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들이요, 꽈앙, 꽈앙, 무섭게 빛나더라고요.”
태국 음식점 맛있타이, 스페인 음식점 레알맛들이드, 가정식 백반집 가정오락관, 퓨전 스테이크 하우스 옛썰, 잔치국수 전문점 잔치투나잇, 24시간 서양 가정식 전문점 윌리엄야그너의헛간, HOF 개구쟁이술머프, FUSION HOF 어른이대공원, CHIKEN IS NOTHING 아디닭스, ······.
회사 주변 간판들은 김의 눈에 블로그 콘텐츠 타이틀처럼 보였다. 초미세먼지 먹는 식물 어벤져스, 새봄 씨 우리 청소할래요? 새봄 맞이 대청소 팁, 무더위 씹어먹는 여름철 보양식 끝판왕 3종, 며느리 말고 집 나간 입맛을 돌려드립니다! 가을 전어 영양 상식, 국가님께서 13월의 월급을 입금하셨습니다! 프로 직장러 위한 연말정산 퀵스텝, ······. 문장 구조도 단어 쓰임새도 다른데, 왜 간판들과 콘텐츠 제목들이 서로 겹쳐지는 걸까. 김은 간판들과 콘텐츠 제목들의 유사성을 파악하고 싶었다.
너무 늦게 내려왔죠. 죄송해요 대리님. 추우셨을 텐데 먼저 식당 가 계시지. 메일 전송이 하도 느려서요.
헐레벌떡 사옥 출입문을 잠그며 기가 말했다.
퀴즈 콘텐츠 파일이 대용량이라 그런가 보네. 회사 메일 서버가 원래 잘 버벅거려. 둘한테 다 보냈지?
아, 한 분한테만 보냈는데. 몽쉘 주셨던 분요.
다음번엔 팀장 아저씨한테도 같이 보내. 수고했다.
김과 기가 종종 가는 이십사시간 뼈해장국 전문점 뼈있는한그릇 문은 닫혀 있었다. 집회 참석으로 쉽니다. 뼈 있는 대한민국 파이팅! REMEMBER 0416. 굵은 돋움체가 인쇄된 A4 용지가 유리문 안쪽에 붙어 있었다.
뼈있는한그릇 대신 찾아간 식당이 기는 좋은 모양이었다. 김도 싫지 않았다. 삼층인 데다 한 면 전체가 폴딩도어로 돼 있어 시야가 탁 트였다. 기를 기다리며 하나씩 올려다봤던 간판들이 이제는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여기 이름 재밌어요. 윌리엄야그너의헛간.
야그너는 뭔지 알겠는데, 윌리엄이랑 헛간은 그냥 갖다붙인 건가?
윌리엄 포크너라고, 소설가거든요. 작품 중에 헛간 방화라고, 헛간 태우기였나, 그런 게 있을 거예요.
그래서 윌리엄이고 헛간이라고? 소설가랑 야근하는 직장인들이랑 헛간은 엮일 게 없잖아. 갖다붙인 거 맞네.
의역하기 나름이죠. 야근족을 소설가로 격상시켜주고 싶었나 보죠 뭐. 아니면, 소설가가 태워버리기 전에 얼른 들어와서 쉬다 가라는 뜻이거나요.
기가 웃었고, 김도 웃어넘겼다.
주문한 수비드 스테이크 정식과 스파이시 해물 리조또가 나왔다. 몇 안 되는 오징어 조각부터 포크로 쏙쏙 골라 먹으며 기가 말했다.
아까 윤 대리님하고 인턴 나영 씨요, 두 분 혹시 사내 커플이세요? 느낌이 좀 그렇던데. 나란히 광화문 가시나 보더라고요. 종이백에 플랜카드까지 넣어가지고. 지금 엄청 추울 텐데. 오늘은 총궐기라 새벽까지 이어질 거래요. 대리님하고 저는 미리 잘 다녀온 것 같아요. 안 그래요?
걔 대리 아니야.
대리님하고 동기시라고 들었는데요?
응. 맞는데, 아직 대리 아니야. 너도 열심히 해. 인사 평가 잘 받으려면.
