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기형도를 오독하다」 #9

“체육대회 날짜가 언제입니까.” / “사월 십육일이에요.”

by 임재훈 NOWer



토탈커뮤니케이션즈(Total Communications) 기획실 신입사원 석과 성기는 수습 기간 다섯 달을 지낸 직후 첫 과제를 하달받았다. 사내 임직원 전원이 참여하는 춘계체육대회 기획 건이었다. 실장은 사옥 일층 카페에 둘을 앉혀놓고 말했다.

토탈컴즈 사내 행사들은 다 사층에서 진행해요. 우리 층이, 기획하는 데니까. 내가 김석 씨랑 윤성기 씨 기획력을 테스트해보려고 체육대회 건을 맡긴 건 아니고요. 물론 그 이유도 없진 않지만. 아무튼, 제일 큰 건 딴 층 사람들이랑 두루두루 친해지게 하려는 거예요. 사층 업무가 대행이잖아요. 직원들이 자기 클라이언트 상대하느라 정신없거든요. 우리 회사 직원들하고 교류할 일이 거의 없어요. 아마 체육대회 프로그램 짜려면 일층부터 오층까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야 할 거예요. 단체복 맞추는 일만 해도 전 직원 치수를 수렴해야 하니까. 입사 초에 직원들 얼굴이랑 이름 익혀두면 둘 회사 생활에 여러 모로 이득일 거예요. 나중에 저한테 고마워 할 걸요?

실장이 웃었고 석도 따라 웃었다. 성기는 웃지 않고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체육대회 날짜가 언제입니까.

사월 십육일이에요. 다다음주 금요일. 그날은 오전 근무만 하고 전 직원 다 이동하는 거예요.

십육일은 월요일일 텐데요? 제가 그날이 생일이라.

아, 그래요? 내가 잘못 알았나?

십삼일이 금요일일 겁니다. 이동 장소는 어디입니까?

그건 이제 정해야죠. 두 사람이. 작년에는 한강시민공원에서 했어요. 망원지구가 우리 회사랑 가깝잖아요. 거기 조그만 공설운동장이 하나 있거든요.

했던 데서 또 하면 좀, 성의 없어 보일까요?

뭐 어때요. 멀리 나가는 것보다 훨씬 낫죠.

현수막도 있어야겠죠?

작년에는 있었어요.

이천십이년 토탈컴즈 사내 춘계체육대회, 이렇게 문구 만들면 될까요.

그래요. 날짜랑 요일도 작게 넣어주고.

네, 실장님.

성기 씨 이력서 보니까 대학 때 학생회 활동도 일 년인가 했다면서요. 학술국 총무랬나? 행사 진행 같은 것도 많이 해봤겠네요?

많이는 아니고 몇 번인가 해봤습니다.

그러면 뭐, 알아서 잘 하겠네. 석 씨랑 잘 준비해봐요. 그런데 두 사람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으니까, 형제 같네 꼭. 내가 성기 씨랑 석 씨 왜 뽑았게요? 둘이 너무 닮아서.

실장이 소리 내 웃었고, 석과 성기도 얌전히 따라 웃었다. 실장은 석과 성기를 차례로 빤히 쳐다보다가 웃음을 그쳤다.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일지 지켜보겠어요.


사층 회의실에서 성기는 기획서 공동 작성을 제안했다. 각 층 직원들과 통성명하고 얼굴 익혀두라는 것은 명분일 뿐일 테고, 본업 외의 잡무인 체육대회 준비 작업 따위 신입 둘에게 맡겨버리자는 심산이 본의일 것이 빤한데, 그럴수록 우리가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해줘야 한다고, 딱 부러지게 토탈컴즈 춘계체육대회 진행 기획안을 문서화해서 여봐란듯이 내놓아보자고, 우리 둘이 호기 한번 부려서 초장에 제대로 점수 따놓자고, 강하게 제의했다. 석은 못마땅했다. 안 해도 될 일을 구태여 덧붙여 크게 키우는 짓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석아, 너는 검색만 해. 체육대회 때 할 만한 게임들, 단체복 싸게 주문할 수 있는 업체, 도시락 대량 주문 가능한 데 좀 알아보고 있어. 내가 기획서 틀은 파워포인트로 짜놓을게. 이따 저녁에 너가 조사한 결과 같이 얘기하면서 최종안 만들자. 문서 작업 부담스러우면 내가 하면 되니까, 검색만 꼼꼼히 해줘.

