가 세워지는 구분점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질병은 중립적인 언어이다. 미셸 푸코가 말한 대로 말하는 주체와 말해지는 대상 사이에 존재하던 지식의 태도와 그곳에서 재주를 피우게 된 언어의 새로운 모습인 것이다.
최은주, <질병, 영원한 추상성>(2014, 은행나무) 중
네오가 보여준 사고관의 확장이란, 모든 경계로부터의 자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선과 악의 구분마저 넘어선 그는, 그러므로 중도의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선과 악의 존재 모두를 인정하되, 어느 한 쪽에도 쏠리지 않는(분류되려 하지 않는) 비범한 주체성을 획득한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네오는 가상세계인 매트릭스의 디지털 코드 기반을 보란 듯이 무시하며 마음껏 날아다닙니다. 사람이 날아다닐 수 없는 코드인데, 네오는 거기 걸려들지 않고 마음대로 비상하지요. 총알을 피할 필요도 없습니다. 총알이 알아서 그의 눈앞에서 멈춥니다. 그러고 보면 <매트릭스> 시리즈의 세계관을 이루는 주요한 파운데이션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매트릭스> 이야기를 길게 한 까닭은 이 작품이 더 워쇼스키스의 영화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이기 때문입니다. 두 감독들이 듣는다면 싫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후 선보인 <클라우드 아틀라스>와 최근작 <주피터 어센딩>은 <매트릭스> 삼부작의 또 다른 연작처럼 느껴집니다. 불교의 윤회론을 소재로 극화한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시대와 국적을 관통하며 오랜 시간 환생하는 캐릭터들을 보여줍니다. ‘지금 여기’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며, 과거-현재-미래는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이 윤회론의 핵심일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모든 경계로부터의 자유는 이미 <매트릭스> 삼부작에 잘 나타나 있지요. 다만 전생과 환생의 개념으로 표현되지 않았을 뿐, 기본적인 맥락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는 시대와 인종이라는 직관적이고 시각적인 소재들을 활용함으로써 ‘모든 경계로부터의 자유’ 인식을 확장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워낙 여러 인물들이 전생-환생 관계로 얽혀 있다 보니 내러티브 자체가 몹시 복잡해져버려서 어느 인물 하나 오롯이 이야기에 녹아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주피터 어센딩>은 더 워쇼스키스의 필모그래피에서 하나의 분기점으로 기록될 만한 작품입니다. 매우 밝고, 현실적으로 실천 가능한 대안을 제시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 역시 지금 여기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를 권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벗어나야 할 대상, 즉 주인공 주피터 존스(밀라 쿠니스 분), 혹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관객들에 대한 시선이 매우 온화해졌습니다. <매트릭스>의 네오를 다시 떠올려보지요.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 분)의 안내로 모피어스(로렌스 피쉬번 분)에게 인도되기까지 네오는 미숙한 개인으로 그려집니다. 자신의 회사로 찾아온 요원들을 따돌리기 위해 네오는 전화로 모피어스의 지령을 받습니다. 이 길로 가라, 저 길로 가라, 다음 모퉁이에서 잠시 숨어 있어라, ∙∙∙. 아직은 자기 판단으로 행동할 수 있는 주체성이 없는 것이지요. 게다가 모피어스가 이렇게까지 친절히(?) 가이드라인을 잡아주었음에도 결국 요원들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또한,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호에 승선한 뒤 모피어스로부터 “실재의 사막”에 대한 설명을 듣자 몹시 혼란스러워 합니다. “이건 사실이 아니야(This isn't real)!”라고 외치며 칭얼댑니다. 