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로운 뉴욕의사 Aug 21. 2021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지금도 생각하면 진분홍 꽃향기가 흠뻑풍겨 나오는것만 같은M 씨

 지금도 생각하면 진분홍 꽃향기가 흠뻑 풍겨 나오는 것만 같은 M 씨. 

 그렇게 밖은 꽃향기로 가득하던 어느 봄날 오후에 만난 M 씨가 필요한 것은 '감정적 지원(emotional support)'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진상 환자 혹은 환자 가족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혹은 예방 차원에서 우리를 부르는 경우가 많아, 또 무슨 폭탄이 기다리고 있는 건가... 하며 살짝 레이더를 세우고 간 병실 밖에서 먼저 M 씨의 배우자 분을 뵈었다. 그런데 이 분, 너무 부드럽고 엘레강스하셔서 아, 참 매너가 좋은 분이시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우러나오는 분이셨다. 적당히 큰 키에 가는 팔다리를 가지고 계셔서 폴로티에 면바지만 입어도 멋이 우러나던 그분.

  

     두 분은 수십 년을 같이 하셨는데 M 씨가 몇 년 전 뇌암 진단을 받으시고 집중적으로 치료를 받으신 후 한동안 많이 좋아지셔서 여행도 다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다 얼마 전 M 씨가 다시 쓰러지셔서 우리 병원으로 실려 오신 후 재발 판정을 받으시고 응급 수술을 받고 사경을 헤매시면서 배우자 분도 너무 고생이 많으셔서 보다보다 못한 종양팀이 뭐라도 더 해 줄 것이 없을까 싶어서 우리 팀을 부른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M 씨는 수술 후 여기가 어딘지, 지금은 몇 년도인지 아무것도 모르시고 때때로 배우자분의 이름을 부르시며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소리치시는 것 밖에는 할 수가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셨다. 갑자기 나빠진 M 씨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황망함, 그리고 수술 직후부터 퇴원하고 싶어 하는 M 씨의 의사를 존중해 주지 못하는 데서 오는 죄책감 등으로 힘들어하고 계신 배우자 분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은 후, M 씨가 계시는 병실의 문을 열었다. 


    아, 그런데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온갖 용을 쓰시며 집에 가겠다고 가겠다고 애쓰시며 팔다리를 휘젓고 계시던 그분에게서는, 비록 지금 당장은 제정신이 아니고 안 감은 산발 머리에 입성은 별로일지언정 뭔가 특별한 기운이 느껴졌다. 반짝반짝하는 눈에 어린아이의 장난기 같은 분홍빛이 뺨에 발그레~ 하게 감도는 부들부들하신 분. '아, 이 분은 뭐하시는 분인가. 뭔가 재미난 스토리가 있을 것 같은데' 하는 느낌.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멘탈이 있으셨으면 한 번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상태가 너무 안 좋으셔서 그런 궁금증은 뒤로하고 가만히 병실을 나왔다.  


    나중에 집에 와서 그분의 이름을 구글링 해 보았다. 그런데 아니, 혹시나가 역시나! 알고 보니 이분은 이름 들으면 다 아는, 수많은 여성들의 로망인 패션 브랜드에서 일하고 계셨다. 패션의 아이콘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수많은 여자들이 그 브랜드 물건을 갖기 위해서 목숨도 불사를 정도로 인기 있는 브랜드에서 배우자 분과 함께 수십 년간 같이 일하면서 업계의 듀오로 아주 유명한, 성공적인 커리어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의 물질적 풍요란 풍요는 넘칠 듯이 가득하신 분이셨다. 그러고 보니 맨해튼에 아파트도 있으신데 환자분이 굳이 뉴욕 교외의 집으로 가야겠다고 저렇게 말씀하시니 매일 몇 시간 운전해서라도 진료 보러 올 테니 일단 퇴원시켜 달라던 배우자 분의 말씀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공수래공수거. 

우리는 사람은 빈 몸으로 와서 빈 몸으로 간다는 말을 흔히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어떠한 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는 사실 많지 않다. 그래서 매일매일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좇는데 내가 가진 에너지를 쏟아붓고 태워나간다. 


   오늘도 이렇게 지나가는 내 인생의 하루. 어제보다 나아진 점은 있을까. 나아지면 무엇이 나아졌을까. 그 나아진 것이 결국 소용이 있기는 할까. 이렇게 끝이 없는 질문의 꼬리에서,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디를 바라보며  내 인생의 노를 저어 나가야 할까. 그리고 그 여행의 종점에 다다랐을 때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을까. 



사진은 여기 https://www.dreamstime.com/pink-vibes-plants-concept-canary-island-plant-green-minimal-fashion-design-art-image191511104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삶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그 한 가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