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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나를, 나를 진짜 쏴버린다

<버드맨>

by 임재훈 NOWer






이 글에는 영화 줄거리가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년에 꽤 잘나갔던 중년의 무비스타가 주인공입니다. ‘버드맨’이라는 슈퍼히어로 캐릭터로 젊은 날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사나이. 1탄이 흥행에 성공하고 2탄까지 찍었으나, 왠지 배우로 사는 느낌이 아니고 대중의 어릿광대로 살아지는 기분이 들어 두 편으로 그만 영웅놀이는 끝냈습니다. 그러고는 정극 배우의 길을 보란 듯이 개척하여 연기파 배우로 대변신을 이루어내며 평단과 관객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톱스타로 재기합니다, 라는 시나리오가 진행되었어야 할 텐데 뜻대로 잘 안 풀리고, 결국 돌고 돌아 브로드웨이의 연극 무대에까지 발을 담갔습니다. 버드맨을 관둔 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사람들은 여전히 버드맨으로만 남자를 기억합니다. 완전히 다른 인간(배우)으로 거듭나고 싶은 욕망과, 그럼에도 버드맨으로 상징되는 옛 영광이며 멍에이자 우좌지간 나 자신이었음도 분명한 ‘과거’라는 녀석의 방해공작이 맞물리며 영화는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다 끌어안는 자기 극복


주인공 리건(마이클 키튼 분)의 모티브는 ‘증명’입니다. “나는 (버드맨이 아니라) 배우다!”라고 외쳐야만 하고, 그 외침이 대중으로부터 수긍되어야만 합니다. 그게 어려우니 리건은 내적으로 갈등하게 되지요. <버드맨>에는 리건을 비롯하여 세 명의 주요 인물들이 더 등장합니다. 레슬리(나오미 왓츠 분), 마이크(에드워드 노튼 분), 로라(안드레아 라이즈보로 분). 셋 다 리건의 극단에 소속된 배우들입니다.


ⓒ daum movie


곱고 얌전한 레슬리에게 리건의 극단은 꿈의 무대입니다. 연기를 공부하던 애송이 시절부터 브로드웨이 입성은 그녀의 로망이었지요. 나름 이 바닥에서 유명한 마이크와 사귄 전력도 있는데, 순수한 연애의 감정이었다기보다는 ‘브로드웨이의 스타’에 대한 동경이 더 컸던 게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레슬리는 속상한 일이 생기면 대기실에서 혼자 끙끙 앓는 스타일입니다. 누군가가 그런 모습을 발견하고 어깨라도 토닥여줘야 속내를 털어놓곤 합니다. 이렇게 여린데, 늑대들이 우글거리는 쇼비즈니스 업계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합니다.(그러고 보니, 레슬리는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소리 내어 울던 캐릭터였습니다.)

마이크는 연극계에서 연기 잘하는 배우로 정평이 난 인물입니다. 리건의 섭외 요청을 받고 위 세 명 중 제일 막내로 극단에 합류했지요. 열정인지 건방인지, 연습 첫날부터 연기에 관해 일장연설을 쏟아냅니다. 리얼리즘이 어쨌다느니, 이러쿵저러쿵. 말은 많지만 어쨌든 연기 하나는 잘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치명적인 결핍이 있었으니, 그것은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점. 배우의 자세 운운하며 순수 예술가연하지만, 실은 뜨고 싶어 안달입니다. 학창시절에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와 만났다는 리건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추억인 양 각색해 인터뷰어에게 말해버리는 치가 바로 마이크입니다. 사실적인 연기를 위해 실제 정사를 나누자며 무대 위에서 페니스를 세워 상대 여배우를 기겁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연기력 뛰어난 배우로 인정받기’라는 기준점이 있다면, 마이크는 거기에 가 닿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인물입니다.

로라는 또 어떤가요. 리건과 은밀한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미녀 배우 로라는 마치 산전수전 다 겪어본 여자 같습니다. 웬만한 일에는 별로 놀란 기색도 없고, 리허설이 다가와도 (마이크나 레슬리처럼) 호들갑을 떨지도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그저 담담히,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배우랄까요. 뭐든 혼자서 척척 해낼 것 같은 그녀에게도 약점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외로움’입니다. 로라는 특히 리건으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갈급합니다. 잘 토라지고 자꾸만 애인에게 의존하려 하지요. 동료 배우들끼리 있을 때의 쌀쌀맞다 싶을 만금 독립적인 태도와는 사뭇 다릅니다.

