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내리는 화요일 추어탕

진미

by 다섯손가락

비 오는 월요일. 사촌 동생이 왔다. 천리길을 운전해서 달려온 동갑내기 사촌 아우. 주부 생활로 햇수만 채우고 있는 언니한테 요리를 가르쳐 준다며 온 걸음이다. 식용유를 쓰지 않고 간편하게 만드는 잡채, 감자전분을 입혀서 살짝 구운 깐풍기, 배달 치킨 비주얼을 능가하는 닭날개 조림, 황금빛 강황밥. 나름 부엌살림을 한다는 나는 주부다. 간편하면서도 건강식으로 차려내는 솜씨에는 이십 년이 넘는 나의 세월이 무색해진다.


봄비가 여전한 화요일. 보슬보슬 대지의 생명을 깨우는 날. 점심은 추어탕이 딱이다. 삼십칠 년 전통을 자랑하는 진미 추어탕. 딸의 친구 부모님과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집.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진국이고 그야말로 추어탕이다. 장엇국이 아니라 미꾸라지탕이다. 자연산인지 양식인지 알 수는 없으나 대구 어디에서 공수해 온다고 했다. 맛깔난 생김치에도 국산 고춧가루를 사용하고 국물에 뿌리는 제피가루도 고성 어디에서 가져와 말린다는 팔순 주인장 자랑을 보고 들었으니 믿고 찾는다.


매번 포장만 하다가 오늘은 자리를 잡았다. 낮 열두 시쯤 도착한 추어탕집은 만석이다.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근처 회사에 다니는 듯한 청년들이 한두 무리 있을 뿐. 시골에는 어르신이 많다. 뒤늦게 들어선 손님도 백발의 어르신이다. 빈자리가 없음에도 비집고 들어와 공간을 차지한다. 친구가 두 명 더 올 거라며 미리 삼 인분을 주문한다. 점원한테 카드를 건네며 계산을 먼저 해달란다. 전화기를 연신 만지작거리며 그들을 기다리는 마음이 역력하다.


“안 오고 뭐 하노? 내가 주문하고 계산까지 다 해 놨응께 어서 빨리 와.”


통화할 때 곰살맞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혼잣말로 계속 구시렁거린다. 외로운 노년이다. 아직 냉기가 완연히 가시지 않은 이른 봄.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니 울적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밥 먹을 친구라도 청하니 다들 저마다 이유를 급조하며 꽁무니를 빼고 있으리라. 아들이 왔다거나, 몸이 아프다거나, 집안일이 밀렸다거나, 병원에 가야한다거나...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면 없지도 않겠지만 오늘 어르신은 외롭다. 만사를 제치고 친구들과 추어탕을 한 뚝배기 말아야 오늘을 살 것 같은 날이다. 내일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오늘을 살아야겠다, 당장. 하지만 그 친구들은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 도착하지 않는다. 오는 중인지 집에서 출발도 안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몇 번이나 더 전화해야 친구들은 도착할까? 노년의 점심은 초조하고 간절하다. 옆자리가 모두 뜨끈한 추어탕을 다 비우고 나올 때까지 전화기를 들고 입구만 뚫어지게 보고 있다.


봄비가 속살거리는 정오. 피와 땀과 눈물로 채운 세월이 허망해지는 노년의 봄 풍경이다. 인생 오후로 접어드는 계절에 동갑내기 아우랑 가까운 우리 모습을 예습한다. 미래 시간을 끌어와 쓴맛을 삼키며 나란히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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