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겠는가? _욥25:4
1 그때 수아 사람 빌닷이 대꾸했습니다. 2 "주권과 위엄이 그분께 있으니 그분이 높은 곳에서 평화를 세우신다. 3 그분의 군대를 셀 수 있겠는가? 그 빛이 일어나면 누가 받지 않겠는가? 4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겠는가? 여자가 낳은 사람을 어떻게 깨끗하다고 하겠는가? 5 하나님 보시기에는 달도 밝지 않고 심지어는 별들도 맑다고 할 수 없는데 6 하물며 벌레 같은 사람이야, 구더기 인생이야 오죽하겠는가!" 욥25:1-6, 우리말성경
욥의 강력한 반론이 끝나고, 조명은 다시 두 번째 친구 빌닷에게 향한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단호함이나 교조적인 태도가 사라져 있다. 그의 세 번째 연설은 놀라울 정도로 짧고 힘이 없으며, 마치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오래된 찬송가의 한 구절을 읊조리는 듯하다. 그는 욥이 제기했던 현실의 문제들을 완전히 외면한 채, 그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비천함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만 반복할 뿐이다.
빌닷의 이 짧은 연설은 사실상 논쟁의 포기 선언과 같다. 욥이 제시한 '악인의 형통'과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강력한 현실의 증거 앞에서, 친구들의 인과응보 신학은 완전히 파산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논리는 바닥났고, 이제 남은 것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추상적인 진리를 되뇌며 대화를 회피하는 것뿐이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이 연극의 인간적인 논쟁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욥의 24장에 걸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 이후에 이어진 빌닷의 세 번째 연설은 허무할 정도로 짧고 공허하다. 그는 욥이 제기했던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악인은 왜 형통하는가? 하나님은 왜 가난한 자들의 신음에 침묵하시는가? 이 어려운 질문들 앞에서 빌닷은 대화를 포기하고, 가장 안전한 주제로 도피한다.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위대함과 인간의 근원적인 비천함이다.
빌닷이 하는 말 자체는 틀리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의로울 수 없다는 것, 달과 별도 그 앞에서는 빛을 잃으며 인간은 벌레와 같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욥이 던지고 있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다. 고통의 '이유'와 '정의'를 묻는 사람에게, '너는 죄인일 뿐이니 잠잠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진리를 사용하여 대화를 단절시키고, 고통받는 자의 입을 막으려는 영적인 폭력에 가깝다.
우리는 종종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을 때, 빌닷과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대해 원론적이고 교과서적인 정답을 제시하며 상황을 덮으려 한다. 그러나 상대방이 듣고 싶은 것은 모범 답안이 아니라, 그 어려운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함께 고민해주는 진실한 태도다. 빌닷의 실패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공감의 부재, 그리고 자신의 신학적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교만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빌닷의 이 짧은 침묵에 가까운 연설은, 친구들의 '인과응보' 신학이 현실의 복잡한 문제들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 되었다. 그들의 모든 논리는 소진되었고, 이제 무대 위에는 오직 자신의 고통과 신앙을 끌어안고 홀로 서 있는 욥만이 남았다. 인간의 지혜가 끝난 바로 그 자리에서, 욥은 이제 마지막 독백을 시작할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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