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을 앞두고
순응도 아니고 반항도 아닌것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로 가거나,
깊은 우물속으로 들어가야 할것이다.
나는 어쩌면 진절머리가 난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것에서 나는 한치의 반성도 없는 무지성, 그리고 무력감을 느꼈다.
그들이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나에게 불쾌함을 주었다.
어디론가로 가야했다.
그 사람들이 풍기는 무력한냄새의 원인을, 나는 몰랐다.
하지만 그 무력감의 근원지는 분명 무력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조금만 지체한다면 금방 나를 사로잡을게 뻔했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내게 다가왔다.
팀장의 손목에 있는 롤렉스 시계, 고깃집에 앉은 연인들, 그들이 나누는 진부한 대화,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밈들, 단어들, 표현들...
물론 그것들은 내 안에도 있는 것들이다.
다만 나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늦기전에 출발해야 한다,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운 이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생각을 결단에 옮기기 전, 나는 범죄를 계획에둔 사내의 심정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내가 이곳을 떠나리라는것을 추호도 예상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그 이유가 그들의 지긋지긋하고, 무기력하며, 범속한 냄새때문이라고는 더욱 예상하지 못할것이다.
나는 다만 평소처럼, 그저 가난하고 별볼일 없는 청년의 행세를 하면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러한 연기를 하고 있는 동안의 난, 의외로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언젠가는 이곳생활이 끝날것이라는 확고한 인식은, 역설적으로 나와 외부의 갈등을 완화시켰다.
이러한 발견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나에게 부여한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떠날때 어떤한 감정도 지녀서는 안된다'.
그동안 지내던 곳에대한 그리움도, 앞으로 지내게 될 곳에대한 기대도, 티끌만큼의 감정도 없이 나는 떠나야 했다.
그동안 내가 지내왔던 환경은, 그저 필요한 시설과 약간의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했을 따름이라는, 오만한 인식을 통하여, 나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을 끊을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을 통해 나는 새로운 환경에도 혼란없이 적응할수 있겠지.
이런 무의미하게 보이는 외부에 관한 인식을 지속시키기 위해선, 육체가, 그것도 평균 이상의 체력이 요구된다.
오늘 운동을 하며, 육체는 얼마나 외부에 관한 갈망에 무심한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더 높은 자리, 돈, 명예, 그러한 것들에 육체는 초연했다.
그것은 저 먼 이국의 땅에서 되풀이 되는 아주 오래된 민속동화와도 비슷하다.
육체를 통해 정신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수 있을까?
샤워를 하면서 나는 육체가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았다.
일정한 공간을 특정 시간에 점하고 있는 무언가, 거의 하나마나한 정의밖에는 할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첫 걸음일것이다.
육체에 대해 정의하려고 하는 것.
다른 이들이 외부의 것을 욕망할때, 나는 내 육체의 정의를 고민하는것.
육체를 통한 고민을 통하여, 나는 실질적으로 내 미래를 설계할수 있을것이다.
인디언 부족의 젊은 세대가, 현명한 노인에게 찾아가 지혜를 구하는 것처럼,
나는 내 몸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 -얼굴이 일그러지고 입술을 깨물정도로 고통스러운- 을 거쳐야 한다.
고통스러운 프로세스를 거쳐 정신적으로 좁은 틈이 '나타나면' 계속 그 움직임을 지속하여
그 틈을 점점더 벌리는것.
그 정신적인 틈 사이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