너 꼭 내 상사 같다.

직장 들어간 학교 선배들이 그러더라고. 신입 때는 누가 안 시켜도 일을 찾아서 하래. 까일 때 까이더라도 일을 자꾸 벌리래. 그래야 잘 큰대. 잘 커야 잘릴 때 잘리더라도 다른 회사에 쉽게 자리 잡는대. 여기 중소기업이잖아.

우리가 무슨 묘목이냐.

재목이지.

재목은 벌목된 거잖냐.

성기는 더 대꾸 않고 피식, 웃기만 했다. 동생의 철없는 불만을 웃어넘기는 듯한, 형 같은 의젓한 웃음이었다. 석은 자신이 잡고 늘어뜨리려 한 말꼬리가 잘려 나간 것 같아 분했다. 더 붙잡아봤자 동생밖에는 못 될 듯했다. 석은 동기의 의젓함을 따라하며 자기도 피식, 웃어주었다.


회사 야유회 레크리에이션, 사내 체육대회 게임, 단합대회 때 하면 좋은 놀이, 단체복 유니폼 주문, 기업 행사 도시락 배달, ······.

두 시간 넘게 석은 검색 중이었다. 석의 자리 모니터 화면은 인터넷 브라우저 창들로 덮여 있었다. 레크리에이션(게임, 놀이), 단체복(유니폼), 도시락 등 각각의 검색 키워드별로 브라우저를 따로 띄워놓은 탓이었다. 여러 정보를 동시다발로 검색할 때는 서칭타깃 하나당 창 한 개씩 열어야 편하다고, 그래야 검색결과를 일목요연히 수습해 정리할 수 있다고, 동갑내기 성기는 취업 전에 인터넷 검색사 자격증 시험 준비하다가 알게 된 노하우라면서 석에게 조언했다. 그러냐, 잘났다, 그런데 자격증은 왜 못 땄냐, 회의실에서처럼 또 시비를 걸어볼까 하다가 석은 관두었다. 유일한 입사 동기와 서먹해진다면 회사 적응이 더 어려워질 것 같아서였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요? 이러면 컴퓨터 속도 느려질 텐데. 황 과장이 의자 바퀴를 굴려 부사수 자리로 다가와 말했다. 동기가 이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라고 대답하려다 석은 말았다. 남 핑계 대며 책임을 회피하는 모양새가 될 것 같았고, 신입사원으로서 보이지 말아야 할 태도라 생각했다. 황 과장은 작년에 거래했던 단체복 및 도시락 주문 업체 번호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진즉 나한테 물어보지 그랬어요. 왜 안 해도 될 고생을 하고 그래요. 내가 어려워요? 나 무서워 하는 사람은 우리 남편밖에 없는데. 석은 사수에게 죄송하다고 했고, 황 과장은 부사수 앞에서 생글거렸다.

제 동기 옆에도 황 과장님 같은 분이 계신다면 좋을 텐데요.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석은 앉은 자세로 허리를 꾸뻑 굽혔다.

성기에게는 아직 사수가 없었다. 이천십일년 시월 입사 때부터 오개월이 지나도록 사수 자리는 빈 채였다. 출산 휴가 중이라는 것이 수습 기간 중 석과 성기가 실장에게서 들은 설명이었다.

황 과장은 의자에서 엉덩이만 살짝 띄워 파티션 너머 성기를 건너다보더니 부사수에게 바짝 다가왔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하는 사수를 석도 똑같이 따라했다.

여기는 출산 휴가 없어요. 그분, 임신하고서 그만두신 거고 지금 새 직원 뽑는 중이에요. 회사 이미지 좋게 보이려고 석 씨랑 성기 씨한테 그렇게 말씀하셨나 보네. 요즘 젊은 친구들은 회사 고를 때 사내 복지 엄청 따진다면서요. 우리 때는 월급만 제때 나오면 오케이였는데. 일 년 미만 사원들 퇴사율 줄이는 게 요새 우리 회사 미션이에요. 일 다 가르쳐놓으면 다들 나가버리니까. 석 씨는 그러면 안 돼요.

그러면 성기는 지금 무슨 일을 합니까?