기가 오징어 한 조각이 꽂힌 포크를 리조또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컵에 물을 따라 마실 때 기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김은 썰어놓은 스테이크 덩이 하나를 기의 접시에 올렸다.
지금 하는 대로만 대행 잘 하면 돼. 인사 평가 별것 아냐. 걱정하지 마. 고기 좀 먹어봐. 수비드 공법이라는데, 뭔가 좀 맛있네.
진짜 수비드 맞을까요?
수비드가 정확히 뭔데?
용어 뜻은 진공저온이고요, 진공 포장된 고기를 육십 도 정도 열로 익하는 거래요. 브이제이특공대에서 봤어요. 일반적인 고기 조리 온도보다 열을 낮추는 건데요, 그렇게 하면 육질이랑 풍미가 더 살아난대요.
그래? 손이 많이 갈 것 같은데, 이 집은 육천 원밖에 안 받네?
그러게요.
간판 이름처럼 수비드도 그냥 갖다붙인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몰라요. 그래서 진짜 수비드가 맞나 의심해본 거예요. 요즘 같은 시국에는 전부 의심해봐야죠.
기와 시시덕거리다 보니, 김은 회사 근처 간판들이 블로그 콘텐츠 제목처럼 느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갖다붙인 것들이라는 공통점 때문 아닐까? 이 의문문이 잠정 결론이었다.
초미세먼지 먹는 식물들에 어벤져스를, 새봄에 새봄 씨라는 호칭을, 야그너에 윌리엄과 헛간을, 육천 원짜리 고기에 수비드를 각각 갖다붙이며, 한쪽은 콘텐츠를 다른 쪽은 서양식 가정식을 팔고 있는 거라고, 김은 여겼다. 기업들을 대신해 만들고 제공하는 콘텐츠들이 건당 육천 원어치쯤은 되겠는지, 토요일 야근 끝내고 먹는 수비드 스테이크 정식만큼의 가성비와 가치를 지닐지, 먹지도 못하는 걸 대중에게 먹히도록 음식 모형을 제조하는 셈은 아닌지, 김은 꼬투리를 물다가 꼴답잖은 말장난 같아 관두었다.
한 잔 하실래요? 제가 개카로 쏠게요.
김이 계산대 앞에서 법인카드를 꺼낼 때 기가 말했다. 기의 입사 날짜는 시월 이십육일이고 오늘이 십일월 십이일이니, 첫 월급까지는 십여 일을 더 기다려야 했다. 계산을 하며 김은 웃었다.
헛간을 나와서도 기는 계속 보챘다. 돈 있다고, 오늘은 꼭 대리님과 한 잔 하고 싶다고, 오늘만큼은 진짜 자기가 사드리고 싶다고, 집에 가려는 김을 기는 붙잡았다.
윌리엄야그너의헛간 다음 장소는 어른이대공원이었다. 대공원은 사방에 창문이라고는 없는 일층차리 벽돌 건물이었다. 공간 자체는 널찍했으나 수십 개 테이블이 다닥다닥 도열된 구조였다. 동선은 두 사람이 겨우 나란할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았다. 환기도 안 되는 데다가 내부 화장실 옆에는 흡연 부스까지 있어서, 출입문이 여닫힐 때마다 냄새가 새나왔다. 희고 가는 연기 몇 가닥이 천장에 매달린 한지 조명들의 노르께한 채도 밑에 늘어져 있기도 했다. 김은 술집을 옮기고 싶었지만 기가 하도 달싹거려서 참기로 했다.
그대는 나에게, 끝없는 이야기, 간절한 그리움― 대공원 스피커의 노래를 기는 계속 흥얼댔고, 주문을 마친 뒤에야 가창을 멈췄다. 그러고는 주문이라도 외우듯 빠른 속도로 말하기를 이어갔다.
여기서는 다 어른이들인 거죠? 어른이 되지 못한 어린이들이란 뜻인가? 어린이가 어른이로 급성장한 건가? 대리님은 어떤 해석이 마음에 드세요?
