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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뉴욕의사 Apr 16. 2021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추슬추슬 비가 내리던 어느 봄날의 오후에 만난 분들의 이야기

펠로쉽이 어느덧 80% 넘게 끝난 어느 비 오는 오후.

내가 일하는 병원은 뉴욕에 위치한 병원답게 환자분들도 참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분들이 많은데, 이렇게 다양한 분들을 만나면서 나는 삶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서 참 많은 것을 배운다. 그리고 내가 좀 안다고 생각하는 인생의 조각들은, 삶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겸손해진다.





    그 날의 나에게 가르침을 주신 분은 가족성 대장 용종증이라는 병으로 대장을 절제하고 장루를 가지고 생활 중이신 아주머니셨다. 가족성 대장 용종증은 유전 질환으로 젋은 나이부터 대장에 용종이 비정상적으로 많이 생기고 결국 암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전에 미리 암 예방 차원에서 대장 절제술을 시행한다. 대장 절제 후에도 남은 부위에 계속 용종이 생겨서 자주 내시경과 생검을 반복하며 추적관찰 중이던 아주머니께서는, 그 날 따라 내가 조금 피곤해서 말이 짧고 간단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니, 마치 묵언 수행하고 금방 나오신 분 마냥 어찌나 말이 많으신지. 게다가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은 안 하시고 자꾸 딴 데로 새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셔서 계속해서 재차 확인 질문을 해야 했던 분이셨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 아주머니, 말 못 할 사연을 갖고 계신 분이셨다. 가족성 대장 용종증이라는 이 병은 유전 질환이기 때문에 이 분의 두 자녀분도 이 질환을 갖고 계셨다. 따님은 이미 젊은 나이에 대장 절제술을 받고 장루를 갖고 계시고 이제 스무 살이 갓 넘은 아드님도 벌써 대장 내시경을 받으면서 관리하고 계시다고 한다. 그 아드님이 때마침 팬데믹으로 직장을 잃으셔서 의료보험이 없어서(미국은 의료비가 비싸므로 의료보험의 유무가 아주 중요하다) 걱정이라고, 주에서 제공하는 의료보험이라도 빨리 하나 마련해서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한숨을 쉬셨다. 우리 아들도 이렇게 좋은 병원에서 검사받게 하면 좋으련만… 하시는 아주머니의 말씀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곧이어 만난 할머니 J.

나는 환자분들 만날 때마다 매번 드시는 통증약을 이름과 용량 횟수를 매번 확인하는데, 아니, 이 할머니, 드시는 통증약 이름도 잘 모르고, 이상한 약 이름을 대며 나를 되려 혼란의 도가니로 빠트리시는 게 아닌가.  다행히도 할머니 당신의 암은 치료에 잘 반응하여 일단 완치가 된 이후 추적 관찰을 하고 계신데, 아이고, 우리 이 할머니는 알고 보니 가족들 덕택에 바람 잘 날이 없으신 분이셨다.


    자녀분이 두 분 계신데, 따님은 10대 때 희귀 질환으로 돌아가시고 남아있는 아들은 정신질환이 있으셔서 얼마 전 이혼하고 애들을 돌볼 수가 없어 할머니께서 직접 두 손녀분을 거두어 기르시고 계신단다. 심지어 손녀 중 하나는 자폐증이 있어서 관심이 아주 많이 필요한 상황이라 할머니께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는데, 엎친데 덮친 격이라더니, 얼마 전에 할아버지께서 뇌졸중이 오셔서 그 병시중까지 들어야 해서 너무 힘들다고 하셨다.


이 모든 것은 그 자폐증 손녀가 원격진료 도중에 카메라로 뛰어들자 할머니께서 상황을 설명하시느라 나온 이야기였다. 할머니의 그런 상황을 알지도 못하면서 드시는 약 좀 제대로 잘 모른다고 혼자 구시렁대었던 나 자신이 참 부끄러웠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 나 정도면 세상을 좀 알지~’ 하는 은근한 자신감과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가치관에 확신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 그런데 점점 느끼는 것은, 내 눈에 보이는 것이 결코 전부가 아니고 그 이면에는 겉으로는 금방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것들이 덩굴처럼 줄줄 엮여 있어서 절대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결코 쉽지 않지만.


이제는 가슴에 숨 좀 빼고, 한 박자 혹은 두 박자 늦게 가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좀 더 잘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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