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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손가락 Jul 17. 2024

초복 다음날

장마 중 햇빛 은총


장마가 한창이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보슬보슬, 추적추적. 어떨 때는 주룩주룩 내려 걸어가는 신발에 물이 차고 원피스 치맛자락이 젖기도 한다. 


게발선인장을 옮겼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시들시들 기운을 못 차리고 있는 꼴을 보니 죄지은 마음이었다. 내 마음 편하려고 주택으로 이사했다. 며칠을 벼르다 어제서야 감행한 일이다. 아점으로 아들 밥상을 차려야 하는 급한 마음에 대문 앞에 대충 줄만 세워놓고 왔다.


밤새 또닥또닥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창밖으로 들렸다. 


‘자리를 옮긴 화초들은 잘 있을까?’ 

‘후덥지근한 아파트 실내에서 시원하고 청량한 주택 골목 바람이 얼마나 시원할까?’ 

‘봄비처럼 내리는 단비에 꿀꺽꿀꺽 얼마나 시원하게 빗물을 들이키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내심 흡족했다. 흐뭇한 감상이 길어지다가 그 꼬리에서는 '아차!!' 싶었다. 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너무 많은 양의 물을 계속 머금고 있으면 화초는 썩는다. 뿌리가 수분을 머금을 정도면 충분한데 화분 받침을 그대로 두고 왔다는 생각이 탁 머리를 쳤다. 밤새도록 조마조마했다.

 

날이 새고, 아침을 해결하기가 바쁘게 차를 몰았다. 역시나 그랬다. 화분마다 받쳐놓은 딸기 다라이에는 물이 한가득이다. 가득 차고 넘치는 지경이다. 서둘러 물을 비우고 받침도 모두 치웠다. 


밑으로 뚫린 구멍과 바닥에 깐 전복껍데기 사이로 자연바람이 솔솔 통하고, 위로는 꿀맛 단비가 시원하게 방울방울 내린다. 잎이 넓은 목베고니아가 적당하게 그늘과 하늘빛도 조절한다. 딱이다. 한여름 더위를 달래고 갈증을 해소하기에 주택은 게발선인장한테는 안성맞춤이다. 진작에 이렇게 옮기고 시원하게 자연 속에서 키워야 했다. 이제 숨통이 트인다. 살 것 같다. 나도, 선인장도. 


어제 큰 화분에 새로 옮긴 대파 모종도 옥상으로 옮겨야 한다. 대파는 물받침이 있어도 스스로 조절을 잘한다. 성질이 까다롭지 않다. 엄마처럼 늘 긍정적이고 튼실하게 잘 자란다. 물, 햇빛, 시원한 바람만 있으면 그만이다. 엄마도 몸만 건강하면 뭐든 척척 해결했다. 우리 모녀 사는 게 건강하면 세상만사가 괜찮았다. 


옥상이 그 생태에 최적인 공간이다. 우주 끝까지 무한히 열린 하늘, 태양에서 쏟아지는 빛도 아무 장애물 없이 옥상까지 닿는다. 옆으로도 옥상 난간 외에는 걸리는 물건이 없다. 대파만이 누리는 광활한 운동장이 펼쳐진다. 


그곳으로 옮겨야 한다. 새로 영토를 확보한 대파는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벌써 들떠 있다. 이미 무럭무럭 통통하게 살이 오른 선배 대파들이 힘자랑을 하며 불끈불끈 뽐내는 근육도 빠지지 않는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나고 자라 키만 멀대같이 큰 마트 대파는 얼굴도 못 내민다. 선배 대파가 싱싱한 건강미로 반짝이는 그곳, 옥상으로 가는 날, 오늘이다.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 잠시 쉬었다. 2층 계단에서 10분 휴식. 그사이 말끔히 청소된 스물여덟 계단을 따박따박 올라 하늘을 연다. 빗방울도 조용조용 숨소리를 낮춘다. 


그새 햇빛은 구름을 비집고 나오고, 네모난 연회색 옥상은 순식간에 밝은 대낮이다. 야간 경기장 조명처럼 환하다. 북쪽 벽체 앞에 자리를 잡고 붉은 벽돌 두 개를 옆으로 돌려 세운다. 빗물을 한껏 머금은 묵직한 질그릇 화분을 놓는다. 등 뒤에서,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햇빛은 광선 검처럼 밝고 강렬하다. 빛세례를 퍼붓는다. 신의 은총이 내리면 이럴까? 반사경에 부딪히고 꺾인 빛줄기처럼 하얗다. 반짝인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밝음이다. 눈 앞 벽체에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셔 고개를 못들 지경이다. 옥상에 올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대파 모종을 축복하는걸까? 장마 중에 내리는 찬란한 3분 축제다. 은총의 빛이렷다. 초복 다음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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