내가 조금씩 던져주고 있어요. 씨엠씨그룹 블로그 원고 한두 건씩 써보라고. 글은 곧잘 쓰는 것 같은데, 문장이 좀 뭐랄까, 너무 주관적이더라고. 문장마다 ‘나’라는 주어를 숨겨놓은 느낌이에요.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이해하기 쉬울까. 아니다. 설명 안 하는 게 차라리 낫겠어요. 석 씨 글은 딱 좋더라고. 드라이한 게 딱 기업 홍보 텍스트랑 결이 맞아요. 그냥 그대로만 계속 써요. 지네랑 개미 얘기 알아요? 개미가 지네한테 넌 어떻게 그렇게 많은 다리로 잘도 가냐고 물으니까 지네가 별안간 더 가지를 못하더래요. 그러게? 내가 이 다리들을 움직이는 원리가 대체 뭐지? 이러면서 생각이 많아진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다리를 못 쓰게 돼버렸다는 거예요.

무서운 얘기네요.

깊이 고민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만, 지네가 다리 쓰듯이 그렇게 계속 써요 석 씨는.

알겠습니다 과장님.

황 과장의 호평 덕에 석은 입사 동기의 형이 된 기분이 들었다. 성기와 소원해지더라도 회사 적응은 잘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사수와도 한결 친밀해진 것 같아서, 석 달 수습 기간 내내 딱딱했던 자기 자리가 이제야 푹신해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체육대회 때 할 게임 아이디어 하나도 떠올랐다. 직원들이 지네처럼 줄줄이 정렬해 경주하는 방식을 석은 머릿속에 그려보았고, 놀이 이름은 지네 릴레이로 정해두었다.

저, 과장님, 작년 체육대회 때는 무슨 게임을 했었죠?

줄다리기랑 구기 종목 두어 가지였던 것 같아요. 발야구랑 피구··· 였을 거예요. 잠깐 일층 내려가서 커피 한 잔 합시다.


발야구랑 피구··· 를 언급하다 갑자기 커피를 권하는 사수가 석은 불안했다. 황 과장은 석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처음 접하는 사수의 급정색에 김은 조금 떨었다. 좀 전까지 지네 얘기를 들려주며 부사수를 칭찬하다가도 이렇게 어두워질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사수다, 라는 지각이 퍼뜩 들었다. 석은 신속히 일어나 황 과장을 뒤따라갔다.

사층 사무실을 빠져나갈 때 석은 성기의 자리를 일별했다. 칸칸이 구획된 파티션들 중 하나가 비어 있었고, 사수의 빈칸 옆에서 성기는 업무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정면의 모니터에 붙박여 있던 얼굴이 슬쩍 위로 떠올랐고, 곧이어 주먹 하나가 올라왔다.

미팅? 파이팅.

독순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석은 성기의 입 모양을 또렷이 읽었다. 석은 손바닥을 올려 화답해주었다. 성기의 주먹에서 검지와 중지가 뻗어 나올 때 석은 손가락을 오므렸다. 독심술도 아니고 이심전심도 아니고 뭣도 아닌 입사 동기와의 눈짓 손짓 묵찌빠가, 석에게 문득 영감을 주었다. 춘계체육대회 때 해볼 만한 게임이고, 이름은 눈치코치 묵찌빠로 정하면 좋을 것 같았다.

일층 카페에서 근무하는 정은 씨를 황 과장은 언니라 불렀다. 언니, 우리 아메리카노 두 잔만. 석은 사수 마음대로 한 주문을 잠자코 따랐다.

토탈컴즈 씨아이가 각인된 머그잔 두 개가 철제 테이블 위에 놓였다. 언니, 왜 내 말 안 들어, 서빙 좀 하지 말라니까, 자꾸 이러니까 직원들이 언니를 우습게 보잖아, 언니가 알바생도 아니고, 그냥 커피 나왔다고 얘기를 해, 직원들이 직접 가져가게. 황 과장의 나무람을 정은 씨는 피식, 웃어넘겼다. 아까 회의실에서의 성기처럼, 언니처럼 의젓한 웃음이라고 석은 속생각했다.

정은 씨가 에스프레소 바로 돌아가고, 커피를 천천히 두 모금 마시고 나서야 황 과장은 입을 열었다.

체육대회 때 구기종목은 빼줘요. 발야구랑 피구··· 같은 것들은 절대로 안 했으면 좋겠어요.

아, 네. 윗분들이 하시기에는 너무 번잡하기는 하죠. 땀도 많이 나고요.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고. 성기 씨 옆자리, 지금 비어 있는 거기.

퇴사하셨다는 분요?

