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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훈 NOWer Jul 25. 2016

어른이 된다는 건, 거짓말이 줄어든다는 것

<위 아 영>





이 글에는 영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신입생일 때 한 남자 댄스 가수가 데뷔했습니다. 국내 대형 기획사에서 다년간 연습생 시절을 거쳐 무대에 선 신예였습니다. 잘생겼고, 춤 잘 추고, 롤러 슈즈를 타고 무대를 미끄러져 다녔습니다. 가창력은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지만 음색이 섹시했습니다. 여자 동기들이 슬슬 그 가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우리끼리 사용하던 데스크톱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 그 가수의 모습을 담아놓은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학생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는데, 음식물이 튈 만큼 격정적으로 그 스타의 매력을 극찬했죠. 저는 그때마다 시큰둥했습니다. 괜한 부아가 났던 것 같습니다. “야, 걔 군대는 언제 간대?” 하는 찌질한 대꾸를 한 기억도 납니다. 그 라이징 스타는 저와 동갑내기였습니다. 내가 고민하는 똑같은 짐을 나와 같은 나이의 그 스타에게도 지움으로써, 나 스스로 ‘무대 위의 그 녀석과 학생식당 안의 나는 동등하다.’라는 자위를 하고 싶었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 무렵의 저는, 나보다 어리거나 나와 동년배인 연예인을 거들떠도 안 보는 몹시 궁색한 취향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이십 대 초반에 벌써 부모님 집을 사드렸다는 어느 아이돌 스타의 소식을 접할 때면, 괜스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던 적도 있습니다.


그때로부터 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건방지게 견제했던 어린 연예인들도 어느새 이십 대 후반이거나 삼십 대에 진입했습니다. 개중에는 여전히 건재한 스타도 있는가 하면, 별다른 활동 없이 온라인 커뮤니티나 인터넷 연예뉴스 같은 데에나 가끔씩 가십거리로 등장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어느 순간 그들은 제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저보다 훨씬 어린 스타들을 보며 참 대단하다 여깁니다. 이십 대 때 가졌던 호기로운 경쟁심은 더는 생겨나지를 않습니다. ‘일부러 찌질해지기에는, 나는 벌써 삼십 대가 아닌가’ 하는 나 스스로에 대한 경계가 매 순간 작동하고 있고, 그보다 근본적으로, 태도가 변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저, 어린 그들을 칭찬할 뿐입니다. 그저, 칭찬하기만 합니다.

왜냐면….



Young


예전에, 이 예전이라는 것이 세월에 따라 하루하루 후퇴하는 시간이어서 마치 그들의 이전 삶이 전설이나, 비현실 혹은 모호함 속으로 파묻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그들은 적어도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광기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이런 강렬한 욕구가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기도 했다. 앞쪽으로 팽팽히 당겨진 듯한 조급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느낌으로 살았다.

조르주 페렉, <사물들> 중


동네 미용실에 갔다가 아주머니들의 보톡스 관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들으려고 들은 건 아니고, 엿들은 것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들리고 말았다’라는 쪽이 정확한 정황입니다.) 일단 보톡스를 얼굴에 주입하여 주름을 펴기 시작하면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보톡스를 충전(?)해줘야 하며, 만약 보톡스 주입이 중단될 경우 피부가 보기 흉하게 늘어져버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인위적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겼던 힘이 사라짐에 따라 순식간에 피부가 흐물흐물해진다는 것이죠.

 

제 이십 대를 돌아보건대, 보톡스로 탱탱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보톡스의 주요 성분은 패기 내지는 치기였을 것입니다. 영화 좀 찍어보겠다고 학교 선후배와 동기들을 동원해가지고는 말도 안 되는 40여 분짜리 무언가를 기어이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낙서하듯이 그려놓은 콘티북을 보면 그야말로 ‘이불킥’이 절로 나올 지경입니다. 그때 만든 영화의 몇 장면들을 캡쳐해서 몇 년 전 SNS에 올렸더니, 학교 사람들이 난리였습니다. 제발 참아달라, 이건 아니지 않느냐, 비공개로 돌려달라, …. 그런 반응들이 재미있기도 하면서 좀 미안스럽기도 해서 더 이상은 SNS에서 영화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자랑스러워 할 만한 출연작(?)을 연출해내지 못한 감독(?)의 부덕이려니 했습니다.


