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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뉴욕의사 Mar 21. 2021

어느 의사의 암투병기.

그리고 내가 본 그 분의 마지막 나날들.

    내가 H 씨를 만난 건 펠로쉽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저녁 당직을 서고 있는데 응급실에서 컨설트가 와서 내려가 보니 눈이 번뜩번뜩 하고 꽁지머리를 한 40대 남자분이 응급실 베드에 앉아 계셨다. 보통 환자 포스가 아니라는 생각을 살짝 하긴 했지만, 뉴욕에는 워낙 다양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 정도쯤은 흔히 볼 수 있다. 암환자에게 동반되는 통증 및 각종 증상들이 잘 조절되지 않아 참다 참다 응급실로 오신 그분은 그간 묵혀두신 짜증의 포스를 화악 뿜어내며 열변을 토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주 친한 친구라고 말하는 여자분이 앉아서 간간히 그분을 위로하며 병력을 보충해 주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환자 병력을 청취하고 대략 치료 계획을 설명했더니, 갑자기 아니, 그럼 난 닥터 C(자신의 외래 담당의)를 안 본단 말이야? 난 닥터 C 보는 줄 알고 여기까지 왔는데,  닥터 C를 볼 거 아니었으면 내가 이 밤에 여기까지 왜 왔냐고 마구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런 진상이. 그러면서 어텐딩 불러오라고 하시기에, 그때만 해도 나는 아직 응급의학과 어텐딩의 포스가 서슬 퍼렇게 살아있을 때였기 때문에, 꽁꽁 싸매 두었던 포스를 발산하며 의료계에서 일하시냐고 물어봤다(동종 업계 사람들끼리는 말하는 거 들어보면 금방 안다). 그랬더니 멈칫하더니 의대 교수라고 하셨다.

 그래서 닥터 C는 오늘 당직 아니라고, 그래도 환자분 걱정해서 환자분 오시기 전에 우리 팀에 전화해서 환자분 오신다고 미리 알려주셨다고, 시스템도 잘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러시나, 만약에 환자분이 진료 보실 때 당직 아닌데 부르면 좋겠어요...? 를 완화의학 의사 버전으로 아주 완화하여 말씀드렸더니 잠잠해지셨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끈 이후에도 얼마 후 PCA(통증약 펌프)가 맘에 안 드신다는 둥, 입원 안 하고 집에 가시겠다는 둥 해서 그날 밤 8시면 끝날 당직을 이 분 일 마무리하느라 거의 11-12시까지 선 후 파김치가 되어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알고 보니 그분은 우리 과 사람들이 다 아는 유명한 분이었다. 콜 설 때마다 그분에게 전화를 받지 않는 날이 잘 없을 정도로 자주 전화를 하셔서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보시고 사람 진 빠지게 하시는 걸로 유명하셨다. 나도 그 날의 첫 만남이 워낙이나 강렬했기 때문에 나의 Follow 리스트- 나는 내가 보고 난 후 앞으로의 경과가 궁금한 환자분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종종 어떻게 되어가나 확인하곤 한다- 에 올려놓고 가끔씩 잘 지내시나 근황을 확인했다. 매일 아침 간밤에 일어난 일 리스트에 며칠 걸러 한 번 씩 그분의 이름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시던 그분의 이름이 서서히 잊혀갈 무렵, 그분이 드디어 호스피스 서비스와 함께 집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작년 대장암으로 돌아가신 블랙 판다의 스타 채드윅 보스만(작년 사망 당시 나이 43세)으로 인해 젊은 층에서의 암 위험이 재조명되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암환자들이 모여드는 우리 병원 같은 곳에서 일하다 보면 내 나이 또래 혹은 나보다 젊은 암환자들을 심심찮게 보게 되는데 H 씨 또한 그런 젊은 암 환자분들 중 한 분이었다. 미국 유수의 프로그램에서 하나 수련받기도 힘든 과를 더블 보드로 수련을 받으시고 세부 펠로쉽까지 하신 후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일을 놓지 않고 계속하고 계시던 이 분은, 자신의 삶에 대한 끓는 애착과 그것을 놓지 못해 벌이는 사투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분이었다. 장기간의 수련이 끝나고 이제 경험이 좀 쌓여 한참 학자로서의 커리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려고 할 무렵, 암 진단을 받은 이 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게다가 본인의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으로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의 마음결, 생각 하나하나를 다 느낄 만큼 예민한 분이셨는데, 그런 분이 치료의 주도권을 놓기는 정말로 쉽지 않았을 듯하다. 나아가 서서히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의 그림자를 받아들이기는 더더욱.


     바쁜 일과 중에도 조금 숨 돌릴 짬이 생기던 어느 날, 그분이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 궁금해서 차트를 열어봤다. 그리고 그분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호스피스 서비스와 함께 집으로 가신 후 비교적 편안하게 잘 지내고 계셨다고 한다. 점점 기능이 떨어지고 정신 상태가 혼미해지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서 같이 살고 계신 어머니께 구급차를 부르라고, 나 지금 병원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원래 계획은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당황해 하자, 빨리 부르라고. 그리고는 응급실에 도착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셨다.






     나는 완화의학 의사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접한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죽음도 당연한 죽음은 없다. 완화 의학을 하기 전에는 아니 뭘 그렇게까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분들의 인생과 이야기를 알고 나면 그분들이 자신의 인생을 보는 관점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해가 된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환자분들이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길이 가능한 한 편안할 수 있도록 내 최선을 다 한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이 하루하루는 참 소중한 것이다.

 


* 사진은 마블 웹사이트에서 퍼 온 채드윅 보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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