송 과장님이라고,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그분이 작년에 일이 있었거든요. 공에 배를 맞았어요.

아··· 임신 중이셨던 거 아니에요?

본인이 말을 안 해서 직원들 아무도 몰랐어요. 피구하다가 갑자기 쓰러지더라고. 육주차였더라고, 나중에 들어보니까.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요.

네··· 발야구랑 피구··· 같은 구기종목은 절대 안 넣겠습니다.

우리 실장님도 지금 홀몸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래요.

알겠습니다 과장님.

우리 회사는 임신 휴가, 출산 휴가가 따로 없어서, 산달 가까워 오면 연차 몰아서 쓰거든요. 임신하면 월차든 반차든 최대한 모아둬야 해요. 다치면 안 돼요.

네, 과장님. 가급적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게임들로 잘 짜보겠습니다.

얼음땡 같은 거면 딱 좋겠어요.

얼음땡요?

석 씨 팔십년대생이니까 어릴 때 얼음땡 해봤죠?

네.

술래한테 쫓길 때 그냥 얼음, 해버리면 가만히 있어도 되잖아요. 도망갈 필요도 없고.

그렇죠.

그러니까, 그게 딱이에요. 실장님은 얼음, 하고서 안 움직여도 되니까.

임신 중이라 게임 참여 어렵다고 대표님께 말씀드리면 안 되나요?

그래도 되기는 한데, 인사 평가에 반영되거든요. 업무 실적 외에 사내 행사 참여 적극성 부문이라는 게 있어요. 열심히 뛰어야 점수 잘 받아요. 얼음땡은 얼음, 하고서 가만히 서 있어도 엄연히 게임 참여 중인 거니까, 안전하게 점수 받을 수 있겠죠.

실장님이 얼음, 하시면 웬만하면 땡 쳐드리지 않는 게 좋겠네요.

맞아요. 가만히 얼음, 하시게 배려해드려야죠. 일단 얼음, 해버리고 나면 스스로는 땡을 못 치니까, 남이 땡 쳐주기 전까지는 계속 가만히 서 있을 수 있으니까.

황 과장의 머그잔은 어느새 비어 있었다. 석은 열 모금은 더 될 법한 제 아메리카노를 한 번에 마셔 없앴다.

나 때문에 그래요? 천천히 마셔도 되는데. 그런 예의 굳이 안 차려도 돼요. 아 참, 석 씨 생일이 언제죠?

오월 오일입니다.

어린이날 태어났어요? 외우기 쉽겠다. 혹시 성기 씨 생일도 알아요?

사월 십육일입니다.

둘이 동기 맞네. 생일도 다 알고. 고마워요. 사층에만 있는 문화인데, 직원들 생일 챙겨주는 제도가 있거든요. 내가 담당자고. 사월, 오월이니까 이달이랑 다음달은 내리 케익 사야겠네.

황 과장이 빈 잔 두 개를 들고 일어났고, 석은 황망해 하며 따라 일어섰다. 먼저 사층 올라가 있으라고, 정은 언니랑 수다 좀 떨다 가겠다고, 황 과장은 생글거렸다. 석은 사수가 계속 어려웠다. 급정색과 급화색에 어찌 처신해야 할지 속으로 쩔쩔맸다.


얼음땡? 어른들이?

회의실에서 성기는 얼음땡을 의아해 했다. 석에게서 황 과장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야 성기는 얼음땡을 받아들였다.

석이 준비한 게임은 얼음땡, 눈치코치 묵찌빠, 지네 릴레이, 이렇게 세 가지였다. 성기는 지네 릴레이를 어려워 했고, 자신이 만들어 온 기획서 파일에 어떻게 설명문을 채워야 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십인십오각 경주로 이인삼각 형태로 발이 묶인 이인일개조 다섯 쌍이 종렬로 한 팀을 이루어 결승선을 통과하는 방식, 이라고 석이 문장을 만들어주었다. 수첩에 받아적으며 성기가 또 피식, 웃었다.

그래도 주말 임직원 단체 산행보다는 훨씬 낫네.

등산이 훨씬 어른스럽기는 하지 않냐?

힘들잖아.

게임은 쉽냐?

재미는 있잖아.

글쎄다. 황 과장이 아까 그러더라. 내 생일이 재미있대.

왜? 언제인데?

오월 오일.

좋겠다. 생일선물이 꼭 어린이날 선물 같겠네.

