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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복이 Nov 29. 2022

어머니가 처음 오신 날, 오뎅탕을 끓여주셨다.

- 27년째, '새'엄마인 어머니를 위해

"오뎅탕?"

"처음 와서 끓여준 게 겨우 오뎅탕이냐?“


그날 우리 4남매 중 누가누가 그 음식을 먹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메뉴만은 정확히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처음 우리에게 해 준 음식은 바로 오뎅탕(그때는 어묵이라고 잘 안 불렀다)이었다. '엄마'는 그런 음식을 잘 하지 않으셨다. 즉석 음식이나 다름없는 음식이었고, 결정적으로 내가 안 먹는 음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낯선 집에 처음 와서, 낯선 부엌, 낯선 살림살이를 마주 한 어머니가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요리였을 텐데 그때는 그걸 생각하지 못하고 4남매가 그 메뉴의 수준 낮음만 가지고 수군거렸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온 건 엄마가 돌아가신 지 약 1년 후였다. 내가 고3 입시를 마무리할 즈음 아버지는 집 앞마당에 앉아 재혼 계획을 밝히셨고, 나는 좀 빠르지 않으냐 말한 것 외에는 특별히 반대하지 못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혼자 집에 있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52세, 우리가 모두 집을 떠났으니 아버지에게 짝이 필요할 거라고 느꼈으며 엄마가 암을 앓는 3년 동안 자신이 죽으면 아버지는 곧 재혼할 게 뻔하다고 말해왔기 때문에 올 것이 왔다는 생각도 했다. 지금의 나였다면 기쁘게 지지해줬을 텐데 그때는 아직 엄마를 생각했던 시기여서 그러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나중에 듣기로는, 내가 그 정도로 부드럽게 넘어간 것은 어른들의 예상을 깨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의외로 크게 분노하고 아버지에게 차갑게 군 것은 내가 아니라 나보다 5살이 많은 작은오빠였다. 어쨌든 우리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그 겨울 아버지는 재혼하셨다.


두 분의 결혼식은 절에서 간소하게 치러졌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를 처음 만났다. 내가 아는 새엄마에 대한 정보는 고모들이나 동네 아주머니들이 이야기하는 걸 엿들은 정도였는데, 결혼 경험이 없고 자식이 없는 분이라는 게 다였다. 특별히 더 궁금하지도 않았고,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게 되면서 같이 살았던 시절이 없어서인지 자세히 물어볼 기회도 없었다. 우리 4남매끼리 있을 때는 '새엄마'라고 부르고, 그분 앞에서는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자연스럽게 아빠도 아버지가 되었다. 갑자기 예의 바른 가족마냥 어머니, 아버지라는 호칭이 오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올해로 우리 집에 오신지 27년이 되셨다. 나로서는 엄마보다 더 오래, 어머니와 가족으로 지낸 셈이다. 오뎅탕으로 투덜거리던 우리 4남매는 이제 다들 4~50대가 되었고 어머니, 아버지는 80이 되셨다.   


그렇다고 엄마의 빈자리가 모두 채워진 건 아니었다. 지금만큼 늙지 않으셨을 때는 누군가 사 온 명절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용돈이 적으면 은근히 불만을 표현하시기도 했고, 시댁이 가까운 언니가 친정에 와서 하룻밤 자고 가는 걸 못마땅해 하시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돈이 필요하다고 전화해서 조금 보낸 적도 있다.


우리 4남매가 모두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는 동안 일반적인 할머니가 보이는 반응보다 덜 뜨거웠던 것도 사실이다. 원래 아기들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지, 아기를 키워보시지 않으셔서 그러신지 어린 손주들에게 살갑게 굴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가족이 가끔 모여도 옛날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게 가장 안타까웠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가 소외되므로 그런 이야기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우리 4남매와 어머니는 성인이 된 후 새롭게 가족이 되었기 때문인지 특별한 부딪힘도 없었고 극적인 끈끈함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흐르고 흘렀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해서 서로의 의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지키고 살아왔다. 특히 작은오빠와 언니가 여전하다. 어머니께 무례하게 굴지는 않으나 교류와 접촉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관계이다. 그에 비해 큰오빠나 나는 조금 더 가깝다. 심지어 나는 말하다가 '엄마'라는 말이 튀어나올 때도 있어 스스로 놀랄 때도 있다. '엄마'라는 단어가 가지는 애틋함이 어머니께 생기고 있나 보다 싶다가도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해 금세 어머니라는 단어로 고쳐 말하기도 한다.


나는 늘 어머니께 감사했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시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철마다 된장, 고추장, 김치를 만들어 나눠 주시고, 내가 좋아하는 콩을 잔뜩 심어서 냉동실에 쟁여두었다 나 오기를 기다리신다. 갈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해 주시는데 여태 부엌일을 안 시키셔서 시골에 내려갈 때면 항상 외식을 하려고 한다. 심지어 27년 동안 엄마의 제사 준비까지 다 해 주셨다. 허리가 안 좋아져서 조금이라도 도우려고 노력 중이지만 아직도 집안 대소사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무척 크기만 하다. 엄마였다면 당연하게 생각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엄마라도 어머니라도 누구라도 당연한 게 아닌 건데, 아마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그걸 깨닫기까지 한참 걸렸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엊그제는 난생처음 김장하는 데 일손을 보탰다. 3시간가량 이것저것 했는데 힘들다는 내색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품앗이로 김장을 돕는 동네 아주머니 모두 70대 후반, 80대였기 때문이다. 오늘 그 김치를 꺼내 먹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몇 년 전에 시골에서 가져왔는데 안 먹고 놔뒀다가 물러서 아예 버려야 했던 김치를 생각했다. 아픈 허리를 두드려가며, 1박 2일 동안 콧물 흘려가며 만드는 김장의 현장을 경험하니 뭐든지 뚝딱 되는 건 없는데 그걸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말이 1박 2일이지, 그 많은 양의 마늘과 생강을 까고 다지고, 새우젓을 사고 고춧가루를 마련하는 등 그 노고가 말도 못한다. 이상하게도 그 노고 앞에 '이제 힘드시니 김장 그만해라.'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와 나는 또 하나의 연대감이 생겼다. 추억이라고 해야 맞을까. 김장의 현장에서는 보잘것없는 노동력이기는 하지만 하루를 함께하니 그런 마음이 자란 것이다.  

죄송스럽게도 '엄마'의 호칭을 드리지는 못했지만, 이미 27년 동안 그런 마음이 조금씩 자란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선을 지키는 가족이 꼭 나쁘지도 않다. 우리는 27년 동안 서로에게 짜증 한 번 내지 않았고 늘 평화로운 마음과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머니'가 조금은 멀게 느껴지는 호칭이긴 하지만, 이미 엄마와 다를 바 없는 어머니임을, 어제도 헤어질 때 꼭 안아 드리면서 내 온몸으로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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