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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뉴욕의사 Apr 18. 2021

당신의 삶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그 한 가지

슬기로운 뉴욕의사의 완화의학 이야기

    펠로쉽의 졸업 요건 중 하나인 그랜드 라운드- 본인이 원하는 주제를 정해서 1시간 정도 강의를 하는 것- 준비를 전심전력을 다 해 한 후, 마침내 이번 주 초에 발표를 하였다. 나의 주제는 당연하게도 '응급 의학 속의  완화 의학'이었는데, 십여 년 간 응급의학과 의사로 일하면서 생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뒤늦게 펠로우쉽을 하면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걸어온 길들을 하나하나 복기를 하면서 스토리 라인을 짜는 일은 생각보다 꽤 재미있었다. 그러다 문득 강의를 통해 설명하던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던져 보았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삶의 질은 어떤 것일까?

What is the acceptable Quality of Life for me?"


   심폐 소생술/기도삽관 포기 동의 각서(Do Not Resuscitate/Intubate)로 대표되는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Advanced Directives)는 어떠한 이유로든지 내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을 상황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지에 관한 나의 의사를 미리 밝혀 두는 서류이다. 예전에 나는 아, 나는 그런 상황이 생기면 심폐 소생술/기도삽관 노(No) 노야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상황' 이 어떤 상황인지는 상황마다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게 규정이 되는 상황이 아니라 이걸 뭐라고 남겨야 나의 의사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했던 적이 있었더랬다. 이거 뭐 경우의 수를 고려해서 알고리즘을 그려놔야 하나... 생각을 하다, 아이고 그냥 가장 나랑 가치관이 가장 비슷하고 비슷하게 바이탈 다루는 의사 친구를 대리인으로 지정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생각을 접었었는데, 이번에 준비를 하면서 보니 나처럼 경우의 수를 규정하려고 하면 너무나도 경우의 수가 많아지니, 그러기보다는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을 그어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으려면,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본질적인 특성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것이라... '

의외로 생각보다 답이 금방 나와 나도 조금 놀랐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내가 더 이상 글을 읽을 수 없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주 어릴 때 글을 읽는 법을 배운 후, 독서가인 아빠를 따라 어린 시절 책이 가장 친한 친구였을 정도로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 성격 지금도 남아서 난 웬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은 그냥 혼자 내가 보고 싶은 책 읽을 때가 더 재미있다. 내가 궁금한 주제나 사람에 관하여 쓰인 책을 읽으면서 모르던 사실을 하나하나 깨달아 가고, 또 글로 쓰인 이야기들을 내 머릿속에 상상해 보는 것은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즐거움이다. 굳이 비교를 해 보자면, 나는 그 재미가 정말 맛난 산해진미를 먹는 것보다 더 크다 ㅎㅎㅎ

그 즐거움을 더 이상 음미할 수 없게 된다면, 그때는 내 심장이 멈추었을 말할 때 심폐 소생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요즈음 들어 또 오디오북의 세계로 발을 들이고 있으니 그것도 독서에 포함시켜서.


    몇 주 전 만난 환자 한 분이 생각났다. 똑 부러지고 본인 의사 확실한 전형적인 뉴욕 싱글 여성이셨던 이 분은, 의료 결정 대리인- 만약의 경우 환자분 본인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때 대신 결정을 내려주는 사람을 대리인으로 지정해 두는 제도- 이야기가 나오자 지금 결정하고 싶지 않다고 딱 잘라 말하셨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라고 운을 떼 보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스스로 의사 결정할 수 있으니 지정하지 않겠다고, 필요할 때가 되면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하자고 칼같이 말하셔서 일단 접어 두었는데...  일주일 가량이 지난 어느 날, 문득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져서 차트를 열어 봤더니 갑자기 병세가 나빠지셔서 거의 임종이 가까운 상황이었다.  지금은 내가 결정 내릴 수 있으니 대리인 지정은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던 그때 그 모습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편안히 가시기를 기도해 드렸다.





 

당신을 가장 당신답게 하는 그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것을 못하게 되었을 때의 삶을 한 번 생각해 보셨나요...?



  

사진은 여기서 https://www.istockphoto.com/vector/1-day-to-go-last-countdown-icon-one-day-go-sale-price-offer-promo-deal-timer-1-day-gm1178341744-329309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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