영화 <위 아 영>의 주인공 조쉬(벤 스틸러 분)는 다큐멘터리 감독입니다. 젊은 시절 흠모했던 다큐멘터리계 거장의 딸과 결혼하여 마흔이 넘도록 같이 살고 있죠. 그의 필모그래피는 오랜 시간 업데이트가 안 되고 있습니다. 이렇다 할 대표작 없이 벌써 사십 대가 되고 말았다는 자책 속에서, 그는 꽤 자주 울적해집니다. 한때 멘토였던 장인과도 소원해졌습니다. 장인은 사위에게 ‘넘사벽’입니다. 장인 만나는 걸 의도적으로 피하는 이유는, 자신이 결코 넘지 못할 벽의 실체를 굳이 일부러 확인하여 우울해지기 싫은 까닭일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아내 코넬리아(나오미 왓츠 분)는 남편의 고민을 잘 이해합니다. 친정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짜증을 부릴 만도 한데, 내색하지 않고 적절히 남편 편을 더 들어줍니다.


부부는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했으나 잘 안 되었습니다. 얼마 전 애를 낳아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친구네 부부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이 교차합니다. 참 예뻐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왜들 저러나 싶기도 합니다. 아이가 없어서 딱히 불행한 건 아니지만, 아이 가진 부부들과 함께할 때 느끼는 정서적 격차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좀 불편하기까지 합니다. 아이를 위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는 육아 태도가 두렵기도 하고 말입니다. 나이 드는 것도 유쾌하지 않은데, 아이한테 몰두하다가 결국 ‘나’를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입니다. 아웃사이더가 돼가는 느낌도 따라붙습니다. “사실, 내 자식보다는 여전히 나를 더 사랑해.”라는 친구 녀석의 고백을 듣고 난 뒤에야 어느 정도 마음이 가벼워지기는 하지만.


© daum movie


이런 와중에 스물세 살짜리 다비(아만다 사이프리드 분)와 제이미(아담 드라이버 분) 부부를 만나며 조쉬와 코넬리아는 한 차례 변혁을 맞습니다. 페이스북 계정조차 없고, 디지털 음원 대신 LP판과 카세트를 선호하고, 스마트 기기를 터치하는 시간에 종이에 펜으로 메모를 하는 어린 부부. 실은 조쉬와 코넬리아가 젊은 시절에 이미 경험했던 것들임에도, 이른바 스마트 시대에 그리도 아날로그적으로 살아가는 스물세 살 커플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자신들의 시대에는 분명 별것 아닌 아이템들이었건만, 지금 젊은 부부들의 손에 들리니 왠지 낯설고 컨셉츄얼하게 다가옵니다. ‘특별하게’ 보이는 것이죠. 사고와 판단에 거침이 없고, 순간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는 이십 대 부부의 성정에 묘한 동경심까지 생깁니다. 게다가 제이미는 현재 다큐멘터리 영화를 기획 중이라고 하니, 사십 대 부부는 이 당돌한 이십 대 부부에게 홀딱 반해버릴 수밖에요.


친구들이 한 명 한 명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솔직한 심정으로 좀 쓸쓸합니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 귀여운 제 아이의 모습이 하루 단위로 바뀌고, SNS에는 육아 일기가 자주 눈에 띕니다. 요즘 육아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여서인지, 자녀 가진 부부들이 올리는 자식 자랑 게시물들은 상당한 인기를 얻습니다. 그런 사진들을 타임라인에서 마주할 때면, 저 역시 <위 아 영>의 조쉬와 코넬리아 부부가 그랬던 것 같은 소외감을 느끼고 맙니다. 분명히 내 친구였는데, 이제는 내 친구가 아닌 것 같은 요상한 기분. 전혀 다른 세계로 영영 떠나버린 것 같은 허탈감. 친구들이 하나씩 줄어드는 듯한 불안감. 이런 감정들의 합은 끝내 쓸쓸함입니다.

 

이 쓸쓸함의 근원을 딱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부모님 세대 때의 육아와 비교하면서 이 쓸쓸함에 대해 공감을 구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부모님 세대 역시 자식들의 성장 기록을 사진으로 무수히 남기셨을 테죠. 지금 부부들과 차이가 있다면, 부모님 세대는 그 사진을 앨범 안에 넣어두었다는 것입니다. 굳이 말을 붙이자면 ‘폐쇄형’ 육아 일기인 셈입니다. 요즘처럼 인터넷과 SNS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내 소중한 자식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앨범에 고이 간직한다, 그리고 이따금 꺼내어 본다, 훗날 내 자식이 자랐을 때 이 앨범을 보여주며 지난날을 추억한다, 남들이 다 못났다고 해도 내 눈에는 세상에서 최고로 잘생기고 예쁜 우리 아들딸의 유년기를 차곡차곡 기록한다, …. 집들이 때 놀러 오는 지인들에게 쑥스럽게 앨범을 보여주는 게 그나마 자식 자랑을 해보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폐쇄형 육아 일기의 형태가 참 곱다고 생각합니다. 그립기도 합니다. 요란하지 않게, 내 가족의 품 안에, 우리 집 안에, 고이 내 자식의 기록을 보관해두는 부모 마음이랄까요.

