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하루의 복락은 정해져 있다. 과학에서도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지 않은가. 물질이 화학 반응을 일으킨 전과 후의 질량은 변하지 않고 물질의 모든 질량은 항상 일정하다는 법칙. 그런가 하면, 한평생 누려야 하는 행복 총량의 법칙, 고통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도 한다. 그처럼 하루 동안 누려야 하는 행운도 일정량이 정해진 듯하다.
특별한 날이 그렇다. 며칠 전. 아니다, 벌써 지난 달이다. 그날은 요즘 뜨거운 핵개인 시대를 다룬 ‘시대예보’ 송길영 작가와 만남이 예정된 날이었다. 지역 대학도서관 초청으로 만날 수도 있었지만 날짜를 놓치고 안타까워하던 중이었다. 그동안 함께하는 프로그램에서 그 서운함을 만회할 기회를 마련했다. 여덟 명만 신청하여 소그룹으로 인기 절정의 작가를 가까이에서 만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계획된 날이었다. 놓쳤다. 미적거리다가 그랬다. 지방이라 이동 시간과 써야 할 원고를 만지작거리다가 그 행운을 흘려버렸다.
대신 집에서 원고를 썼다. 이천오백 자 정도다. 단숨에 내리갈겼다. 평소 쓰는 분량은 삼천 자 전후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붙들고 집중하니 시간도 줄이고 내용도 밀도 높게 전개했다. 지인들이 읽고 ‘압권이다’, ‘이건 정말 잘 썼는데’라며 격찬했다. 그때도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송길영 작가를 만날 행운이었는데 그걸 놓치는 바람에 다른 방향으로 행운의 물길이 흐른 게 아닐까 싶었다. 송 작가와 잘 쓴 나의 원고 중에서 고르라면 어떤 걸 선택하게 될까. 때늦은 고민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혼자서 잠깐.
오늘도 그랬다. 결혼식이 있고, 조서환 회장 출판 기념회에 갈 수 있었고, 후배들 첫 모임이 있는 날이라 격려하러 갈 수 있는 날이다. 새벽에 깨우는데 못 일어났다. 전날 늦게 잠든 탓도 있지만 장거리 이동이 부담스러워진 이유도 있다. 봄비 같은 겨울비가 내리는 오전에 눈 뜨니 열한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오후에야 책 한 권을 들었다. ‘맡겨진 소녀’. 최인아 책방에서 골랐다. 첫 방문 기념으로 동기생들이랑 한 권씩 샀다. 그 책을 오늘에서야 읽다니.
‘맡겨진 소녀’는 클레어 키건의 소설이다. 작가는 1968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아마도 그가 경험한 어린 시절에 허구를 가미하여 소설로 엮는 듯하다. 다자녀 가정의 딸아이. 엄마가 또 아이를 출산할 즈음 먼 친척 집에서 지내는 한해 여름 동안의 이야기다. 분량은 백 쪽이 채 되지 않고 짧다.
이토록 짧은 분량으로 무슨 이야기를 전할까 의아스럽게 읽었다. ‘일요일 이른 아침’으로 시작한다. 소설 작법 중 하나다. 시간 배경으로 출발. 그런 다음 공간과 인물이 사건을 서서히 전개한다. 처음엔 암시에서 전개로 그리고 절정으로. 그 순서를 잘 따르는 내용이기에 읽기 편하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묘사다. 풍경, 인물, 행동, 사건 등 모든 대상을 수채화 한 폭을 감상하듯이 그려내고 있다. 독자는 영화를 보듯이 빠져든다. 그 몰입에는 현재형으로 문장을 구사하는 것도 한몫한다. 바로 눈앞에서 모든 장면이 펼쳐지는 듯하다. 문장의 완급도 매력적이다. 절정에서 감격을 터트리지 않고 결말, 그러니까 절정을 결말로 마무리 짓는다. 여운이 길게 하는 방법이다. 독자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이다.
하루의 행운 양은 정해져 있다. '하루 복락'이라 이름 지어본다. 오늘은 그 복을 다 누렸다. 한 권의 책으로 하루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채운 셈이다. ‘맡겨진 소녀’가 내게로 온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