해가 지나도 어른이 못 되는 기분이야.

재미있네. 내 후배 중에 성탄절이 생일인 애 있어.

어린이날보다는 낫겠네.

내 생일도 무슨 날이었으면 좋겠어. 재미있잖아.

십육일 맞지? 다음달.

성기는 끄덕거리면서 수첩을 닫았다. 수첩 표지에 희고 선명한 고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네이비색 패브릭 재질 바탕 중앙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로 배치된 이미지였다. 석은 고래를 얼마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 읽었던 그림책 『모비 딕』이 생각났다. 내용은 잘 기억 안 나지만, 하얀 향유고래가 포경선을 덮치는 올컬러 삽화만은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석은 고래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물었다.

성기 너, 사내 메신저 닉네임도 고래잖아. 윤고래.

별명이야.

고래가? 왜?

내 이름이 성기잖아.

고래만큼 빅사이즈냐?

전혀.

근데 왜 고래야.

아홉 살 때 내가 우리 반 남자애들 중에 포경수술 제일 먼저 했거든. 그때부터 애들이 고래라고 불렀어. 담임선생도 출석 부를 때 고래라고 하더라고. 성기보다 훨씬 낫다고.

단지 그 이유냐?

어.

재미있네. 난 어린이, 넌 고래.

허먼 멜빌 소설을 좋아하기도 하고.

유명한 작가냐?

너 문창과 아니었냐? 좀 심하네. 이과생인 나도 아는데. 『모비 딕』 쓴 사람이잖아.

아, 그거. 흰 고래가 배 침몰시키는 얘기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배가 고래들을 침몰시키는 얘기야. 고래가 고래들을 구한 얘기고. 소설 속 배는 배가 아니야. 욕망에 눈먼 자들과 세계를 상징하는 거야.

석은 소설 얘기를 하는 성기에게서 시 얘기를 하는 선배를 보았고, 그래서 대화를 더 잇지 않기로 했다. 선배처럼 성기도, 못 알아듣겠는 자기 목소리를 길게 늘어뜨릴 작정처럼 보였다. 석은 책 안 읽는 어린애 같은 멍청한 웃음을 부러 지어 보였다. 석의 의도대로 성기는 한심하다는 듯 도리질을 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석은 다시 고래를 내려다보았다. 두상이 사각이고 이마 면적이 넓은 고래는, 왼쪽의 머리와 오른쪽의 꼬리가 수평인 형상이었다. 왼쪽? 오른쪽? 석은 고래에 대한 제 인상을 재고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 왼쪽인 방향이 고래에게는 정면일 터였다. 고래는 지금 앞으로 헤엄치는 중이었다. 상대의 전방과 후방을 타자가 멋대로 좌우라 판단해버린 꼴 같아서, 석은 제 시각이 미숙하다고 느꼈다. 수첩의 놓임새에 따라 고래는 상승 혹은 하강하는 모습이 되기도 할 텐데, 그 또한 위아래가 아닌 전후방일 수 있을 것이었다. 이차원의 고래에게 삼차원의 방향감각을 부여하는 일이 석에게는 시처럼 어려웠다. 설상가상, 『모비 딕』에 대한 자신의 기억―고래가 배를 침몰시킨 이야기마저 성기를 통해 주어와 목적어가 뒤집힌 상황이었다. 석은 계속 헤맸다.

담배 피우러 나가자는 석의 말을 성기는 잘랐다. 체육대회 기획서 얼른 마무리해야지. 이따 퇴근할 때 같이 피우자. 흡연욕을 참을 줄 아는 입사 동기가 석은 아무래도 형 같았다.


성기가 진급 누락이 된 이유가 석은 웃기고 슬펐다. 성기는 얼음을 스스로 풀었던 탓으로 대리를 한참 동안 못 달게 된 것이었다.


[혁] 토탈컴즈 임직원 춘계체육대회 2012.04.13.金 [신]


현수막은 한강시민공원 망원지구 공설운동장의 벤치 캐노피 양 기둥에 걸렸다. 전 직원은 앞면에 검은색 씨아이가 각인된 노란색 집업 면후드티를 입고 뛰었다. 봄이니까 개나리색으로 일괄 통일하라는 대표의 지침이 반영된 것이었다. 도시락은 오후 한 시 정각에 딱 맞춰 배달됐다. 선발대로 가 있던 석이 배달원을 응대했고, 십여 분쯤 뒤 성기의 인솔 하에 임직원 일동이 걸어서 도착했다. 대표는 점심식사가 끝날 무렵 자차를 끌고 왔다. 석과 성기가 도시락 용기들을 서둘러 분리 수거했고, 두 시에 대표가 현수막 앞에 서서 체육대회 선포식을 진행했다. 첫 경기 눈치코치 묵찌빠, 다음 순서 지네 릴레이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문제는 얼음땡이었다.