우리의 주인공 리건은 말하자면, 마이크와 레슬리와 로라의 단계를 모두 지나온 그야말로 노련한 배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이크처럼 성공에 눈먼 적도 있었고(그래서 <버드맨>을 찍었는지도…), 레슬리처럼 열정적 루키 시절도 거쳤을 것이며(어떤 중견 배우인들 안 그랬을까요), 로라처럼 고독을 느껴보기도 했습니다.(그는 이혼남입니다.) 배우 생활과 인생 선배로서, 리건의 내공은 단연 이들 중 최고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만렙’이라는 뜻은 아니지요.

<버드맨>은 리건이 ‘만렙’의 단계로 도약하는 데 필요한 방법론으로 ‘벌거벗기’를 제시합니다. 과거를 그냥 다 인정해버리라는 것이지요. 마이크도 인정하고, 레슬리도 인정하고, 로라도 인정하고, 그렇게 그냥 다 인정해버리는 자기 자신을, 그 맨몸뚱어리를 과감하게 대중 앞에 노출시켜보라는 종용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리건은 이 방식대로 했지요. 비록 마이크와 주먹다짐을 벌이기는 했어도, 어쨌든 그와 레슬리와 로라와 한 편의 무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마무리했습니다. 리건이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레슬리(연기를 하고 싶다), 마이크(스타가 되고 싶다), 로라(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 세 사람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지난 시절, 즉 현재의 ‘나’를 이루는 전방위적 층위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는 극적 상징 같기도 합니다.

친절하게도 이 영화는 좀 더 노골적인 장면을 통해 리건의 자아 극복을 보여줍니다. 팬티바람으로 뉴욕 시내를 활보하던 장면 말이지요. 본인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어쨌든 이 사건은 리건의 존재감을 다시금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됩니다. SNS를 통해 리건의 속옷 행보가 생중계된 덕분에.


ⓒ daum movie


똥배 튀어나온 몸으로 뉴욕 거리를 활보하던 속옷바람 리건의 모습을 트위터로 더욱 확산시켜 ‘홍보’에 도움을 준 히로인은 그의 딸 샘(엠마 스톤 분)입니다. 부모의 이혼 후 엄마와 단둘이 자랐고, 어지간히도 사고를 많이 친 말괄량이이며, 아빠를 대놓고 무시하는 천방지축이지만, 부성을 몹시도 그리워 하는 연약한 소녀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영화 촬영장의 연출부 멤버처럼, 아빠의 극단에서 각종 잡일을 도맡고 있습니다. 직업적 특성상 샘은 무대 뒤 배우들의 모습을 속속들이 다 봅니다. 무대에서 각자 역할극에 충실했던 배우들은 대기실에선 가면을 벗고 다시 ‘나’로서 울고 웃고 떠들어대지요. 샘은 요조숙녀 레슬리의 입에서도 욕설이 튀어나온다는 것도 알고, 로라와 아빠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 역시 진작에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배우들이 ‘연기’를 안 하고 있을 때, 그들은 결핍덩어리, 즉 평범한 개인임을 샘은 날마다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들이 그녀에게는 과히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녀 자신도 부성애에의 결핍을 지닌 사람이어서일까요, 타인들의 결핍에 유별나게 굴지는 않습니다.(짜증을 내기는 하지만요.) 극단적인 구석이 있는 마이크와도 유일하게 편안한 대화를 이어가기도 하지요.

요컨대 샘은 이 영화의 ‘확대경’ 같은 캐릭터입니다. 그녀를 통해서 리건과 마이크와 레슬리와 로라의 본성(무대 뒤의 내밀한 속사정)이 얼마간 노출되고 확장되기 때문이지요. 샘이 존재하기에, 다소 제정신이 아닌 듯한 캐릭터들이 어느 정도 정상적(?)인 균형감을 유지하며 스크린 밖 관객들과 소통하고 호흡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술을 하려면 예술가가 되어야 하나


<버드맨>은 예술을 논하는 영화입니다. 예술에 대하여, 그리고 예술가라는 인간에 대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만들어주지요. 리건은 어떻게든 ‘버드맨’이 아니라 ‘배우’로 인정받고 싶어하는데, 그렇다면 버드맨 수트를 입었던 리건은 배우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때도 그는 명백히 배우였으나, 그가 원한 타입의 배우는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압박이 너무나도 압도적인 나머지 버드맨의 환청이 들리기까지 하는 것일 테고요.


