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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뉴욕의사 Dec 06. 2020

나의 사이공.

코로나 통금여금 시기를  맞아 옛 추억을 되새기며 써 본 사이공 여행기.

상큼한 토요일 아침, 

페이스북이 8년 전 오늘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잊고 지내던 기억을 저 멀리서 부스스 끌어내었다. 



   

레지던트를 마치고 직장을 시작하기 전까지 살짝 시간이 남아서 한국 부모님 댁으로 와서 쉬고 있던 그 시절, 

계속 집에서 쉬고 있다 보니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 이런 긴 휴식의 시간에 이렇게 집에서 쉬고만 있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베트남과 보르네오 섬을 가기로 했다.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 이후로 나라가 발전해 오는 과정에서 한국과 살짝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들이 있어서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 나는 베트남 전쟁을 중심으로 조금 읽어보았기에 실제로 어떤 곳인지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미국을 전쟁에서 이긴 유일한 나라라는 말을 곧잘 하지 않는가? 그래서 도대체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궁금해져서 이 참에 한 번 가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가 사이공에 있는 기간 중 내 지인 2명 역시 사이공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케이! 이번 여행의 키워드는 호찌민 전쟁 박물관, cu chi 터널(전쟁 당시 베트콩들이 사용하던 땅굴) 그리고 내 지인들과의 랑데부. 


      나는 새로운 곳에 가면 공항에서 내려 바깥으로 나올 때의 첫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동문이 열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미지의 세상으로 첫 발짝을 탁 땔 때의 그 느낌. 사이공에서는 밤에 내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문을 나서자 후덥지근한 습기가 다시금 내가 동남아에 왔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던 그때. 내가 갔던 2012년에는 오토바이가 베트남의 주 이동수단이었는데 한 12차선쯤 되는 넓은 도로에 오토바이가 정말 떼강도처럼 우르르~ 집단으로 다니는데 큰길에서 신호가 바뀌면서 멈춰있던 그 많은 오토바이가 한 번에 부르릉~ 움직이는 것을 보면 나도 몰래 움찔~ 하는 것이 꽤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횡단보도도 많이 없기 때문에 나처럼 뉴욕에 살면서 한 무단 횡단하던 사람도 길 건널 타이밍을 잡기가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다. 비록 나중에는 특유의 반사신경으로 현지인보다 더 빨리 빛의 속도로 오토바이 사이를 누비며 심지어 오는 오토바이를 멈추게 하는 기세를 발휘하며 길을 건너는 경지에 도달했지만. 


대략 이런 느낌이다. 사진은 닛케이. 


   이번 여행의 체험 코스로 내가 저기는 꼭 들어가 보리다 라고 생각하고 전날 밥을 굶고 찾아간 추치 터널은 기골이 장대한 성인 남자는 못 들어갈만한 좁은 통로들이 땅 밑으로 굽이굽이 이어져 있는 곳이다. 이집트 피라미드 들어가는 느낌으로 어두운 땅굴을 가이드 따라 들어가서 헤매다 보면 왠지 어디선가 작고 빼짝 마른 베트콩이 확 튀어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혹시 구석의 좁고 어두운 방에는 잊혀진 베트콩이 아직도 살고 있지는 않을까... 하면서 이 어두컴컴한 지하를 엉금엉금 여행하고 나면 전쟁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햇볕도 못 보고 땅 밑으로 들어가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 혹시 베트남 자유 여행하시는 분들은, 베트남은 여행사가 잘 되어 있어서 가서 현지 여행사 그룹 투어로 신청하시면 원하는 곳에 데려다주고 밥도 먹여주니 편안하게 여행하도록 합시다 :) 

추치 터널. 사진은 핀터레스트.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며 찾아간 호찌민 전쟁 박물관은 마치 귀신의 집 한 번 들어갔다 나온 듯한 사실적인 사진과 인물 재현으로 나의 혼을 빼놓았다. 전쟁 박물관은 승전국과 패전국 간의 시각차를 여실히 보여주면서 평소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상식을 깨트리는 효과가 있어서 여행 가면 관심 있게 보는 곳 중에 하나다. 살짝 북한스러운 느낌으로 미군이 쳐들어와서 우리의 자유를 이렇게까지 위협했지만 우리는 자랑스럽게 미군을 몰아내었다~ 하면서 어떻게 미군을 몰아내었는지가 아~아주 리얼하게 펼쳐지면서 그 지나친 생생함에 헉...? 하는 그런 느낌?  그때까지는 은유와 상징의 미학에 더 익숙하던 나에게 전쟁의 잔혹함을 뼛속까지 생생하게 느끼게 해 준 호찌민 전쟁 박물관은 전쟁이 얼마나 한 나라와 사람들의 영혼을 처참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의 단면을 여실히 느끼게 해 준 곳이었다. 그중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진은 아래의 사진이다. 




    Agent Orange 라 불리던 고엽제가 야기한 수많은 후유증 중 하나는 고엽제에 노출된 산모들의 기형아 출산이다. 사진의 저분 역시 고엽제로 인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셨다. 그런 그를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고 계시는 그의 어머니를 보면서, 언젠가 내가 보물보다도 더 소중하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말했던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우리 엄마 역시 내가 지금의 나와 다르게 태어났더라도 저런 눈빛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자라는 동안 보여준 정성과 관심을 똑같이 쏟아부어서 나는 지금과 같은 나가 되었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발전을 이루면서 이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간혹 느껴지는 전쟁이 우리나라 어르신 세대의 영혼에 남긴 상처와 쓰라림이 좀 더 생생하게 남아 있던 베트남의 사람들. 그리고 그 엄청난 재난을 극복해 나와 이제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여실히 느껴지던 호찌민 시티. 우리 엄마 아빠가 살아낸 60-70년대가 이런 곳이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내 부모님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그곳.   그리고 의료 봉사 오셨다 지금도 철이 없지만 그때는 더더욱 철이 없던 나에게 근사한 저녁까지 먹여주시며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가르쳐 주신 김 선생님. 그리고 출장 왔다 차 막혀서 고속도로에서 뛰어내려 분리벽을 넘고 달려와 폰도 없이 그저 멍하니 2시간째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저녁 먹여주고 간 이제는 근 20년 지기 우디 군. 


    이렇게 코로나로 손과 발이 묶이고 집에 앉아있는 요즘, 이렇게 되새기며 추억할 수 있는 즐거운 기억을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사이공의 정식 명칭은 호찌민시입니다. 저는 사이공이 어감이 더 좋아서 그 단어를 선호해서 썼을 뿐 :) 

   표지 사진은 방콕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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