가게 이름이 묘해요. ㅣ가 ㅡ로 쓰러진 거잖아요. 어린에서 어른으로요. 제가 내년에 서른인데요. 진짜 한 해 한 해, 수직이었던 것들이 점점 수평으로 기우는 느낌이거든요. 어릴 때는 올려다보기도 하고 내려다보기도 했는데, 지금은 전면이랑 좌우 살피기 바빠요. 사고 안 내고 앞길 찾아가느라요. 예전 회사 망하고 나서 더 심해졌어요. 무사고 전진의 압박감이랄까···.
근데요 대리님, 아까 광화문에서는 탁 트이던데요? 와, 그 사람들요, 대리님도 같이 보셨잖아요. 내가 이 속에 있다, 우리도 함께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드니까 진짜 어른으로서 뭔가 할 일을 한 기분이던데요?
의문문인지 감탄문인지 헷갈리는 기의 문장들이 잠시 멎었을 때 오백 씨씨 맥주 두 잔이 나왔다. 김은 곧바로 긴 한모금을 마셨다.
우리?
턱밑에 묻은 맥주 액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김이 재차 물었다.
우리, 라고 할 수 있나? 우리는 거기 없었잖아.
그래도요, 거기를 봤잖아요.
그래도, 거기 있었던 건 아니잖아.
없었다고도 할 수 없죠. 어쨌건, 거기에 있었으니까 거기를 본 거잖아요.
어쨌건, 거기 안에 있었던 건 아니잖아. 너랑 나는 우성그룹 안에 있었지. 우리 회의하는 동안 거기는 우리 바깥이었잖아. 너가 말하는 우리 안에 우리는 없었어.
그래도요.
친구랑은 무슨 가게 했던 거?
기가 추가 주문한 맥주를 집어 올릴 때 김은 화제를 바꿨다.
포차 했었어요. 인천집이라고. 같이한 건 아니고요, 개업 초반에만 반짝 도와준 거예요.
인천? 대전이라고 하지 않았나?
대리님 기억력 좋으시다.
기가 제 맥주잔을 김 쪽으로 올려 뻗었고, 김의 맥주잔도 따라 올라와줬다.
포차 이름이 인천집이었어요. 가게 낸 동네가 대전에서 좀 외지고 어둑한 데였거든요. 밤 열 시도 안 돼서 주변 업소들 다 문 닫고. 친구가 글 쓰는 애거든요. 가겟집 보러 다닐 때 그 동네 가더니 딱 여기라고, 엄청 마음에 들어 했거든요. 그때가 한 일고여덟 시쯤이었는데, 벌써 불 꺼진 간판들이 많았거든요. 자기가 좋아하는 시랑 느낌이 비슷하다고, 딱 흑백의 자막 속이라고, 막 그랬거든요. 저한테도 읽어보라고 막 그러고.
그 시에 인천집이라는 술집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포차도 인천집이라고 해놓고, 간판도 시에 나온 것처럼 인천만 한자로 쓰고 집은 한글로, 어질 인, 내 천, 집, 딱 써가지고, 막 그랬거든요. 그 시 몇 구절도 손으로 딱 써가지고 표구도 하고, 군번줄이랑 같이 포차 벽에 딱 걸어놓고, 막 그러고. 그러느라 그 시 실린 시집도 사고, 저랑 행주 기 씨 동본인 것도 시인 이름 검색해서 알고 막 그랬거든요.
가게 근방에 군인 아파트가 있었거든요. 장교들하고 부사관들이 술 마시러들 오고 그랬거든요. 포차 시작할 때가 겨울 끝물이었는데, 손님 모으려고 친구랑 저랑 사제 군용 파카 입고 영업하고 그랬거든요······.
입사 지원 시 첨부된 포트폴리오 원고의 성실한 어미 변화를 떠올리며, 김은 기의 동일 어미 반복을 걱정했다. 기는 등판에 ‘어른이’ 세 자가 흰색 궁서체로 적힌 검정 티셔츠 차림 종업원을 불러 오백 한 잔을 더 시켰다.
그때 벽에 걸었던 시구를 제가 직접 썼거든요. 붓펜으로 막. 지금 생각하면 그게 나름 캘리그래피였거든요. 아직도 외우거든요 그걸.