앞의 두 게임처럼 얼음땡도 팀 대항전이었고, 대표는 마지막까지 참관만 했다. 각 팀은 각 층 직원들이 섞인 형태였다. 일층 카페 정은 씨, 이층 영업전략실, 삼층 기술지원실, 사층 기획실, 오층 인사지원팀 직원들이 서로 융합하고 친목한다는 체육대회 개최 의도에 따라 석과 성기가 알아서 팀 구성을 했다. 실장의 지시를 받들어, 최대한 실장이 기획실 사람들 여럿과 한 팀으로 묶이도록 배려도 했다. 운동장에서 실장은 석과 성기를 계속 칭찬했다.

팀 인원 열 명 중 석, 성기, 실장, 황 과장, 영업전략실 곽 부장, 인사지원팀 현 대리 모두 얼음이었다. 나머지 넷은 상대팀 술래 대표를 피해 달아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며 깔깔대는 중이었다.

곽 부장은 현 대리와 정면으로 마주선 자세로 십여 분째 얼음이었다. 현 대리의 봉긋한 개나리색 상의는 쩔쩔매고 있었다. 얼음인 현 대리는 뒷걸음질을 칠 수 없어 상반신만 겨우 뒤로 젖혔고, 그러다 여러 번 균형을 잃었다. 마주선 얼음은 미동 없이 점잖았다. 다만 이따금, 뒤로 기우는 상대의 등허리에 두 손을 올릴 뿐이었다. 그러다 두 후드티의 회사 로고가 포개졌고, 곽 부장이 웃으며 주의를 주었다.

어허. 얼음이 어딜 움직여.

곽 부장의 청바지 앞쪽이 부풀어 있는 것을 석은 분명히 보았다. 누구든 얼른 현 대리의 얼음을 풀어줬으면 했다. 기를 쓰고 추격하는 술래 탓에, 넷은 여섯 얼음 근처에도 얼씬 못하고 있었다. 석은 속으로 술래를 욕했다. 실장과 황 과장은 얼음인 채로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성기는 팀원 넷을 응원하는 중이었다.

내가 얼음만 아니었으면···.

석은 현 대리와 곽 부장을 계속 주시했다. 술래는 여전히 날랬고, 여섯 얼음은 풀려날 가망이 없어 보였다.

뭐 하시는 겁니까.

얼음을 스스로 풀고 다가온 성기가 말했다. 현 대리를 자기 뒤로 물러서게 한 성기는 자기 앞의 얼음을 노려보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냐고요. 청바지 앞이 다시 펀펀해진 곽 부장이 근엄히 응수했다. 뭐 하긴, 얼음이지. 그러는 자네는 뭐 하나. 얼음이 어딜 움직여! 꾸짖음에 대거리하는 대신, 성기는 현 대리를 뒤세운 채 그 자리에서 얼음을 해버렸다.

게임은 중단됐다. 술래가 멈춰 섰고 얼음이었던 이들은 풀려났으며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던 대표와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오로지 성기 혼자 곽 부장 앞에서 얼음을 고수했다. 스스로 얼음을 풀고 움직였으니, 얼음땡 놀이의 규칙상 성기는 팀 전체를 지게 만들고 저버린 셈이었다. 게다가 상대팀까지 당황하게 만들었다. 술래는 자기가 붙잡아야 할 사람들 곁에 서서 상황 파악을 하느라 수다스러웠다. 성기는 이제 깍두기 신세였다. 판이 마비되었으니 더 이상 땡을 쳐줄 이도 존재할 수 없었다. 성기는 또 스스로 얼음을 풀어야만 했는데,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꿈쩍도 안 했다.

운동장의 모든 개나리색 옷들이 서서히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각각의 노랑은 성기와 곽 부장의 대치점에서 얼마간 우왕좌왕했다. 어느 쪽에 서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대표가 먼저 곽 부장 옆에 섰고, 이윽고 스크럼을 짠 듯한 횡진이 성기 앞에 펼쳐졌다.

