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게 연민을
지금,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을 위한 영화
불안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나는 라일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야'
였다.
라일리를 보호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건 다름아니라 불안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노력이 상황을 더 안좋게 만든건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속으로 불안을 응원했다. 그 노력을 인정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불안은 마지막에 운다.
거의 공황상태에 빠졌던 불안은, 결국에 운다.
나는 그 장면이 가장 슬펐다.
영화의 마지막, 라일리는 하키를 이어서 한다.
처음보다 덜 열심히, 덜 절박하게 한다.
햇살이 하키장을 비춘다.
그렇게나 절박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들렸던 경기장 소리가,
햇빛덕분에 고작 애들 하키경기로 변해버렸다.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아이에게 -물론 나이에 관계없이- 너가 하려고 하는건 고작 이런거야, 라고 하는건 옳지 않다.
하지만 당사자 본인이, 어느순간에, 아, 고작 이런거구나, 하고
느끼는 건 괜찮지 않나.
그 순간부터 힘을 빼고, 즐길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하려고 하는 모든건 '고작'이고,
그걸 받아들일때, 우리는 덜 심각해지고, 덜 불안해진다.
그리고 덜 절박해진다.
덜 절박해진다고 해서, 그게 꼭 덜 진심이라는 뜻은 아닐테니까.
물론, 우리는 불안 덕분에 멸종하지 않을수 있었다.
불안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많은 위급상황에서 상위 포식자에게 살점이 뜯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자와 호랑이와 곰과 치타와 모든 포식자들이 울타리 안에 갇혀있는 이 시대에도
우리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진로에 대한, 노후에 대한, 결혼에 대한, 커리어에 대한 불안.
나는 궁금하다.
이 불안들이 초창기 인류가 느꼈을 그것과 많이 다를까?
깊은밤, 주변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린다.
수풀들이 바스락 거린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
잠을 지새우고, 소화가 안되고, 주변을 의심하게 만드는 불안.
그 미운 불안을 나는, 영화를 보고난 오늘만큼은 조금 다독여 주고 싶다.
만약 우리가 사자였다면, 상어였다면, 불안이 굳이 나설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다.
불안을 너무 혹사시키기 보다, 적당히 타일러서
푹신한 소파에 눕힌다음 차나 한잔 대접하는게 불안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될것같다.
더이상 불안이 전면에 나서서 내가 감당하지 못할일을 벌이는 일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못미덥겠지만 나를 좀 지켜봐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