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로운 뉴욕의사 Jan 22. 2021

Ciao, Bella 2.

듀오링고를 통해 들여다본 나의 가면증후군(Imposter Syndrome

    듀오링고 이태리어 레슨 365일 연속을 새해 결심으로 한 후, 계속 가늘고 길게 매일 레슨 하나와 짧은 단편 읽기를 해 오다가, 오늘 드디어 큰 마음을 먹고 듀오링고 온라인 말하기 수업에 참여하였다. 여러 개의 이태리어 수업이 있었지만 기초반 중 여기 미국의 오하이오 데이튼에 사시는 어떤 분이 주최하시는 모임이 눈에 들어왔다. 교재와 사전 수업 예고 등 짜임새 있게 수업이 구성되어 있고 자료도 잘 정리되어 있어 기대를 안고 등록한 후, 시간에 맞춰 접속하였다. 

    구글 미팅으로 20여 명 정도가 온라인 접속하였는데 이.럴.수.가. 모든 수업이 이태리어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나갈까 순간 고민하다 얼추 알아는 들을 수 있는 것 같아서 계속 접속해 있었는데 아니, 이번에는 각자 이태리어로 자기소개를 시키는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이태리어 공부는 듀오링고가 전부이고 이태리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학교 때 이태리어 배우고 꽤 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거의 다 잊어먹은 내 친구뿐이라 장난처럼 밥 사줘 뭐 이런 몇 마디 해 보고 만 게 전부인데, 이. 럴. 수. 가. 이. 럴. 수. 가. 그런데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호스트가 시키면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은 또 곧잘 하는 것이다. 흑흑. 나 시킬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이 다 왔다 갔다 하다 결국 방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나오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슬며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Mi chiamo @@, abito a New York, voglio parlare Italiano bene (내 이름은 @@고 뉴욕에 살고 이태리어를 잘하고 싶어요). 그냥 이렇게 세 마디 하면 되는 거였는데, 왜 그렇게 당황해서 나가버렸을까. 

당장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 것 같지 않았고, 더 준비를 해서 남들 앞에서 서투르지 않고 능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Imposter Syndrome. 한국어로는 가면 증후군이라고 하는 이 증후군은 남들이 보기에는 멀쩡하게 잘하고 있는 사람이 속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업적이나 능력을 계속해서 의심하면서 혼자 불안 초조해하는 심리적 증상을 말한다. 원문을 옮겨 보자면  psychological pattern in which an individual doubts their skills, talents or accomplishments and has a persistent internalized fear of being exposed as a "fraud".  특히나 여자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고들 하는데 나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아니 내가 무슨 이태리어 교수도 아니고 그냥 취미로 조금씩 하는 사람인데 그거 틀리면 좀 어떻다고...? 그냥 재미나게 사람들과 이태리어 연습하면서 즐길 수도 있었던 시간을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날려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 가면 증후군은 직장에서도 종종 얼굴을 내밀며 나를 괴롭힌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내가 말 잘하기로는 아마도 전 의학계에서 1등 먹을 완화의학 하는 사람들과 일을 하다 보면 발음 하나에도 표현 하나에도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그리고 아직도 완화 의학은 응급 의학에 비해서 나에게 안방처럼 익숙한 분야는 아니기 때문에 뭔가 내 의견을 얘기할 때 한 번 더 생각해 보거나, 아예 말을 하지 않을 때도 많다. 그렇게 머뭇머뭇 주저주저하는 동안 내 안에 내재된 나만의 빛은 반감되고 또 반감되다 스르르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 




    코로나 광풍을 거치며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점점 명확해지는 요즈음, 이번 한 해는 너무 완벽하게 잘하려는 생각은 좀 더 내려놓고, 좀 덜 긴장하고, 조금은 즐기는 마음으로 가볍게 첫 스텝을 밟아 보고 싶다. 내가 그렇게 걱정하고 안달하는 것들 중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 끝날만큼 중요한 것은 사실 별로 없잖아?  곧잘 잊어버리곤 하는 그 진리를 나 자신에게 상기시켜 주면서 쉬엄쉬엄 꾸준히 나아가야지.  어머나, 그러고 보니 이 얘기는 내 친구가 17년 전에 이미 나한테 해 준 이야기인데, 아직도 별로 변한 게 없구나...


이 말 처음 들은 17년 전이랑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걸 보면 사람은 정말 잘 안 바뀌나 보다. 


    하지만 그 심각한 좌절의 에너지를 전환하여 구글 번역기 돌려서 자기소개 이태리어로 준비해 두고 언어교환 앱 그 자리에서 깔고 이태리어 교환 친구 찾아둔 것도 나이니깐.  그리고 뒤늦게 듀오링고를 시작했으나 빛의 속도로 나를 따라잡고 있는 우리 큰 언니 및 Yosoyrami쌤, 우리 다 같이 파이팅!!  백세 인생, 우리 원어민 될 때까지 가는 거에요!!!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이태리어 재도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