이윽고 황 과장과 현 대리, 석만이 성기의 양옆에 선 진영이 갖춰졌다. 성기 씨, 나도 아까 상황 다 봤는데, 일단은 대표님하고 곽 부장님이랑 따로 풀어요. 이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황 과장이 아무리 타일러도 얼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성기 씨, 고맙긴 한데 이러면 그쪽이나 나나 회사 생활 힘들어져요. 과장님 말씀대로 해요. 현 대리도 얼음을 풀려고 열심이었다.


이런다고 누가 땡이라도 쳐주냐? 자세 풀어 얼른.


얼음은 입사 동기의 귓속말도 튕겨내고 있었다. 자기 편에 서주는 것 이상의 어떤 행위를 이놈의 윤고래는 기다리는 게 분명하다고, 하지만 나까지 하극상으로 찍힐 수는 없다고, 석은 판단했다. 이놈의 윤고래, 작살이라도 꽂아 끌어내고 싶은 심정으로 석은 계속 동기 옆에 서 있어주기만 했다.

윤성기하고 곽 부장. 잠깐 좀 봅시다.

대표는 두 사람을 데리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주차장의 차량들 사이로 사라졌다. 셋이 멀어지는 동안 대오는 흩어졌고, 쪼그려앉아 우는 현 대리 옆에 황 과장이 같이 쪼그려앉아주었다. 아직은 둘 다 서먹한 신입사원 석은, 옆에 말없이 서 있어주기만 했다.


윤성기. 윤, 성, 기. 윤, 성기.

석은 동기의 이름 석 자를 발음해보았다. 왠지 입에 잘 붙지 않았다. 입사 넉 달째인 지금껏, 대표를 비롯해 그 누구의 입에서 직함 없이 오롯이 직원명 전체가 호명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동기에 대한 석의 호칭 역시 줄곧 야, 성기, 윤고래였다. 회사에서 이름 석 자가 불리는 사태란, 꽤 살 떨리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석은 오늘의 교훈으로 삼았다.

대표 일동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직원들은 저마다 무리를 지어 수다를 떨거나 매트를 깔고 누운 채 시간을 때웠다. 실장은 혼자였다.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두 손을 배 위에 올려둔 같은 편을 바라보면서, 석은 실장의 이름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전 직원 명단조차 여태 못 외운 제 무지가 신입사원 석은 염려스러웠다.

사내 그룹웨어에 공지된 징계 공고를 성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체육대회 그다음 주 월요일 오전에 뜬 징계 조치를, 성기는 선물이라며 달게 받았다. 향후 근속 년수 오 년 내 진급 및 특진 대상자 제외라는 자신의 징계 말고, 곽 부장의 십오프로 감봉 및 일개월 근신을 성기는 선물로 쳤다.

오늘 사월 십육일이잖아. 내 생일.

생일 기념으로 오 년간 평사원 예약이냐?

부당하기는 하지.

또 개길 거야?

설마. 현 대리님 입장도 생각해야지.

황 과장님이 너 생일파티 준비하려다 까인 거 알아?

실장님한테?

징계랑 생일케익 동시에 먹이기가 불편했나 보지. 곽 부장 눈치도 보일 거고. 너 때문에 다음달 내 생일파티도 까였어.

왜?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 해주고. 웃기잖아. 둘 다 안 하는 게 공정하지. 내년부터는 해주겠지.


이듬해 성기와 석은 입사 이후 첫 번째 생일케익을 받았다.

그해 사월 성기의 생일파티는 실장의 첫아이 백일 기념을 겸해서 진행되었다. 어린이날 전날은 석의 생일과 더불어, 엄마가 된 실장의 첫 어린이날을 축하하는 자리로 꾸며졌다. 실장은 기획실 내 생일파티 제도 총괄 담당인 황 과장을 극진히 아꼈다.


생일케익은 이천십삼년이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사월 생일날 아침, 성기는 황 과장의 자리로 와 건의했다. 축하받을 날이 아닌 것 같다고, 당분간은 축하하고 축하받기가 어렵겠다고. 황 과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생일파티 제도 총괄 담당자 앞에서, 이놈의 윤고래는 또 체육대회 때처럼 주제넘는 태도를 보인다고, 석은 우성그룹 블로그 운영 대행 사월 이주차 주간보고서를 작성하며 생각했다.






연재 소설 <기형도를 오독하다> #10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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