모피어스는 한 번 더 대못을 박지요. “네가 말하는 실재라는 게 뭔데(What is the real)?” 네오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real’에 대하여 모피어스는 ‘실재’라는 개념을 들이민 것입니다. 물론 네오는 모피어스의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합니다. 네오가 아직 진실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 못한 단계임을 보여주는 장면이지요. 이후 그가 비범한 주체로 거듭나는 데에는 짧지 않은 시간과 쉽지 않은 훈련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네오에 비해 <주피터 어센딩>의 주피터 존스는 퍽 담담히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입니다. 늑대 유전자를 가진 외계인 케인(채닝 테이텀 분)의 존재를 큰 저항 없이 인정하고, 지구 바깥에서 벌어지는 중인 외계 왕족들 간의 지구 쟁탈전 이야기도 귀 기울여 듣습니다. 또한, 이 영화의 흥미로운 극적 설정은 주피터 존스가 외계 왕족의 환생이며, 따라서 지구를 소유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피터 어센딩>에서 묘사되는 외계 왕족들의 모습은 마치 현실 세계의 자본가들을 닮았습니다. 지구인들이 죽음을 맞이할 때면 특별한 에너지가 발생하는데, 그걸 “수확”해야만 우주 재벌들의 왕국은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지구인들은 지구 밖의 세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노동 행위에 근면, 성실, 경제 발전, 가족 부양 등 다양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노동자로서의 생애를 자위합니다. 고용주(우주 재벌) 입장에서는 참 다행이죠. 굳이 채찍을 휘두르지 않아도 노동자들이 알아서 열심히 일을 해주니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거대 기업인 삼성을 예로 들어보지요. 얼마 전까지는 ‘이건희의 삼성’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제는 ‘이재용의 삼성’이 되었지요. 친족 간 경영권 승계가 흔한 한국의 기업 문화라면, 더더욱 가시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가 극명히 설정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업은 창업주 일가의 소유인 것이니까요. 그러니 ‘OOO의 삼성’이라는 소유격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겁니다. 이른바 ‘삼성맨’들은 삼성에 소속되었다기보다, 삼성에 소유되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합니다. 다른 기업의 직원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런 양상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 행위 자체가 그런 구조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걸 알면서도 예비 노동자들은 삼성과 같은 거대 기업에 들어가기를 희망합니다.(거시적 관점으로만 본다면 매우 우스운 상황이지만, 미시적 관점, 즉 개개인의 취업 혹은 생계 모티브를 이해한다면 해석이 또 달라지겠지요.)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스펙터클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그런 고급 노동력을 가동시킬 수 있는 고액 연봉을 기꺼이 지불합니다. 그렇게 투자해야만 ‘거대함’이 유지될 수 있으니까요. 이 같은 프로세스가 운영체제인 셈이고, 그 하위에 소속된(설치된) 노동자 개개인의 모티브와 삶 등등이 소프트웨어나 어플처럼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 원리입니다. <주피터 어센딩>에서는 이런 구조적 본질을 퍽 완곡히, 하지만 선명하게 표현해놓았지요. 지구인들을 자원으로 활용해 왕국을 번성시키는 외계 왕족들을 통해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지구인들은 단어 그대로 ‘인적 자원(human resource)’입니다. 그리고 노동자와 자본가가 각기 다른 이계에 살고 있다는 설정은 광년 만큼이나 아득한 계층 간 격차를 실감하게 합니다. 상위 1%와 하위 99%가 서로에게 갖는 이질감 같은 것이랄까요.
