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에세이 ― 월간 『디자인』 2023년 10월호(544호) 게재
이 글은 월간 『디자인』 2023년 10월호(통권 544호)에 정식 게재된 원문의 라이터스 컷(Writer’s Cut — 사족을 더하고 분량을 늘린 필자 자신의 마이너 편집본)입니다.
아카이브는 기록 수단이다. 파편화된 텍스트와 상(像)을 특정 맥락으로 꿰어 보관한다. 이렇게 모은 바를 혼자 간직하지 않고 여러 대중을 향해 전시한다. 개인의 수집 행위와 구분되는 점이다. 아카이브, 엄밀히 표기하면 ‘현대 아카이브(modern archive)’는 그 기원인 아르케이온(Arkeion), 에라리움(Aerarium)이라는 고대 기록 보존소와 차이를 갖는다. 기록학자들 대부분이 동의하는 현대 아카이브의 연원은 18세기 말 건립된 프랑스 국립 아카이브라고 한다. 이 기관은 국가 내 모든 기록물 관리를 책임지는 단일 행정 기구였다. 21세기 용어로 중앙 집중 정보 처리 시스템이었던 셈이다. 자연히 관련법 제정도 뒤따랐다. 국립 아카이브가 총괄하는 기록들은 법령에 의해 국가적 보호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이곳은 시민 누구나 방문 가능한 열린 장소였다. 오늘날 온라인 플랫폼 게시, 오프라인 공간 상설 전시의 형태로 만인에게 공개되는 아카이브 기획물의 개방성은 프랑스 국립 아카이브로부터 기인한 현대 아카이브의 성격을 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록물 관리에 대한 중앙 집중적 책임제(기록물과 기록 행위 자체에 대한 보존 가치 제고), 공적 개방을 통한 시민 사회의 접근 허용(아카이빙의 대중문화화). 현대 아카이브는 이 두 가지 특질로써 고대 아카이브, 그리고 단순 수집벽과 이격된다.
현대 아카이브로서의 ‘아카이브’는 20세기 중후반 꽤 묵직한 개념어로 대두되었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저서 『지식의 고고학』(1969)을 통해 현대적 아카이브 개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당대의 아카이브를 지식-권력의 한 형태로 바라보는 시선을 견지했는데, 이에 관해서는 「아카이브 미술의 대항적 성격에 관한 연구」(서울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이주연 문학석사학위논문, 2018. 2.)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논문은 “아카이브가 어떤 방식으로 기록을 구성하며 그에 타당한 기억의 지위를 부여하는가”, “아카이브가 배제의 원리로서 권력의 효과를 낳는다”라는 푸코의 질문과 지적을 주요하게 다루었다. 무언가를 선별한다는 것은 나머지를 배제하는 일이다. 푸코는 아카이브 과정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선별’ 작업이 ‘배제의 원리’로 작동하고, 그렇게 골라진 기록들에 기억이라는 권위—‘이 기록들이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가 부여됨으로써 권력이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대 아카이브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는 새로운 예술 공간을 제시했다. 이 용어를 표제로 삼은 저작도 존재한다. 한국어판(문학과지성사)은 헤테로토피아를 “사회에 의해 고안되고 그 안에 제도화되어 있는 공간이며, 다만 그 존재 자체로써 나머지 정상 공간들을 반박하고 이의제기하는 공간”으로 풀이하며 ‘반(反)공간’을 동의어로 사용했다. 앞서 언급한 논문에는 ‘대항적 공간’으로 쓰였다. 두 표현 모두 『헤테로토피아』 원문의 ‘contre-espace’를 국역한 것이다. 미세한 어감 차이가 있기는 하겠으나 어쨌든 ‘반공간’과 ‘대항적 공간’ 모두 동일한 대상에 반하고 대항하기 위해 착상된 이음동의어다.
이 글이 적극적으로 참고한 「아카이브 미술의 대항적 성격에 관한 연구」*는 푸코가 제기한 “어떻게 현대 아카이브 개념과 단절하고 아카이브를 새롭게 정의하는가”에 근거하여 현대미술의 한 장르인 아카이브 미술을 헤테로피아, 즉 대항적 공간의 일례로 고찰했다. 이에 영감을 받은 이 글은 ‘대항’이라는 키워드만 조심히 따왔다. 그러나 지적 담론의 맞춤법을 어기고 사사로운 일상의 말본을 따라 인용어를 (어쩌면 함부로) 썼다. 아래 소개할 두 프로젝트에 굳이 꼭 ‘대항적 아카이브’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었던 욕심 탓이다.