흠집투성이 흑백의 자막 속을
한 사내가 천천히 걷고 있다.
무슨 농구처럼 굽은 손가락들, 어디선가 빠뜨려버린
몇 병의 취기를 기억해내며 사내는
문닫힌 상회 앞에서 마지막 담배와 헤어진다.
자막이랑 농구랑 상회가 원문에서는 한자거든요. 한자 읽는 손님들이 한자 못 읽는 손님들 들으라는 것처럼 제가 쓴 그걸 소리 내서 읽고 막 그랬거든요. 그러면서 술 한 병 더 시키고. 시 좋다고들 그러면 저도 괜히 좋아가지고, 제가 쓴 시도 아닌데 옥수수볼 서비스도 드리고 막.
기는 갑자기 말을 끊고, 막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 틈에 김도 담뱃갑과 라이터를 챙겨 공원 밖으로 나왔다.
술집들 사이사이의 밥집 간판들은 대부분 어두워져 있었다. 김은 기가 암송한 “흑백의 字幕”을 떠올렸다. 불 꺼진 밥집들은 그 자막들 덕분으로, 몇 시간 전까지 불 켜진 밥집이었고 앞으로 몇 시간 후면 다시 불을 켤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한밤중 거리에 간판들이 없다면, 자막 없는 외화의 씬 같을 거라고 김은 상상했다. 의미가 생략된 빈 공간들의 나열일 것이고, 그런 사정은 한낮의 간판 없는 거리도 마찬가지일 듯했다.
우성그룹 회의실 안에서 내려다본 바깥 장면을 김은 다시 생각했다. 촛불들, 주문을 외우자던 노랫말들, 촛불들과 노랫말을 꺼뜨리려 펄럭였지만 결과적으로 광장 전체를 너울대도록 바람을 내준 셈처럼 보였던 국기들, ······. 모두 다 그곳의 자막이었다고, 김은 뒤늦게 해석해보았다.
그러나 어떤 장면을 자막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 터였다. 시구 몇 줄 주워섬긴다고 시집을 통째 알은체하기란 염치없는 짓이고, 마찬가지로 그 광장 또한 섣부른 단평을 삼가야 할 대상 아닌가··· 광장의 너울대는 풍경과 펄럭이는 효과음과 자막을 보고 읽었을 뿐인 관객에 지나지 않나. 그 씬과 자막의 주체는 아니지 않나··· 김은 체머리 앓듯 고갯짓을 하며 제 해석을 재고했다. 담배 한 대를 더 피우려는데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 없는데 큰일이네. 검은 외투를 털며 앉는 김을, 기는 빤히 쳐다봤다. 기 앞에는 그새 새 맥주가 놓여 있었다. 김도 얼마 안 남은 헌 잔을 비우고 새 오백을 시켰다.
대리님 그 코트요오, 제가 잘 어울린다고 말씀드린 뒤로요오, 더어 자주 입으시는 거 아니에요?
기의 음성은 성실하지 못하게 흐느적거렸고, 또 시구를 들먹였다.
이 밤,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
꽝꽝 빛나는, 이 무서운 백야.
아까 거기도 진짜 밝았는데. 맞죠 대리님? 백야 같지 않았어요?
자꾸 시 좀 갖다붙이지 마라. 그거 왜곡이야.
사수의 타박에도 아랑곳없이 기는 하려던 말을 마쳤다.
촛불들이요, 꽈앙, 꽈앙, 무섭게 빛나더라고요.
의자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기울어진 뒤에야 기의 입은 다물렸다. 김은 윌리엄야그너의헛간에 이어 어른이대공원에서 또 계산을 했다.
오늘 제가 사드리려고 했는데··· 언제요오, 인천집 한번 같이 가요 대리님. 거기요오, 지인짜 괜찮아요.
택시 뒷좌석에 밀어넣어진 기가 흐늑댔다. 차문과 기의 입이 동시에 닫혔다. 짓눈깨비 내리는 일요일 새벽, 대공원의 어른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연재 소설 <기형도를 오독하다> #11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