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 류은숙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2024, 코난북스)
돌봄의 상상력, 기꺼이 돌봄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 공적 돌봄의 필요를 요구하지만,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를 향해 돌봐야 한다는 상호돌봄의 윤리를 놓지 않는 사람들. 요약이나 비평보다 삶에서 끌어올린 여러 이야기들을 필사하는 게 좋겠다 싶어 기록. 그 전에 몇 가지만 기억하자.
돌봄은 세상과 불화하는 몸들이 버티는 구부러진 시간들을 함께 버티는 것일 테다. 시선, 유무형의 낙인, 정상성이라는 규범까지도 시시때때로 옥죄어 들어오는 시간들에 함께 저항하는 것이다.
돌봄을 둘러싼 협상권이 당사자에게 주어져야 한다. 돌봄을 자기 뜻대로 받아들이거나 통제할 권리, 어떻게 획득될 수 있을까. 서비스라는 상품을 사서 이용하는 계약관계여야 하는가. 그런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장하는 우리들에게 이 돌봄의존자의 협상권은 어떻게 획득되고 관철될 수 있는가.
때로는 그릇되다 하더라도, 우리는 당사자의 욕망을 이해해야 한다. 욕구와 욕망을 해석하는 일, 이에 대한 태도가 의존자에게 결정적일 수 있다.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언제든 깰 수 있는 관계 또한 전제되어야 한다. 이는 관계의 파괴나 완전한 이별이 아닌(그럴 이유가 있는 일이 발생치 않은 다음에야) 관계가 고정당하지 않을 권리, 출구 없는 관계가 유지되지 않을 권리의 보장을 의미한다. 주변의 동심원이 필요하다. 당사자 대 가족관계를 넘어선 주변의 지지망들, n차 동심원의 관계망을 구축할 공적인 체계.
인상적인 부분들 기록
돌봄이 당장 공적 의제로 다뤄진다고 해서 정의로운 제도로 부드럽게 안착하는 그런 낭만은 없다. 돌봄의 배치를 달리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지금껏 해온 그대로 돌봄을 성역할, 집안일로 계속 배치하면 찔금 지원하고 생색내는 제도에 그칠 게 뻔하다. 가령 집안 돌봄자에게 빈약한 보조금을 주는 데 그친다면 돈도 받으니 네가 계속해라 라는 압력이 가해질테다. 노동시장에서 싸게 외주 줄 수 있는 일로 계속 배치된다면 보상도 형편없고 경력 인정을 기대할 수 없는 일로서 이주여성노동자나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중노년 여성 등에게 계속 전가될테다. 구매력 있는 소비자로 편리를 누리는 계급의 사람들은 애써 공적 돌봄 제도를 만드는 데 무관심할 것이다. 돌봄을 하지 않는 것으로 경제적 이익과 여유로운 시간 등을 누릴 수 있는데 굳이 골아프게 공적 제도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돌보고 돌봄 받는 몸들은 이런 배경 속에서 서로의 관계를 기획하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성공, 결렬, 어느 정도의 포기, 재시도, 재도약. 매순간 이 기획을 어떻게 실현케 할 것인가 협상이 필요하다. 협상을 하려면 협상력이 필수다. 돌봄에 의존하는 당사자인 아동, 노약자 등은 협상력이 약할 수밖에 없고 돌보는 사람 또한 돌보면 돌볼수록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발언력으로나 취약해진다. 이런 돌봄 당사자들이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과 조건을 만드는 일이 절실하다. 그 조건의 출발점은 돌봄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사회 공통의 의제로 같이 다루는 것이고 하던 대로가 아니라 돌봄을 새롭게 배치하면서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것일 게다.
지체장애 여성의 인지장애 어머니 돌봄기 ; 저의 이야기가 어쩔 수 없어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의 이야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저 개인의 경험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돌봄 지도 만들기에 디딤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활동지원사와 장애여성의 관계, 장애인 활동가와 비장애인 활동가의 관계,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 돌봄을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돌봄을 하는 장애어성의 돌봄 경험 등은 장애여성인권운동의 핵심 주제요 서사다. 탈시설 운동이 돌봄과 보호의 이름으로 자유와 사생활을 구속하는 시설에서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시설화로 수렴하는 모든 규범이나 관행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할 때 이 주제들은 모두 탈시설 운동이다.