* 아카이브의 기원과 현대 아카이브의 태동, 아카이브 개념의 사회 문화적 맥락 속 발달상을 파악하는 데 이 논문은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텍스트다.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팬데믹을 선언했다. 국내에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가 시행되었다. 디자인 매체 에디터였던 필자는 비대면이라는 밧줄에 발이 묶였다. 그나마 손은 자유로워서 서면 인터뷰로나마 디자이너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팬데믹 기간을 돌이켜보건대 인터뷰이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나’ 같은 시답잖은 질문을 그때만큼 자주 했던 적은 없었다. 답변들이 다 비슷했다. 아이덴티티 작업을 맡기로 했던 행사가 돌연 취소되었다, 공간 디자인 쪽 의뢰가 확실히 줄었다, 본래 전시 인쇄물을 디자인하기로 계약했는데 온라인 전시로 전환되면서 과업들이 바뀌었다, ……. 디자이너들 다수가 공통의 난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 내고 살아 냈던 시기였다. 우발적으로 일을 잃고 불가항력적으로 기회를 압수당한, 말 그대로 상실의 시대였다.
이윽고 흥미로운 온라인 아카이브가 등장했다. 이름하여 ‘패럴렐 패럴렐(parallel-parallel.com)’. 뉴욕에서 활동하는 두 그래픽 디자이너(Dorothee Dähler, Yeliz Secerli)가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코로나19로 무기한 연기되거나 아예 무효화된 각종 오프라인 프로그램들의 그래픽 디자인 작업물을 선별해 사이트에 게시하는 방식이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소거되어야 했던 전 세계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활동이 기록물로 보존되었다. ‘트라이앵글-스튜디오’ 장기성을 비롯한 국내 디자이너들의 작업도 올라가 있다. 2023년 5월 WHO는 코로나19 국제공중보건위기상황을 해제했다. 패럴렐 패럴렐은 꾸준히 업데이트 중이다.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상실’을 실체적 콘텐츠로 기록·전시한다, 라는 기획은 팬데믹 이후에도 유효하다. 여전히 이러저러한 이유와 명분으로 누군가는 상실을 겪을 테니. 디자이너 한 사람이 앓는 상실이 업계 전체의 망실과 손실로 전이되지 않도록, 패럴렐 패럴렐은 디자인 아카이브를 통해 ‘지속 가능성—적어도 우리는 당신을 보고 있으니 계속 나아가시기를’이라는 면역 항체를 증식하고 있다.
영단어 explicate, implicate는 각각 설명하다, 함축하다를 의미한다. 둘 다 pli, 즉 ‘주름’을 품은 낱말이다. 주름을 밖으로(ex-) 펴면 설명이고 안으로(im-) 접으면 함축이다. 철학자들은 주름을 내재된 외재성, 안에 있는 밖이라 이른다. 이 맥락에서 아카이빙은 주름을 새기는 일로 정의될 만하다. 물상과 사태를 오와 열을 맞추어 일련의 기록물로 정리하고, 그것을 모두가 감각할 수 있도록 내놓으면 새 주름이 진다. 우리의 기억 외부에 머물러 있던 어떤 것들이 내부로 불러들여지기 때문이다. 일상성과 맞닿은 주름일수록 대중과 내밀히 교감한다. 대중도 제 주름을 살피게 된다.
아카이브 개념에 대하여 이렇듯 형이상학적 감상을 갖게 된 계기는 『사물함』이다. 매호 사물 하나를 다루는 정기 간행물이다. 2018년 창간호 ‘조명’을 시작으로 ‘베개’, ‘밀폐 용기’, ‘월경 용품’, ‘창문’, ‘잔’, ‘편지’ 등을 기록해 오고 있다. ‘체조스튜디오’ 강아름·이정은이 만든다. 아카이브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이 잡지는 아카이빙 북의 제식—주제의 일관성, 목록화·범주화된 자료 수집 체계, 기록물·편집물·대중서로서의 형질에 부합한다. 『사물함』은 비근함을 발굴·보존함으로써 주름의 상실에 대항한다. 생활인들은 링클 프리 의류, 안티 링클 화장품과 공존한다. 주름은 은폐와 말소의 대상으로 여겨지고는 한다. 목주름, 팔자주름, 눈가 주름 없애는 관리법이 뷰티 콘텐츠로 소비된다. 주름을 삶의 무늬라 은유할 줄 아는 여유는 희귀해졌다.
물리적 주름에 대한 모진 탄압 탓인지 비가시적 주름의 가치도 덩달아 잊히는 듯하다. 이 상실을 막고자 『사물함』이 꾀한 대항책은 일상용품에 겹겹의 주름 불어넣기다. ‘베개’ 한 개로, ‘잔’ 하나로만 책 한 권을 꾸리는 노작(勞作)이다. 다발의 주름을 그러모아야 가능한 기획일 텐데 부단히도 잡지가 이어지고 있다. 이미 지닌 것의 만족감 상실, 지금 이 생의 밀도감 상실, 주름을 보는 마음 시력 상실. 『사물함』은 이러한 상실의 다반사를 전복할 일상 속 사소한 사물들의 주름을 아카이빙 중이다. 독자 스스로 자기 곁에 잡지 한 호 분량만큼의 사물이(혹은 세계가) 놓여 있었음을 각성하는 경험. 아카이빙 북 『사물함』이 매호마다 새기는 가장 큰 주름이다.
월간 『디자인』 5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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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이 있다. 지금은 소설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