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로운 뉴욕의사 Mar 20. 2021

이태리에서 온 로마논나 할머니

그리고 그 분의 암 투병기.

    한 달 간의 정신없이 지나간 병동 로테이션.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서 회복하는데도 일주일이 걸린다.

그 간 수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진 환자분들을 만났는데, 내가 몸이 고되어 글을 쓰지 못하다 보니 그 당시의 감동들이 반감하여 이미 내 마음속에서 툭툭 떨어져 나갔다. 완화 의학을 하면서 더욱 느끼는 점이지만 내 안에 살아 숨 쉬던 것들을 표현하지 않고 담아놓고 있다 보면 그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굳어지며 돌덩이처럼 변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툭 하고 내 마음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렇게 수많은 분들의 이야기가 내 마음속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져 나간 자리는 뭐랄까... 상처 나고 아문 자리처럼 뭔가 싸~하고 버석버석 마른 것이 과히 좋지는 않다.   

그래서 앞으로는 좀 피곤해도, 그때그때 꼬박꼬박 잘 기록해두려 한다.




    기나긴 겨울을 지나고 뉴욕에도 봄이 마악 찾아오려는 무렵에 만난 G 할머니는 이태리의 순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계셔서 어? 이태리 분이신가? 했는데 역시나 로마에서 오신 분이셨다.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가 인상적이었던 할머니는 로마에서 태어나서 죽 사시다가 에티오피아의 아디스 아바바에서 때마침 같이 로마 출신 남편 분을 만나 결혼하신 이후, 두 분이서 함께 아프리카 남미 북유럽 등 전 세계를 함께 다니면서 사셨다. 뉴욕에서 사신 지는 십 년이 조금 넘었다고 하셨는데, 남편 분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일등 신랑이라고,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남편 자랑을 하시는데 듣고 있는 내가 다 궁금해지면서 도대체 이 분의 남편은 어떤 분인가... 만나보고 싶은 호기심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이런저런 재미난 얘기를 들려주시다 갑자기 툭 던지신 한 마디.

"그런데  때문에 내 삶이 다 망가져버렸어..."


   

    2년 정도  투병 생활을 해 오신 할머니는, 이제 난 더 여한이 없다고 죽을 준비가 되었다고 처음부터 말씀하셨다. 나의 짧은 이태리어로 몇 마디 건네면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던 그런 할머니와 영어를 섞어가며 이런저런 대화를 종종 주고받곤 했는데, 어느 날은 할머니가 지금까지 살아오신 삶이 궁금해서 사진 좀 보여 달라고 그랬더니 에티오피아의 교회 건축물 사진 등을 보여주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내가 "그래도 로마 건축물이 더 나은 것 같은데요?" 그랬더니 "당연하지!!!" 하면서 하하하 웃으시던 할머니. 그러면서 지금 쯤 로마는 날씨도 좋고, 꽃이 많이 피어서 참 아름다운데.... 하시며 나더러 같이 로마 가자고 하시던 할머니.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도 이미 당신이 너무 병세가 깊으셔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씁쓸한 웃음을 띄우시던 할머니.


    어느 날은 병실에 갔더니 할머니는 방사선 치료하러 내려가시고 할아버지가 혼자 앉아 계셔서 그 말로만 듣던 일등 남편 할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었다. 할머니께서 성격 있다고 굉장히 자기주장이 강하셔서 대하기가 힘들지 않냐고 하셨는데, 나한테는 너무 순한 어린양처럼 잘 따라오시는 할머니라 좀 의외였다. 내가 알던 여느 이태리 남자들에 대한 선입견과 달리 깐깐한 학자 타입의 할아버지께서는 암환자의 동반자로서의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으시며 혼자서 아픈 할머니의 마지막을 책임지는 게 두렵긴 하지만 집에 데려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살짝 눈물까지 비추시면서. 두 분이서 함께 해 오신 40여 년의 세월이 더 궁금했지만 그만 접고 병실을 나섰다.

 

 그렇게 겨우겨우 치료를 이어나가시던 할머니는 원래 화학요법도 몇 차례 남으시고 방사선 치료도 좀 더 남아있고 하셨는데, 이제는 다 그만두고 집에 가서 편하게 쉬고 싶다고 하셨다. 할머니처럼 다정하고 상냥하신 종양의학과 의사와 함께 이리저리 면담을 한 후, 우리는 할머니의 소원대로 모든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집으로 보내드리기로 했다. 할머니 퇴원하시기 마지막 날, 병실에 갔더니 할머니께서 " 사람들이 다 나를 떠나..." 하시면서 재활치료하는 사람도 하다 말고 가 버리고, 다리 붕대 감던 사람도 감다 말고 나가버리고, 하필 오늘따라 할아버지도 코로나 백신 맞고 못 오신다고 하시기에 할머니 손을 꼭 붙잡고 절대로 할머니 안 버린다(abandon) 고 말씀드렸더니 할머니 얼굴에 다시 그 어린아이 미소가 퍼지면서 고맙다고 닥터가 잘해 줘서 내가 너무 마음이 편안했다고 하셔서 나도 너무 기쁘지만 한편으로 너무 안쓰러웠던 우리 로마논나 할머니.



아직도 할머니의 그 미소가 눈에 선하다.

지금쯤은 안 아프고 편안하실까...


매거진의 이전글 At the End of the Day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