 

“우리 애 사진에 좋아요 좀 눌러주고 그래~” 하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은 “내 아이가 귀엽다고 말해. 내 아이가 예쁘다고 인정하란 말야!” 하는 말로 들린다면 지나친 악의적 해석이려나요. 최근 폐쇄형 SNS 플랫폼이 알게 모르게 각광받고 있는 건, 어쩌면 개방형에 질린 (저 같은) 유저들이 하나둘씩 늘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출산과 육아에 대한 이런저런 세속적 고민, 그리고 저마다의 담론과 갈등은 나 자신과 내 친구들이 나이 들어간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점차 신경 쓸 게 많아지는 것. 눈치 봐야 할 상황이 늘어난다는 것. 영화 속 다비와 제이미 부부에겐 아직 이 단계가 안 왔습니다. 이적 씨와 유재석 씨가 부른 노랫말처럼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말하는 대로’ 다 해볼 수 있(다고 믿)는 커플. 조쉬와 코넬리아 부부도 한때는 그랬을 텐데.



Old


타고르의 「장난감」이라는 시가 있다. 좀 길지만 번역해보자.

   아이야, 너는 땅바닥에 앉아서 정말 행복스럽구나, 아침나절을 줄곧 나무때기를 가지고 놀면서!'
   나는 네가 그런 조그만 나무때기를 갖고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나는 나의 계산에 바쁘다, 시간으로 계산을 메꾸어버리기 때문에.
   아마도 너는 나를 보고 생각할 것이다, 「너의 아침을 저렇게 보잘것없는 일에 보내다니 참말로 바보 같은 장난이로군!」 하고.
   아이야, 나는 나무때기와 진흙에 열중하는 법을 잊어버렸단다.
   나는 값비싼 장난감을 찾고 있다, 그리고 금덩어리와 은덩어리를 모으고 있다.
   너는 눈에 띄는 어떤 물건으로도 즐거운 장난을 만들어낸다. 나는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에 나의 시간과 힘을 다 써버린다.
   나는 나의 가냘픈 쪽배로 욕망의 대해(大海)를 건너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자기도 역시 유희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타고르의 이런 시를 읽으면 한참 동안 눈이 시리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런 쉬운 말로 이런 고운 시를 쓸 수 있으니. 이런 쉬운 말로 이런 심오한 경고를 할 수 있으니. 사회비평이나 문명비평도 좀 더 이렇게 따뜻하게 하고 싶다. 그것이 더 가슴에 온다. 세상이 날이 갈수록 소란하고 살벌해만지는 것을 보면, 이제는 소리를 지르는 데는 지쳤다. 기발한 것도 싫고 너무 독창성에만 위주하는 것도 싫고 그저 진실하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진실을 추구하다 타고르의 시보다 더 따분한 시를 쓰게 되어도 좋을 것 같다.

김수영, <김수영 전집 2 산문> 중


조쉬는 제이미를 좋아합니다. 오랜만에 마음 통하는 친구를 사귀었다고까지 믿습니다. 아쉽게도 믿음은 곧 깨지죠. 제이미의 다큐 촬영을 돕기로 한 조쉬는 슬슬 이 녀석이 순수하지 않다는 걸 알아챕니다. 조쉬와 코넬리아 부부와 가까워진 것은 코넬리아의 아버지(다큐계 거장)를 만나기 위한 의도적 접근이었죠. 제이미의 ‘뜨고 싶은 욕망’은 다큐 촬영 현장에서 드러납니다. 카메라를 잡은 조쉬가 갑자기 당황합니다.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았는데 줌인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죠. 앵글은 서서히 제이미의 얼굴을 잡아당겨 그의 진솔한(혹은 진솔해 보이는) 얼굴을 오랫동안 잡습니다. 불행한 과거사를 고백하는 제이미의 클로즈업 된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습니다. 제이미의 손에는 카메라 리모컨이 들려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줌인 하는 이 오그라드는 현장! 실로 역대급 셀카입니다. 다큐의 진실성을 강조하는 조쉬로서는 절대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죠. 그런데도 결국 다큐는 완성되고, 심지어 호평까지 받습니다. 다큐계 거장인 장인어른까지 나서서 제이미를 치켜세우죠. 아무도 조쉬의 비판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사십 대 루저 감독이 이십 대 신예 천재를 질투한다는 시선이 조쉬의 진심을 아프게 찌릅니다.


