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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뉴욕의사 Aug 19. 2021

평안하고 담담한 죽음을 맞이하려면.

한 폭의 수묵화 같던 그 인생의 마지막 나날들.

    펠로쉽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던 무렵 만난 L 씨는, 선한 눈빛이 참 인상적인 분이셨다. 

인상과 말투, 행동 하나하나에서 선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분이라면 상상이 갈까. 그 선한 기운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던지, 같이 일하던 어텐딩과 간호사 등 모두가 그분 인상 너무 좋지 않냐는 이야기를 침이 마르도록 했던 분이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나는 이런 분들을 만나면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오신 분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어떤 분인지 더 알아보고 싶은 궁금증이 생긴다. 


    이 분은 췌장암으로 몇 년 간 투병하시며 적극적으로 암과 맞서 싸우고 계신 분이셨는데, 안타깝게도 항암제가 안 들어 이미 여러 번 바꾼 분이셨다. 내가 컨설트를 맡은 이유는 항암 치료에서 오는 여러 가지 증상들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차트 리뷰를 하면서 보니 '아... 왠지 이번에 호스피스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 하는 생각에 안쓰러운 마음이 조금 생겼다. 


    초진 시 물어보는 질문들을 주욱~ 물어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앞으로의 예후를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 지 살짝 여쭈어 보았더니, " 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나도 알아요. 그래서 하루하루가 참 소중하고 감사하며 살려고 노력하죠. 내가 든든하게 버티어 주어야 우리 가족들도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요". 

    너무 의연하고 담담하셔서 혹시 종교가 있으신가 여쭈어 보았더니 기독교라고 하셨다. 아, 혹시 모태신앙이신가요? 했더니 그렇다고 하시며 지금 다니시는 교회에서는 장로로 섬기고 계시단다. 죽음 앞에서 담담하기는 참 쉽지 않지만 간혹 가다 이렇게 의연한 분들이 계시는데, 그런 분들은 대부분 모태 신앙이시더라. 

 그 의연함이 너무도 인상적이고 든든하여 보통 때는 잘 하지않는 질문을 해 보았다. 

    " 두렵거나 억울하거나 원망스럽지는 않으세요? "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시던 그분, 

" 그렇진 않아요. " 


 그날 아침 묵상한 본문이 히스기야 왕(자신의 생명을 거두려는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하여 자신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한 이스라엘의 왕) 이야기였기에 담담한 이 분의 자세가 대조를 이루며 내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런 분은 도대체 생업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 궁금해서 여쭈어봤더니,  

" 아, 원래 카피라이터로 일하다가 한 6~7년 전부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서 아이들 교육을 중점적으로 맡아하는 NGO에서 일하고 있어요."


 혹시나가 역시나. 하시는 일도 이렇게 세상에 빛을 더하는 일을 하시다니. 더 여쭈어보고 싶은 질문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일단은 마음 한 구석에 담아두고 물러났다. 이 분의 와이프 역시 어쩜 그렇게 센스 있고 유머감각 넘치는 멋진 신여성이신지. 심지어 호스피스 관련 스타트업 회사의 이사회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날부터 각종 증상 관련 의학적 질문 외에 그분의 인생에 관한 질문을 슬쩍 끼워서 하나 둘 여쭈어 보며 매일 조금씩 그분에 대하여 알아가기 시작했다. 


    환자분들을 조금씩 더 알아가는 만큼 더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도 점점 커진다. 이렇게 반듯한 스타일의 환자분들은 종종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으시다. 이 분 역시 통증으로 힘들어하시면서도 약을 많이 안 쓰려고 참는 모습이 보이셔서 안타까운 마음에 지금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고 몸이 편안해질 때까지 충분히 좀 쓰시라고 말씀드렸더니 "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하시면서 마치 어린아이 사탕 먹듯 마음에 한결 위로가 온 얼굴로 통증 펌프 버튼을 꾹 누르시며 다음 날 아침에는 한결 편안한 모습으로 맞아주시길래 어찌나 기쁘던지. 그리고 점점 더 환자분을 알아가면서 때때로 그 평정심을 뚫고 언뜻언뜻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불안감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자리 잡은 평안의 빛은 색은 좀 바랠지언정 요동하지 않고 끝까지 잠잠하였다. 

 

    결국 그분은 호스피스 가시기로 결정하시고 내가 펠로쉽을 마무리하던 마지막 그날까지 입원해 계셔서 다행히 마지막 인사를 드릴 수가 있었다. 만나서 참 반가웠다고,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고, 그동안 환자분 케어하면서 참 즐거웠다고 말씀드렸더니 

" 선생님은 참 좋은 질문들을 하세요. 그래서 선생님이랑 이야기하는 것이 참 재미있었답니다".

라고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인사해 주신 그분. 

 




    한 때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는 없다고 생각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죽음을, 그리고 의사인 나는 end-of-life care(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받는 케어)를 더 공부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인생을 잘 살아온 사람만이 잘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타인에게 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비치는지.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내 마지막 모습은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 마지막 순간에 나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평소에 잘 생각해 보지 않는 것들이지만 L 씨를 만난 이후 나도 저런 모습으로 기억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지금도 L 씨와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잔잔한 묵향이 나는 수묵화가 생각난다. 

 그렇게 평온하고 그윽한 향이 나는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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