장애인과 활동지원사 양측 모두의 의사결정권이 존중되는 방법은 없을까. 둘의 긴장된 관계를 이용자의 산택권과 돌봄 노동자의 노동권으로 축소해서 이해하는 건 너무 앙상하고 위험하다. 그건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의 틀이 여전히 강고하다는 증거다. 오히려 활동지원사와 장애인은 서로 기대고 돌보며 시소의 양 끝처럼 주도권을 협상하며 성장하는 관계로 이해하는 게 맞다.
불편함과 긴장을 견디면서라도 고마움과 저항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해요. 단순히 주도권을 잡고 놓지 않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와 내가 같이 적응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거예요. 실제로 내가 돌봄을 받기만 하는 건 아니거든요. 나는 그의 신세 한탄도 들어주었고 핸드폰으로 은행 업무를 보고 기차표 예매하는 것도 알려줬어요. 그리고 사회가 어떤 차별을 대놓고 조장하는지도 알게 해줬어요. 내가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며 이동한 공간들은 그에게도 처음 만나게 된 사회거든요.
서로 다른 몸의 상호 의존 서로 돌봄을 말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현장에는 정말 다양한 몸이 있다. 걷는 게 가능한 몸, 휠체어를 이용하는 몸, 실내에서 바닥을 기어서 활동하는 몸, 구어 소통이 어려운 몸, 청각장애가 심한 몸, 몹시 뒤틀리고 꼬인 몸, 이 몸과 몸이 만드는 관계 중 어느 것 하나도 떨구지 않으면서 적절하게 몸과 말의 움직임을 짜고 배치하는 게 가능할까, 어떻게? (중략) ‘말로 해야 알아?’와 ‘왜 안 물어봐?’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알아차림이 활동이 개인의 감수성이나 능력이 아니라 운동 단체의 집단 역량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역량은 몸들이 만나 몸으로 대화를 나누는 다양한 실험과 시도, 연습으로 자라난다.
“내가 보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건, 중증장애인인 내가 매끈하게 대접받는 게 아니라 나도 그 과정에 엮여 들어가 소통하고 관계 맺는 모습이에요. 세팅은 너무 잘 돼 있는데 업무 관계에서는 왕따 당한 느낌이 들어요.” 중증장애인이 용기를 내서 말한 뒤로 다양한 몸이 바닥에 앉거나 누워 움적움적 소통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신입 활동가에겐 시간 속에서 다른 몸들을 만나며 익히는 몸의 체화된 지식이야말로 생략할 수 없는 필수다. 서로 다른 몸들이 서로를 향하지는 않은 채 ‘장애 해방’이라는 한 방향을 보는 경향이 강해지면 알아차리는 감각이 집단적 역량으로 자라기 어렵다. 돌봄으로 돌보고 키우는 조직 문화는 선언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어긋남과 실패에 따르는 감정과 마음의 역동에 같이 흔들리는 문화여야 한다. (중략) “장애는 그 사람의 고유성 중의 하나예요. 이 하나가 그의 다른 고유성과 연결되는 지점들을 섬세하게 살펴야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만날 수 있어요. 나는 이거야말로 장애운동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책을 분석하고 제도화를 추구하는 한편으로 이 핵심이 흐려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 서로를 지키기로 해요”
생산과 재생산, 굳이 이분법으로 접근하겠다면 재생산 활동, 즉 돌봄을 중심에 놓고 생산 활동이 돌봄을 보조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삶, 관계, 공동체를 빚어내는 활동이 중심이고 자동차, 핸드폰 만드는 활동이 보조다. 돈을 버는 것은 삶을 위한 것이지 돈을 위해 삶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책으로 세상을 만나다 이제 노년들을 만나는 나한테는 어떤 형태로든 평생 분투하며 살아내고 이제 타인에게 자기 존재를 맡기는 노인은 여러 영역의 책을 합친 것과 비슷해. 이분들을 통해 세상과 타인과 삶을 조금씩 다르게, 새롭게 만나게 돼.
누가 어떤 돌봄의 곤경에 처하게 되는지 서로 잘 알아차리자. 우리 지금 모두 잘 하고 있잖아. 각자 자기 자리에서 성심성의껏 돌보고 있잖아. 우리가 사회를 조금씩 바꾸고 있는 거야. 이게 우리의 노후 준비인 거지. 우리도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며 늙어갈 텐데...그 때, 나 좀 잘 돌봐달라고 나라는 사람이 살아온 내력도 취향도 들어가면서 사이좋게 지내보자고 두려움 없이 기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거 말이야. 그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