주피터 존스 역시 그런 노동자-인적 자원입니다. 미국 이주 노동자인 러시아계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고, 지금은 가정부로 일하며 화장실 청소와 빨래 등등을 주로 합니다. 남의 집 변기를 닦으며 그녀는 “I hate my life!”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단한 노동자 주피터 존스의 삶에 격변이 일어나지요. 별안간 외계인들의 습격을 받게 되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출동했다는 고독한 파이터 케인이 자초지종을 설명해줍니다. 내가 외계 왕족의 환생이라니, 지구에 대한 소유권이 있다니, 내가 왕비라니… 주피터 존스는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차분하게 케인의 말을 경청하고 납득합니다. 어찌어찌 이야기는 흘러 그녀는 은하계를 주무르는 주요 왕족 3인방 칼리크(튜펜스 미들턴 분), 타이터스(더글러스 부스 분), 발렘(에디 레드메인 분)을 차례로 만나게 됩니다. 이 셋은 현실 속 자본가들을 풍자한 캐릭터들처럼 보입니다. 중년 여성이었던 칼리크는 특수한 물로 나체를 씻어내며 마법처럼 젊음과 미모를 회복합니다. 외계에서의 귀족 성형은 가히 차원이 다르군요. 그런가 하면 타이터스는 주피터 존스와의 계약 결혼으로 그녀가 가진 지구에 대한 소유권을 양도받고자 합니다. 이를 막기 위해 발렘은 어떻게든 주피터 존스를 아예 제거해버리려고 방해공작을 펴지요. 외계 재벌 3인방의 얽히고설킨 갈등 관계는 한국 관객들에게 특히 익숙한 광경입니다. 현대그룹 ‘왕자의 난’, 삼성가 소송 등을 떠올려본다면 말이지요.
은하계에서의 모험을 마치고 주피터 존스는 다시 지구의 일상으로, 가정부로서의 노동 현실로 돌아옵니다. 환경은 그대로인데, 딱 한 가지가 변화했습니다. 주피터 존스가 자기 삶을 바라보는 태도이지요. 그녀는 더 이상 남의 집 변기를 닦으며 “I hate my life!”라고 씨근덕대지 않습니다. 주피터 존스의 변모가 ‘자신의 일과 삶을 사랑하세요’ 류의 하찮은 멘토링 내지는 힐링 따위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명확합니다.(더 워쇼스키스가 이런 가소로운 엔딩을 제시할 리도 없고요.) 그녀는 이제 하늘을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피터 존스는 케인과 함께 지구 도시의 고층 건물 옥상에서 도약하여 마음껏 비행합니다. 지구인 주피터 존스는 케인이 신고 다니던 그라운드 이펙트 부츠(ground effect boots)를 신고, 케인은 자기 등에 솟아나온 날개를 펄럭이며 도시의 창공을 날지요. 노동자 주피터 존스가 자신의 지난한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된 핵심은 그녀 스스로 ‘나는 지구의 소유자다’라는 인식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녀가 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더 이상 지구에 국한되어 있지 않지요. 그녀는 비로소 ‘우주적’ 개인이 된 것입니다. 실제로 외계인 케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녀가 케인과 도시의 하늘을 날아오르는 시간은 주로 저녁입니다. 모든 일을 다 끝내고, 가족과의 저녁 식사까지 모두 마친, 드디어 나만의 시간을 오롯이 갖게 되는 한적한 저녁에 그녀는 날아오릅니다. 그녀의 존재가 우주(케인)와 맞닿는 순간이기도 하지요. <주피터 어센딩>의 이러한 결말은 요컨대 ‘자본주의 사회 노동자의 주체성 비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비상을 위해 필요한 덕목으로 더 워쇼스키스는 두 가지를 제시한 셈입니다. 첫째, 사고를 우주적으로 확장시킬 것. 즉, 인식의 세계를 넓힐 것. 둘째, 나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질 것. 신처럼 군림하는 자본에 종속된 유약한 개인이 아니라, 스스로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는 인식을 가져볼 것. 첫번째 덕목(인식의 세계 넓히기)을 위해서는 스스로 많은 고민과 사유를 해봐야 할 것입니다. ‘늘 의심하라’라고 했던 마르크스의 제언을 참고해볼 수도 있겠지요. 고민과 사유의 방식은 저마다 다를 겁니다. 이 과정을 진중하게 펼쳐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두 번째 덕목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요. ‘나’로의 회귀 말입니다. ‘나’가 확실하다면, 영화 속 주피터가 그랫듯이 나만의 어센딩(ascending)을 경험하는 희열을 느끼게 되겠지요. 지구에 사는 그녀의 이름을 어스(Earth)가 아니라 주피터(Jupiter)로 지으면서, 더 워쇼스키스 역시 훨훨 비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더 워쇼스키스 어센딩. 차기작을 기다리며-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