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와 둘째
아이, 깜짝이야.
정말이지 내 마음은 그랬다. 이 녀석이 내 품에 안긴 지 벌써 네 해가 흘렀다. 지난 사 년 동안 꽃을 피운 적이 없다. 첫해에는 새 집에 흔들리며 건너오고, 이식한 화분에 적응하느라 꽃을 못 피우나 싶었다. 이듬해에는 몇 송이 꽃봉오리는 맺었지만 덩치를 키우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작년에는 이제 적응이 되었는지 여섯 송이 꽃봉오리로 황홀하게 만들었다. 기대가 너무 컸을까. 하나, 둘 차례로 낙화하여 저세상으로 모두 떠나고 말았다.
아, 우리 집에서는 꽃을 보기 어려운가 보다. 단념하고 있었다. 화분이 너무 작아서 그런가 싶어 잘 키우던 원주인한테 물어보니 작아도 괜찮단다.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다가 이른 봄에 우연찮게 아파트 나눔터에 빈 화분이 하나 보였다. 두께가 제법 두꺼운 난 화분이다. 얇고 덩치가 작은 것이면 마음이 가지 않았을 터인데 이건 보기 드문 크기와 용모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눈에도 담고 손에도 들고 집으로 왔다.
현관에서 두어 달 묵혀 두었던 그 화분에 공작선인장을 옮겼다. 아무래도 집이 너르고 흙으로 흡수하는 영양이 풍부하면 더 잘 자랄 것 같았다. 아이들도 잘 먹는 아이가 유전자 한계를 뛰어넘어 부모보다 더 큰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만큼 성장에는 영양이 필수다. 화초인들 다를까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눈이 번쩍 뜨이고 깜짝 놀랄 일이 어느 날 아침 눈앞에 펼쳐졌다. 새 집으로 옮겨 심은 공작이 꽃눈을 틔운 것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러던가. 이번에는 그 ‘될성부른 떡잎’이다. 겨우 꼬물거리며 나온 눈이 튼실하다. 굵기가 두껍고 빛깔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면서 생명력이 넘친다. 게다가 아래로 먼저 내린 녀석은 불그스레한 성숙미도 보이지 않는가. 빨리 성장하는 첫째 녀석에 더 애정이 간다. 자녀들도 큰놈을 잘 키우면 나머지는 따라서 성장하기 마련이니까. 꽃봉오리도 마찬가지다.
며칠 후 다시 보니, 제법 자랐다. 푸르스름한 꽃자루와 발그레한 꽃잎 부분이 확연히 구분이 되며 제법 꽃대 모양을 갖추었다. 그러다가 잠깐 아팠다. 주인도 사람인지라 갖가지 병치레를 다 한다. 코로나로 며칠 누워 있다가 다시 보니 웬걸, 그렇게 먼저 피고 일찍 개화를 할 것 같던 첫째 녀석이 푸르게 성장하던 잎자루가 힘이 없다. 불그스레한 꽃잎처럼 얇아지고 제 빛깔을 잃고 있지 않은가.
해마다 꽃분홍 대빵 큰 공작을 맞이하는 영광을 누리는 그녀한테 물었다.
“잎자루가 아래로만 늘어져서 힘이 부치는 걸까?”
“너무 볕바른 데 두어서 그럴까?”
“완성체가 되기까지는 아직 영양가가 더 부족한가?”
사진도 찍고 질문도 다양한 변수를 얹어서 건넸다.
‘너무 힘이 없고 처지면 세우는 것도 괜찮겠네요^^’
고수의 훈수는 늘 약발이 세다. 당장 지지대를 세워주었다. 옆에서 묵묵히 잘 자라고 있는 둘째 녀석을 보니 역시나 지지대였다. 그 녀석은 나름 기댈 곳을 찾아 안정감 있게 자리를 잡지 않았는가. 주인 손길이 닿지 않아도 늘 둘째는 스스로 눈치껏 살아내는 존재다. 화초도 그랬다. 첫째에게는 늘 실수투성이다.
‘엄마도 처음이라서 그래. 미안해.’
첫째를 키우는 엄마들의 그 유명한 말이 내 가슴에서도 터져 나오다니... 튼실한 기둥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우뚝 들고 일어서길 바란다. 그리하여 열두 폭 분홍 치마로 피어나 주길.
사람도 공작선인장처럼 의지할 곳이 있으면 쓰러졌다가 일어서기도 쉬우리라. 이미 쓰러지는 일도 적을 것이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무한히 연결된 세계, 인다르망을 생각해 본다. 서로서로 비추는 구슬이 끝이 없는 것처럼 마음으로 손잡고 함께 간다면, 산다면, 기댄다면 쓰러져가는 생명도 다시 피워올릴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