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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뉴욕의사 May 06. 2022

귀를 기울이면

내가 경험한 최고의 문제 해결법, 경청의 힘.

     어느 바쁜 주말 오전이었다. 컨설트로 만나게 된 환자분 T 아주머니는 올해 초 암 진단을 받고 아직 항암 치료도 미처 시작을 못했는데 어제 담당 종양내과 의사분을 만난 자리에서 암이 너무 진행되어서 더 이상의 치료가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들으셨다고 한다. 담당의사로부터 호스피스 권유를 받자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고 오늘 응급실을 통해 통증 조절을 위해 입원하셨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으며 '아, 쉽지 않겠구나...' 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병실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T 아주머니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계셨다. 러시아어가 편한 분이라 전화로 통역 서비스를 신청하려고 하자, 본인의 친구분 전화번호를 주시면서 이 분을 통해서가 아니면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원래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친인척에게 통역을 부탁하는 것은 규정에 어긋난다고 차근차근 설명을 드리려고 하자 아주머니는 벌컥 화를 내시며

" 나랑 말을 하겠다는 거야 뭐야! 너희들 다 똑같아. 내 말은 하나도 안 듣고! "


하시며 일말의 소통의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일단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하고 병실을 나온 후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마도 아주머니의 그 분노는 나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어제 느낀 자신의 예후에 대한 절망감과 분노를 표출하고 계신 것일 테다. 몇 통의 전화 끝에 절충안의 해결책을 찾아 아주머니의 병실로 돌아갔다.


"통역 부탁하신 친구분, 정말 가까운 분이신가 봐요~?"  


이민자로 미국에서 가족들이 다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자신에게 가족 같은 분이시라고 말씀하시며, 이민자의 삶이 얼마나 힘든 지 아냐면서 투덜대시는 아주머니께,

그럼요, 저도 혼자 이민 왔는걸요


순간, 아주머니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렇게 아주머니의 마음의 문이 삐그덕~ 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화의학 초진 컨설트의 기본 질문 백만 가지를 물어보기 시작하자 아주머니는 또 짜증을 내셨는데, 아니 아주머니 집에서 그렇게 아프셔서 입원까지 하셨으면서 왜 그러세요. 제가 이렇게 많이 물어보는 것은 결국 아주머니가 제가 없는 댁에 다시 돌아가셔서도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지내시라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여기 있을 때 마음껏 얘기하세요라고 살짝 둘러쳤더니 아주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기 시작하셨다. 통역 없이 영어로.


    아주머니는 1980년대에 어머니, 언니, 아들과 함께  소련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다. 뉴욕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일용직을 하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영어를 익힌 , 주경야독으로 결국 회계사가 되셨다. 이민자는  전문직을 가져야 한다며 이렇게 좋은 병원에서 딸이 의사를 하고 있어서 부모님이  자랑스러우시겠다던 아주머니는 마치 한국의 호랑이 부모님들을 보는  같았다. 그렇게 열심히 사시며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어나가던 아주머니의 삶이 어느  유리처럼 부서졌다. 공부는  해도 심성은 비단결 같았다는,  아주머니 당신이 직접 인간으로서 지켜야  예절은  가르쳐 길렀다던   아들이 마약 중독으로 사망 것이다.

 

그 아이는 정말 개처럼 죽었어...


뉴욕의 응급실에서 수많은 마약 중독자 분들을 만난 경험이 있는 내가 아들분의 마지막을 그려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머니의 말이 크게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시던 아주머니의 곁을 이어서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떠나셨다고 한다. 그리고 6년 전에는 언니 역시 암으로 돌아가셨다. 언니가 죽은 후, 타국에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는 외로움에 너무나도 힘들었는데,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이 하나 둘 다가와서 힘이 되어 주었고 이제는 가족처럼 자신을 돌보아 주고 있단다. 그러면서 아까 화내서 미안하다고, 나도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 아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고, 눈물을 터뜨리셨다.


 나는 정말 한 일이 없었다. 그저 진심으로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들었을 뿐. 40여 년 간의 힘들었던 아주머니의 삶이 내 눈앞에서 드라마처럼 펼쳐지고 난 후, 나는 내 앞에 있는 이 한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처럼 자기 브랜딩이 중요한 시대에 잘 다듬어진 이야기를 적절한 타이밍에 매끄럽게 하는 화술은 모든 이의 바람이다. 나처럼 꼭 필요한 말만 간결하게 하는 효율성의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내 경험상 더 효과적이면서 딱히 별다른 스킬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내가 진심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 상대방도 자신이 이해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자연스레 신뢰 관계가 형성이 된다. 그러고 나면 이후의 과정들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었던 적은 사실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다음 날 아주머니는 가정형 호스피스를 받겠다고 하시며 퇴원하셨다. 가족도 힘들다는 암 환자 수발을 공동체 분들이 잘 해내셨을까. 이방 땅에서 혈육 없이 마지막을 맞이하시는 아주머니의 가시는 길이 너무 쓸쓸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기원을 하며 아주머니를 추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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