<위 아 영>은 제이미의 성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스물세 살 다큐 감독 제이미는 스타로 부상하고, 유력 매체에 인터뷰도 실립니다. 제이미를 보며 분노할 법도 한 조쉬의 차분한 자각은 이 영화의 압권입니다. “그는 악마가 아니었어. 그저 젊을 뿐이지.”

저 역시 재능 많고 나이 어린 스타들을 TV로 지켜보는 태도가 시간이 흐를수록 변한다는 걸 느낍니다. 내가 이십 대 때 노력하지 못한 것들을 TV 속의 저 아이들은 근사하게 해내고 있다, 저들은 저들만의 방식으로 노력하여 저들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거기에 반박할 거리는 없다, 나는 저들만큼 치열하게 이십 대를 보내지 않았다, 저들만큼 팽팽하지 못했다, 적당히 느슨했다, 지금도 적당히 느슨하게 살고 있다, …. 뭔가 아쉽기는 한데, 이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갖지 않은 채로 나이 드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나이 듦이란 본래 이런 거다, 하고 지금은 여기는 쪽입니다.

 

역설 같지만 아쉬움이 많기 때문에 거짓말이 줄어듭니다. 미래에의 포부로 들떠 있던 이십 대에는 참 많은 계획과 구상 들을 사람들 앞에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런 나의 모습을 선배들과 선생님들이 칭찬해주면 나는 그 순간 초인이 되었습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아쉬울 게 없었습니다. 영화 속 제이미의 대사처럼 “지금으로서는 죽지도 않을 것 같아요.” 하는 심정. 긴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의 계획과 구상 들 대부분은 모두 거짓말로 남았습니다. 내가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욕망에 충실한 진심이었으나, 사실에 입각한다면 거짓으로 판명되었죠. 좀 꼰대스러운 말일지도 모르는데, 지금 이십 대들의 당찬 태도는 절반 이상이 거짓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본인들 스스로 서서히 알게 되는 것이 나이 들어감의 무서움일 테죠. TV에 나오는 수많은 아이돌 스타들에게 질투를 느꼈던 제 지난날 역시 거짓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질투했던 게 아니라, 제 느슨함을 보호하고 싶었던 것이었으니까요. 웃긴 말이지만, 제게는 느슨함이 맞았습니다. 팽팽하게 나를 헌신하는 삶은 감당할 깜냥이 안 되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식대로 사는 것이라고 지금의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진실해야겠죠. <위 아 영>의 조쉬는 기어이 대표작 하나 없이 고만고만한 꼰대 다큐 감독으로 남을지 모르지만, ‘다큐는 허구가 아니다’라는 자신만의 터프한 원칙을 고수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가치 있는 인생이 아닐까요. 우좌지간 스스로를 속이지는 않았으니까.


© daum movie


아쉬움이 많기 때문에 거짓말을 안 하게 된다, 라는 것은, 훗날 또 다른 아쉬움을 남기기 싫어서입니다. 어린 천재들을 그저 칭찬할 수밖에 없는 건, 그들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는 탓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내 앞가림하기에도 바쁜’ 것이고, 조금 그럴싸하게 둘러대면 ‘좀 더 나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입니다. 나에게 집중하게 되면, 생리적으로 거짓말은 잘 안 나옵니다. 이러다가 곧이곧대로만 말하는 따분한 인간이 될까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따분한 만큼 따듯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아직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따듯해지는 만큼, 왠지 외로운 어른이 될 것 같다는 불안감도 있죠. 나이 들어간다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P.S

<위 아 영>의 원제는 <While We’re Young>입니다. ‘우리가 젊은 동안’. 뒤에 따라올 마무리 문구는 관객들의 몫입니다. 우리가 젊은 동안 정신 차리자, 우리가 젊은 동안 하고 싶은 것 실컷 하자, 우리가 젊은 동안 거짓말은 하지 말자, 우리가 젊은 동안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자, …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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