ⓒ https://twitter.com/bonobono_bot


위에 인용한 이미지는 트위터 ‘보노보노봇’(@bonobono_bot) 타임라인에서 캡처한 것으로, <버드맨>과 퍽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옮겨 왔습니다. 묵직한 화두를 던지는 대사입니다. 보노보노의 고민과 <버드맨> 속 리건의 갈등은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노래를 하는 것(singing)과 가수가 되는 것(being a singer) 사이, 연기를 하는 것(acting)과 배우가 되는 것(being an actor) 사이에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벽이 놓여 있을 것입니다. 타성으로부터의 인정 욕구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노래하기’, ‘연기하기’라는 본질에의 중압감은 달라질 테지요. 대중의 눈치 안 보고 오직 내 만족을 위하는 것이라면 부담 없이 노래하고 연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대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면, 그 순간부터 굉장한 투쟁이 시작되겠지요. 어느 쪽이 더 좋다고 결정짓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만, 이쪽은 이렇고 저쪽은 저렇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지요.

예를 들자면, 굳이 신춘문예나 각종 문학상을 통해 등단하지 않아도 시(라는 형태의 글)을 쓰고 소설(의 형식을 갖춘 글)을 쓸 수는 있습니다. 결과물의 완성도야 어찌 됐든, 쓰는 사람 스스로 당당하게 시든 소설이든 뭔가를 써냈다면, 적어도 등단 작가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평가받을 만한 자격은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그 평가 결과는 참혹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등단 작가들과 동등한 위치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런 평가조차도 감당할 준비가 돼 있어야겠지요. 비(非)등단 작가든 등단 작가든, 어쨌거나 ‘글 쓰는 사람들’이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글을 쓰고 싶은 것이냐, (등단)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이냐 하는 문제는 결국 개인의 차원에서 심화시켜나가야 할 숙제일 것입니다. 그렇기는 한데, <버드맨>과 함께 숙고해봐야 할 부분은, ‘기본적으로 겪어야 할 어떤 것들’이라는 게 분명히 있다는 점이지요.

리건은 앞서 설명했다시피 마이크, 레슬리, 로라의 시기를 모두 거쳐 지금의 리건이 되어 있습니다. 광기에 사로잡혀보기도 했고, 순결한 열망으로 똘똘 뭉쳐 있기도 했고, 걷잡을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과거의 합이 지금의 ‘나’, 리건입니다. 부끄러운 과거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때묻은 속옷을 관객들 앞에 다 내보일 수 있어야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다고 <버드맨>은 충고하는 듯합니다. ‘작가’라는 타이틀에 집착하다가 그것에 함몰되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기. 세간의 평가가 두려워 나홀로 예술가 코스프레나 하며 시간을 보내지 말기. 김경주 시인이 말한 “골방 미스터리가 되지 말 것”이라는 주의사항을 떠올려보아도 좋겠지요.


ⓒ daum movie


리건이 연극 무대에서 자기 머리에 총을 쏘는 장면은 그야말로 <버드맨>의 한 방입니다. 배우는 연기 중이었고, 권총 자살의 대목을 연기해야 했었으나, 배우가 제 머리통에 격발한 권총엔 실탄이 장전돼 있었습니다. ‘가짜가 아닌 진짜를 쏘다’라는 메타포가 아니겠나요. ‘연기’의 삶이 이만큼 폭발적으로 극복되는 순간은 영화 속에서든 밖에서든 참 귀한 것이지요. 그 순간에는, 타인들(관객과 평론가)이 찬사를 보내든 놀라 자빠지든 썩은 양배추를 던지든 상관없게 돼버릴 것입니다. ‘진짜’ 총으로 ‘진짜’ 내 머리를 쐈습니다. ‘진짜’ ‘나’를 쐈습니다. 살아도 진짜일 것이고, 죽어도 진짜이겠지요. 이것은 예술에 대한 문제이면서, 개인의 삶과도 직결되는 화두가 아닐는지.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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